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어져야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다. 국내 내로라하는 정상급 셰프들도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회포를 푸는 곳, 프렌치 심야식당 루이쌍끄.
심야의 프렌치, 밤의 유랑자를 품어 안다
루이쌍끄는 일본의 유명 만화이자 드라마로도 방영된 <심야식당>의 프렌치 버전이다. 저녁에 문을 열어 새벽 1~2시까지 영업하는 이 특별한 프렌치 비스트로에서 정종은 와인으로, ‘어제의 카레’는 ‘어니언 수프’로 바뀌어 밤의 유랑자를 품어 안는다. 맛있는 프렌치를 즐기고 싶은데 일이 늦게 끝나 일반 식당은 가기 어렵다거나 하루 일과가 끝나고 기분 좋은 술자리를 가지고 싶지만 시끌벅적한 고깃집은 싫다거나, 이곳을 찾는 이들의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특히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킬 만한 레스토랑을 좀처럼 찾기 힘든 동종 업계의 셰프와 스태프도 이곳의 단골손님이다. 유명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와 스태프 서너 팀이 일시에 모여들어 가게를 가득 메우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날도 있다
거침없는 젊은 경험이 빚어낸 솔직한 맛
생긴 지 이제 2년 남짓, 이유석 셰프가 운영하는 이 가게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은 비단 ‘심야 프렌치’라는 특별한 콘셉트 때문만은 아니다. 식사와 와인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프렌치이지만 그 어디보다도 제대로 된 요리를 내놓는다. 와인이 절로 넘어가게 하는 안줏거리는 동시에 출출한 속을 달래주는 요깃거리로도 충분하다. 이곳을 이끌고 있는 오너 셰프 이유석은 30대 초반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야리야리한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꾀부리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대담함과 솔직함이 있다. 만화 <심야식당>의 주인공처럼 얼굴에 긴 흉터를 새기고 있는 건 아니지만 칼자루 하나 손에 쥐고 전 세계를 뛰어다닌 열정이 있다. 조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모험심에 차서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 일본을 돌며 요리를 배웠고, 젊은 시절의 그 푸릇푸릇한 경험이 지금의 단단함을 만들어냈다. 속이 꽉 찬 단단함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을 자랑하는 폼 나는 레스토랑 대신 소박하지만 알찬 프렌치 비스트로를 열게 했다. 잔꾀보다는 맛으로 정면 승부하는 곳이기에 녹록지 않은 경력의 셰프들도 인정하는 심야식당이 되었다.
1 이윤석 오너 셰프. 오픈 키친으로 요리하는 그의 모습을 언제 가도 볼 수 있다.
2, 3 편안한 분위기의 가게 내부. 홀로 와 바에 앉는 손님도 많다.
마음을 달래주는 양파수프
양파수프는 프렌치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 메뉴이자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언제나 기본이 어렵듯 제대로 맛내기 힘든 메뉴이기도 하다. 루이쌍끄는 무엇보다도 이 기초적인 양파수프로 유명해졌다. ‘프랑스 요리의 기초’ 비슷한 책만 펼쳐도 레서피가 나와 있는 대중적인 메뉴임에도 이것이 루이쌍끄의 ‘시그너처 메뉴’로 유명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의 음식을 신뢰하고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파수프는 간단해보여도 굉장한 정성을 요구하는 요리다. 두꺼운 팬에 잘게 썬 양파를 넣고 30분 넘게 수분을 날리며 버터에 볶아 윤기 나는 갈색의 곤죽이 될 때까지 캐러멜화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으깨지고 뭉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양파에서는 특유의 향과 함께 혀에 착 감기는 단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여기에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넣어 뭉근히 우려낸 콩소메를 붓고 함께 끓여 그릇에 담는다. 이때 그릇에는 딱딱한 빵을 넣는데 딱딱했던 빵이 육수를 가득 머금고 부들부들해져 국물과 함께 떠먹기 좋게 된다. 마지막으로 에멘탈치즈를 수북이 갈아 올려 황금빛을 띨 때까지 오븐에 녹여 구우면 바삭하고 짭조름한 치즈크러스트로 덮힌 크리미하고 진한 국물의 양파수프가 완성된다. 과연 프랑스인들의 ‘솔 푸드’ 자격을 지닌 맛이다. 생소한 우리나라 사람이 먹더라도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효험을 본다.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나 제맛을 내기는 어려운 정성 담긴 음식. 그래서 양파수프를 제대로 만드는 루이쌍끄가 사랑스럽다.
1 섬세한 손길로 음식을 담아내는 이유석 셰프.
2 이곳을 유명하게 한 양파수프와 매일 다양한 재료로 바뀌는 테린.
음식과 술, 그리고 이야기
루이쌍끄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이유는 또 있다. 최근 이윤석 셰프가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과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아 담은 에세이 <맛있는 위로>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손님들과 음식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여 루이쌍끄의 음식을 먹으려 예약하는 사람들로 몇 달 뒤까지 예약이 찼다. 음식에 이야기가 더해지면 그 음식은 더 맛있어진다. 이윤석 셰프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섬세한 감수성이 루이쌍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이야기 하나, 1년 반 만에 대화를 나눈 단골
심야식당을 이끄는 이 셰프는 사실 쉽게 속마음을 내놓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로 손님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편이다. 단골이 되어 친근해지고 말이 통하면 그도 덩달아 말이 많아진다. 하지만 아무리 혼자 온 손님이더라도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면 그도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다. 루이쌍끄 초기부터 한 달에 몇 번씩 오는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항상 혼자였지만 특별히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다거나 외로워 보이지 않았고 어쩌다 건네는 질문에도 늘 단답식이었다. 그러기를 1년 반, 유난히 손님이 없던 어느 날 또다시 홀로 찾아온 그 손님에게 셰프는 음식의 맛을 물었고 그날따라 대화는 끊기지 않고 천천히 이어졌다. 알고보니 그 중년의 남성도 쑥스러움이 많고 낯을 가릴 뿐, 음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섬세한 미식가였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말을 주고받은 셰프와 손님은 그 후 음식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와 단골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이 작은 공간에 서로의 이야기가 쌓여서 더 큰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셰프의 바람이다.
이야기 둘, 스태프와 싸우고 난 뒤 만든 치즈파이
레스토랑의 주방은 언제나 전쟁터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손발을 맞춰 일을 하려면 마음이 통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종 부딪치는 일도 생긴다. 비단 주방뿐 아니라 주방과 홀 스태프 간에도 호흡이 원활해야 레스토랑이 잘 굴러간다. 서로 놓치는 것을 챙겨주며 힘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생기 넘치는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오픈부터 이 셰프의 든든한 지원군이던 루이쌍끄의 매니저는 친절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레스토랑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만큼 힘든 날도 있는 법, 하루는 셰프와 매니저가 하루 종일 투덜대고 다투었다. 그날의 영업이 끝나고 기분이나 풀자고 불 꺼진 업장의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자니 허기가 밀려왔다. 하루 종일 바쁜 나머지 밥 먹는 것마저 잃어버린 터였다. 냉장고에는 그날 음식을 하고 남은 치즈 자투리가 남아 있었다. 매니저와 셰프는 그 치즈를 따뜻하게 데워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역시 팔다 남은 파이 반죽에 여러 가지의 자투리 치즈를 둘둘 말아 오븐에 구웠다. 갓 구워 따끈따끈한 파이를 반으로 쩍 가르니 노릇노릇한 치즈가 줄줄,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이 침샘을 자극하는 먹음직스러운 야식이 탄생했다. 황금빛 파이를 한쪽씩 나눠 들고 후후 불어가며 정신없이 먹는 사이, 가슴속 앙금은 치즈처럼 눈 녹듯 사라졌다. 그 후 레스토랑의 메뉴에 오른 치즈파이는 이곳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스페인 보케리아 시장을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이 셰프만의 와인 도둑, ‘보케리아’. 발사믹에 볶은 졸깃한 버섯을 수란 노른자에 비벼 질 좋은 하몽을 곁들여 먹으면 와인이 절로 넘어간다.
밤에 오세요
맛있는 음식은 꽁꽁 걸어둔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 사이가 서먹해졌을 때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려버린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여기에 술까지 더해진다면 깊은 진심이 담긴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맛있는 음식과 술은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기 때문이다. 감옥을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스키야키>는 감방의 동료 죄수들끼리 ‘누가 누가 맛있는 이야기를 하나’로 대회를 연다. 연말이면 시작되는 이 대회에서 가장 맛있는 이야기를 한 죄수에게는 새해 첫날 특식으로 들어오는 다른 이들의 도시락 반찬을 하나씩 골라 먹을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감방에서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나이 들어서 시시한 짓이냐’고 시큰둥하던 ‘감방 신입’ 주인공의 귀에 다른 죄수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고향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상경했지만 죄를 짓고 경찰에 쫓기던 젊은 죄수는 도망 끝에 시골의 어머니 집으로 간다. 몇 날 며칠을 굶은 채로 허겁지겁 들어간 집에서 어머니는 별다른 질문 없이 솥에서 갓 지은 밥을 퍼내 담고 막 수확한 다디단 옥수수를 쪄내 올린다. 따뜻한 밥 위에 버터를 올리고 옥수수를 후루룩 털어내 비비니 공깃밥에 얼굴을 묻고 먹을 정도로 꿀맛이라 들이닥친 경찰에게 이 밥만 다 먹고 가겠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동료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 주인공은 이내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 희망도 없어 보였던 옥중 생활에서 희망을 찾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추억이 서린 음식이다. 루이쌍끄는 음식에 관한 좋은 추억을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짧은 식사가 끝나고 여운을 다 누리지 못한 채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필요도 없고 식당 스태프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여기, 맛있는 음식과 이야기로 가득 찬 밤이 당신 앞에 놓여 있으니까.
info
메뉴 프렌치어니언수프 1만2천원, 보케리아 3만원
영업시간 오후 6시~새벽 1시
위치 서울 강남구 신사동 657 2층
문의 02-547-1259
어둠이 깊어져야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다. 국내 내로라하는 정상급 셰프들도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회포를 푸는 곳, 프렌치 심야식당 루이쌍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