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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의 봄을 전하다

On October 01, 2013

국토의 최남단 완도에서 배 타고 한 시간, 살가운 미풍 가르며 바닷물을 가로질러 도착한 청산도에는 진홍빛 꽃망울 툭툭 터져 노란 꽃분 쏟아내고 여린 보리 순이 봄바람에 어지러이 춤추고 있었다. 봄의 전령이 먼저 찾아와 대지가 바삐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곳은 하늘과 바다가 눈부시도록 푸르다.

온 데를 둘러봐도 청산이다

산도 바다도 하늘도 모든 것이 푸르다 하여 이름 붙은 ‘청산’. ‘살으리 살으리랐다, 청산에 살으리랐다.’ 선조들이 읊조리던 선망의 나라가 청산도와 같았을까? 따스한 기온과 푸른 산천, 물고기 그득 헤엄치는 바다에 둘러싸인 청산도는 그러나 외로운 섬이기도 하다. 바삐 부대끼고 사는 뭍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청산도에서 시간은 고요히 흘러간다. 이곳 사람들은 봄이면 나물 뜯어 먹고 쌀 떨어지면 보리농사짓고 그물로 생선 잡아먹으며 그렇게 자연에 순응해 살아왔다. 지금처럼 하루 왕복 4번, 큰 배가 드나들기 전에는 작은 뗏목 타고 뭍에 나가는 데 꼬박 한나절이 걸렸으니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느림의 미학’으로 주목받으며 청산도가 ‘슬로시티’로 지정되었고, 휴식을 즐기고 싶어 하는 뭍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청산도의 봄은 어느 계절보다 찬란하다. 햇살이 눈 시리게 부서져 내리는 바다를 배경으로 샛노란 유채꽃이 수를 놓고 무릎까지 자란 보리가 봄바람에 일렁인다. 빨갛게 피어올라 절정의 순간에 낙화하는 동백꽃이 발 닿는 곳마다 수놓은 황톳길하며 온갖 봄나물이 파랗게 주저앉은 층층의 구들장 논이 봄바람 든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남도의 끝자락, 봄의 습격을 받아 푸르게 물든 청산도의 가슴 뛰는 이야기.

“바깥 사람이나 보리 좋다고 하지, 보리 순 같은 건 우린 이제 쳐다도 안 봐. 보리쌀도 지겨워 죽갔는디 보리 순은 왜 먹어. 세월 좋아졌으니 이제 쌀 먹어야제.”

푸르게 물든 논과 밭

‘봄의 똥’과 풋내 나는 멍텅구리마늘
“봄이 싸놓은 똥이여, 똥은 똥인디 돈벼락을 맞게 해주는 똥이니 얼매나 이쁘간디.” 늦겨울부터 다가올 계절을 미리 예고하며 피어나는 봄동, 청산도의 해풍을 맞고 자란 봄동은 여느 것보다 그 맛이 향긋하고 부드럽다. 전국에서도 가장 먼저 피어난다는 청산도의 봄동. 이미 양지바른 곳에서 피어난 것은 수확을 끝마쳤고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음지쪽에 있는 봄동은 끝물 작업이 한창이다. 어디에 가도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청산도, 푸른 밭을 알록달록 수놓고 있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필시 그것은 봄동 작업 하러 나온 아낙네 무리이다.
“무쳐도 먹고 겉절이도 담가 먹고 삶아서 국도 끓여 먹고… 그냥 먹어도 다디달아.”
봄동의 흙을 탈탈 털어내고 바리바리 싸온 집된장과 술 한 병을 꺼내 놓으면 그 자리에서 새참 술상이 마련된다. “봄동은 마늘에 비하면 돈도 아니여. 이제 5월 되면 마늘을 캐야제.”
청산도에서 봄동보다 더 유명한 것이 마늘이다. 섬 어디를 가도 푸르게 솟아난 마늘대를 볼 수 있다. 청산도의 재래종 마늘은 ‘멍텅구리마늘’이라고 부르는데 어디에 심어도 가리지 않고 바보처럼 쑥쑥 잘 자란다고 해서 이름 붙였다. 이 마늘은 생으로 먹어도 맵지 않을 정도로 순하고 향긋한 맛을 자랑하는데 씨알이 잘아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급용 외에 판매용으로 재배하는 농가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재배하는 것은 외국에서 건너와 남도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는 대서마늘과 남도마늘로, 비록 재래종은 아니지만 물 좋은 청산도에서 자라 맛이 좋기 때문에 찾는 이들이 많다

1 남도의 해풍을 맞고 자라 유난히 부드럽고 단 시금치.
2 청산도의 주요작물 마늘밭.
3 일반적인 쌀보리와 소가 먹는 사료용 보리, 그리고 맥주를 만드는 데 쓰이는 맥주 보리, 세 가지가 재배된다.
4 보리 싹 튼 모습.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이곳 아낙네들은 늦겨울에서 초봄까지는 봄동과 봄나물, 늦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마늘, 한여름에는 콩과 보리, 가을이 되면 쌀을 재배하느라 일 년 내내 눈코 틀 새 없이 바쁘다. 논이건 밭이건 일 년에 이모작을 기본으로 한다. 청산도 아낙들이 이렇게 부지런한 데에는 돌로 된 섬 지형이 한몫한다. 벼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많지 않기 때문에 곡기를 잇기 위해서는 쌀을 대체할 작물을 생산해야 한다. 청산도에는 ‘처녀가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쌀이 워낙 귀해 뭍으로 시집가기 전까지는 평생 먹는 쌀의 양이 서 말도 못 된다는 이야기다.
청산도에서 마늘과 함께 가장 많이 재배하는 것이 보리이다. 외지인의 눈에는 순록의 보리 순이 귀하게 보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흔해 빠진 것이 보리 순이다.
“바깥 사람이나 보리 좋다고 하지, 보리 순 같은 건 우린 이제 쳐다도 안 봐. 보리쌀도 지겨워 죽갔는디 보리 순은 왜 먹어. 세월 좋아졌으니 이제 쌀 먹어야제.”
뭍에서 오는 쌀이 지금처럼 흔치 않았을 때 이곳 사람들은 보리 순이나 마늘 순 등 새순으로 봄 밥상을 차려 먹었다. 지금은 새순 밥상을 먹는 곳이 귀해졌지만 여전히 보리 산지로 유명한 청산도는 섬 전체에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5 청산도에서 볼 수 있는 ‘구들장 논’. 돌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을 깎아 흙을 쌓아 올리고 씨앗을 뿌려 물을 대어 논밭을 일구었다. 척박한 땅을 개척해 살아가는 섬사람의 지혜와 생활력을 엿볼 수 있다.

푸봄이 선사하는 바다와 땅의 맛

“지천에 널린 게 먹을 것인디 장을 볼 것이 뭐가 있간디?” 정말 그러고 보니 청산도에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시장이 어디에도 없다. 여객선터미널에 위치한 가게에서도 채소와 해산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래전부터 자급자족에 익숙해진 이곳 사람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밥상을 차려낸다. 집 앞 마늘밭에 나가 풋내 나는 마늘 순을 쑥 뽑아 그 자리에서 매콤하게 무쳐내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톳을 넣고 밥을 짓는다. 김이 유명한 곳답게 김으로 향긋한 국도 끓이고 고소한 전도 부친다. 마을 어귀에서 달래, 냉이 캐고 쑥 뜯어 상에 올리고 특별한 날에는 이웃 어부에게 바닷고기를 구한다. 날 풀리면 뒷산에 올라가 약초를 뿌리째 캐내 와 아무 데고 마당에 옮겨 심어놓고 약처럼 달여 마신다. 먹을 것이 정 없을 때에는 갯벌에서 채취한 갖가지 해조류로 반찬도 만들고 김치도 담그고 탕도 끓여 먹는 지혜로 여러 시절을 연명해왔다. 자연이 선사하는 재료 그대로 밥상을 차려 내니 부러 차린 것도 아닌데 소박한 밥그릇에 봄 내음이 한 움큼 들어 있다.

1 향긋한 쑥전과 바다 내음 가득한 김전.
2 죽보다 되고 풀죽처럼 끈적거리며 바다 내음을 풍기는 청산도탕.
3 아직 덜 자란 마늘대를 뽑아 그 자리에서 무쳐내면 풋풋한 향이 일품이다.

청산도의 자연 밥상

탕이지만 죽, 청산도탕
청산도에서는 예전부터 제사상에 반드시 올리는 음식이 있다. 섬의 이름을 딴 ‘청산도탕’이 그것으로 이름에 ‘탕’자가 들어가 국물 요리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옛 서민들이 배고픔을 잊기 위해 여러 잡곡가루를 섞어 죽보다 되게 쑤어 먹던 풀떼기의 청산도식 변형이다. 쌀가루와 보릿가루에 바다에서 잡은 제철 해산물을 잘게 썰어 넣고 쑤는데 잘사는 양반 가문에서는 제사상에 그 종류만 7가지를 올렸을 정도로 중요시했다. 홍합이 날 때에는 홍합을 넣고 전복이 있는 날에는 전복을 넣는 등 들어가는 해물의 종류는 그때그때 바뀐다. 한 입 먹으면 풀처럼 끈끈하고 되직한 질감에 바다의 향이 묻어나는 것이 미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바다와 땅이 만나 뒤섞인 맛이다. 죽처럼 식사 대용으로 먹어도 될 듯하고 반찬으로 먹어도 될 듯한 그 경계가 매우 묘한 고유의 향토 음식이다. 최근에는 청산도탕을 슬로푸드로 지정하고 ‘슬로푸드 체험관’에서 판매하는 ‘청산도 밥상’에 올려 관광객도 그 맛을 볼 수 있다.

1 대규모 전복양식장은 언제나 바쁘다.
2 생명력 꿈틀대는 전복.
3 전복을 넣고 끓여낸 김국. 향긋한 바다 내음이 한가득이다.
4 전복 껍데기에 붙어 있는 따개비 제거 작업이 한창이다.
5 청산도에서 맛볼 수 있는 귀한 ‘참소라’. 삶아서도 먹고 참기름에 볶아서도 먹는다.
6 톳과 우뭇가사리, 다시마와 미역 줄기 등 해초로만 만든 비빔밥.

청록빛 섬마을

동네 강아지도 고등어를 물고 다녔던 천혜의 어장
본래 청산도 인근 해역은 물고기가 바글바글 끓던 천혜의 어장이었다. “고등어 철에는 동네 개들도 고등어 한 마리씩 물고 다녔으니께,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제.” 고등어 철에는 고등어가, 삼치 철에는 삼치가 들끓던 이곳이었지만 대형 어선이 나타나면서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고기를 싹쓸이하고 그 수가 줄어 이제는 천연 어장의 기능을 많이 상실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전복양식, 본래 해녀들이 잡는 자연산 전복이 유명했는데 이제는 대규모 전복양식이 성행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맛으로 유명했던 청산도의 전복을 이용한 음식도 다양하게 발전했다. 전복은 워낙에 시세가 있어 여기서도 귀한 음식이긴 마찬가지이다. 전복구이나 전복회 등은 최근 들어서 많이 먹는 음식이고 이곳 주민들은 전복 하나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전복죽이나 전복탕 등을 즐겨 먹었다.

7 비가 온 뒤에는 이삼일 동안 바람 불고 안개가 잘 가시지 않는다. 청산도에서는 이런 날씨를 ‘비 온 뒤 개거지한다’고 말한다.

청산도에는 전통 어업 방식인 ‘독살’을 고수하는 해녀들과 작은 통통배 끌고 나가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남아 있다. 어부들은 주로 자연산 우럭이나 광어 등을 잡아 팔고 해녀들은 소라와 홍합, 멍게 등을 딴다. 운이 좋으면 자연산 전복을 맛볼 수도 있다. 특히 청산도는 커다란 크기에 뿔이 난 ‘참소라’가 유명한데 제주도와 청산도 인근에서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하다. 튼실하니 탱글탱글 뽀얗게 오른 살을 씹는 질감과 진한 바다 내음이 일품이라 애주가들의 안줏거리로도 사랑받는다. 청산도의 여객선터미널 인근에는 십여 개의 식당이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청산도의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자연산 우럭으로 끓인 매운탕이나 전라도식 묵은지에 싸 먹는 활어회, 그리고 참소라를 참기름에 고소하게 볶아낸 향토 음식 ‘꾸죽’ 등이 별미다. 전복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서는 전복구이백반부터 전복회, 전복김국 등 다양한 전복 요리를 뭍에서보다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1 봄의 전령사 동백꽃이 마을 어귀마다 빨갛게 피어오른다.
2 돌담 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토종 씨암탉.
3 <서편제>의 한 장면을 그린 벽화가 마을 이곳저곳을 수놓고 있다.
4 영화 <서편제>에 등장했던 황톳길. 멀리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도 보인다.

얼기설기 돌담 황톳길

‘저 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 날 두고 가는 임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만경창파에 둥둥둥 뜬 배 어이여차 어야 디어라 노를 저어라’ 바다가 보이는 황톳길을 떠돌이 소리꾼 가족이 내려오며 판소리 주고받는 장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이다. 이 장면을 찍은 곳이 바로 이곳, 청산도의 돌담 황톳길이다.

5 4월이 되면 유채꽃이 절정에 이른다.
6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는 흑염소 뒤로 오밀조밀 개간한 밭이 보인다.
7 청산도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범바위’.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가 보이는 <서편제> 소릿길과 슬로길
돌이 많고 바람이 많이 불어 오래전부터 돌담을 쌓아 올린 청산도의 돌담길에는 제주도의 그것과는 또 다른 소박하고도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 탁 트인 바다 전경과 가슴속까지 맑아지는 듯한 깨끗한 공기, 완만하게 경사진 청산도의 돌담길은 42.195km의 ‘슬로길’로 지정되어 매년 4월이 되면 ‘슬로걷기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리는 등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옛날 방식으로 지은 축사에서 노니는 토종닭과 누렁소, 흑염소를 마주하고, 마을 어귀마다 붉게 낙화하는 동백꽃에 취해 언덕으로 올라가면 저 멀리 푸른 하늘과 바다를 무대로 층층이 계단식으로 이뤄진 논과 밭에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4월이 되면 섬 가득 노랗게 피어나는 유채꽃과 무릎 높이만큼 자라는 보리가 마음까지 환하게 밝힌다. 탄식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름답지만 어딘지 애틋한 정서가 피어오르는 이맘때의 청산도는 잊지 못할 잔상을 남긴다. 돌담길을 돌면 구성진 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전래동화 같은 섬마을 청산도는 지금 봄앓이로 한창 달아올랐다.

청산도 느린섬 여행학교와 슬로푸드 체험관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에는 청산도 향토 음식을 체험하고 맛볼 수 있는 ‘슬로푸드 체험관’이 폐교를 개조해 만든 ‘청산도 느린섬 여행학교’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슬로푸드 체험관에서는 청산도탕과 톳밥, 해조류 반찬 등 제철 음식으로 차린 밥상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으며 느린섬 여행학교에서는 각종 체험 행사와 함께 개인이나 가족, 단체 등이 머물 수 있는 숙박동도 운영하고 있다.
문의 www.slowfoodtrip.com 061-554-6962

국토의 최남단 완도에서 배 타고 한 시간, 살가운 미풍 가르며 바닷물을 가로질러 도착한 청산도에는 진홍빛 꽃망울 툭툭 터져 노란 꽃분 쏟아내고 여린 보리 순이 봄바람에 어지러이 춤추고 있었다. 봄의 전령이 먼저 찾아와 대지가 바삐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곳은 하늘과 바다가 눈부시도록 푸르다.

Credit Info

촬영혐조
청산 느린섬 여행학교,슬로푸드 체험관,산새민박
포토그래퍼
김나윤
에디터
강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