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들이 펼치는 자기만의 수작록(酬酌錄; 술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기록).
“즐겨 마시는 술이라…. 애주가 인터뷰의 첫 질문으로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아닌가? (하하) 개인적으로 애주가의 기준 중 하나가, 모든 술에 얼마나 공평하게 애정을 나눠주느냐가 아닐까 싶다.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날씨에 따라 각각 어울리는 술이 있으니. 그래도 굳이 꼽으라면 어떤 음식에나 두루 잘 어울리는 맥주에 한 표. 술을 처음 배우던 대학 신입생 무렵, 맥주는 감자튀김이나 마른 오징어하고만 먹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음식에 눈을 뜨고 나서, 특히 처음으로 떠난 일본 여행에서 스시와 먹는 맥주 한 잔의 놀라운 맛을 경험하고 난 뒤로 맥주가 얼마나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는지 알게 되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첫 경험. 날생선, 밥과 먹는 맥주라니….”
강선옥 푸드칼럼니스트
음식을 알게 되면서 술은 반주의 개념이 되었다. 술만 따로 마시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꼭 음식과 곁들이게 된다. 특별한 메뉴를 준비한 날에는 술이 빠지면 안 된다. 요리를 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오롯이 술만으로, 오롯이 음식만으로 완벽한 맛을 내기가 어려운 듯하다. 음식과 술이 더해졌을 때 두 가지 모두 제 본연의 모습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음식 없는 술, 술 없는 음식은 서로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소규모 양조장에서 내는 크래프트 맥주에 신세계가 열려 퀄리티 높고 다양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맥주의 미덕은 열심히 일한 뒤 마시는 상쾌한 라거가 아닐까?
라거 맥주에는 짭조름하고 약간 기름진 안주가 제격. 또한 대화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밤에 편의점 앞에서 마시는 맥주나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마시는 캔 맥주, 을지로 만선호프 같은 곳에서 마시는 생맥주가 재미를 더해준다. 편한 사람들과 한식을 먹을 때는 소맥으로 시작한다. 그 비율이 아주 중요한데, 소맥을 잘 제조하는 사람이 무리 중에 꼭 한 명씩은 있다. 소맥 만드는 맥주잔이 따로 있지만 계량해서 만들면 이상하게 맛이 없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 데에도 경험치와 손맛이 깃들여 있는 듯하다. 요즘 배운 새로운 소맥 비율은 소주와 맥주 1:1이다. 꽤나 독하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이 있다. 쓰지만 달고, 소주인가 싶으면 맥주이고, 맥주인가 싶으면 소주인 듯. 나쁜 남자 혹은 나쁜 여자 같은 매력이랄까.
막걸리는 안주가 마땅치 않을 때 좋은 술이다. 어르신들이 막걸리를 김치랑 드시는 걸 볼 때마다 무슨 맛으로 드시나 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막걸리가 밥이요, 김치가 반찬인 거다. 술자리가 아닌 밥상이었던 것이다. 싱글 몰트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늦은 밤에 ‘누군가와 긴히 얘기할 사정이 생겼다’ 혹은 ‘배부르다’이다. 싱글 몰트를 마실 수 있는 바는 조도가 낮고 분위기도 차분해 상대방에게 집중하기 좋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싱글 몰트를 마시면 왠지 따뜻한 느낌이 난다. 겨울이 다가오면 연인과 함께 즐겨보길 적극 추천한다. 그리고 배부를 때 싱글 몰트를 마시면 소화가 잘된다. 디제스티프(소화를 위해 식후에 마시는 술)라는 개념에 굉장히 충실하게 싱글 몰트를 마시기도 한다.
강선옥 푸드칼럼니스트가 추천하는 괜찮은 술집
여의도, 오케이버거
맥주와 재미있는 버거를 맛볼 수 있는 곳. 어떻게 보면 스스무 요나구니 셰프의 드림 스토어라고나 할까. 버거집이지만 애주가이자 미식가인 스스무 셰프가 선별한 다양한 맥주와 싱글 몰트 그리고 칵테일이 갖춰진 바(bar)가 마련되어 있다. 기본적인 BLT 버거부터 살사를 곁들인 소프트셸크래브(soft-shell crab) 버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애주가들을 위한 작은 접시의 안주 메뉴들. 독보적인 맛으로 어필하는 버펄로윙이나 제대로 만든 맥앤치즈, 3천원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에다마메나 돼지껍질팝콘은 맥주와 최상의 궁합을 이룬다. 특히 풍부한 아로마와 청량감, 화사함을 동시에 갖춘 IPA 드래프트에 바삭함과 강렬한 시즈닝 맛의 버펄로윙은 개성 강한 음식과 술의 조합이 아주 잘 어울렸다.
메인 메뉴가 버거이지만 맛있는 안주가 많다. 따라서 사람 수보다 적게 햄버거를 주문하고 다양한 작은 접시의 안주들을 맛보길 권한다. 또한 종류가 다양한 술이 구비되어 있지만 여기선 맥주가 정답이다.
강변역, 고스란
나이가 들면서 선호하는 술집의 기준이란 것이 확연히 바뀌었음을 느낀다. 분위기보다는 음식 맛에 초점을 둔다는 거다. 내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친절하고 따뜻한 음식에 한잔하고 싶을 때,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맛보면서 제철 음식 또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고스란’을 찾는다. 고스란은 메뉴판이 없는 식당이다. 점심에는 육개장이나 라사냐, 카레 같은 단품을 한정 수량으로 판매하고 저녁에는 3만원, 5만원, 7만원 코스 메뉴로만 예약 주문을 받는다. 메뉴는 그날그날 셰프가 장을 보며 정하는데 한식, 양식, 일식, 중식 어느 하나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섞어 낸다. 이곳 메뉴는 음식 스타일을 중시하기보다 전채부터 가벼운 메인, 묵직한 고기 요리, 마무리 식사까지 재료와 맛을 골고루 신경 써서 완성된다. 메뉴가 항상 바뀌기 때문에 콕 집어서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메뉴가 다국적으로 구성되는 만큼 개인적으로 원하는 주종을 음식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또한 철 따라서 봄엔 도다리쑥국, 여름엔 민어탕, 가을엔 새우장, 겨울엔 굴 요리를 주문하는 식으로 원하는 메뉴를 요청할 수 있다.
또 제철 음식이 아니라 자신이 특별히 먹고 싶은 메뉴만으로 코스를 요청할 수 있다. 물론 가격은 미리 협의해야 한다.
일산, 백석양조장
집에서 가깝다는 것이 최고 장점이지만, 손맛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만드는 안주를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빠트릴 수 없다. 일산도 나름 도심이지만,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의 안주와 지역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막걸리집을 표방하지만 맥주, 소주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
그때그때 구워 촉촉하고 노릇하게 부친 육전과 고소한 가평잣막걸리, 마른대구맑은탕의 뜨거운 시원함과 차가운 소주의 달콤쌉싸름함, 바삭한 오징어튀김과 맥주의 조화를 꼭 맛보길 권한다. 이곳의 특징은 1만1천원에 두 가지 안주를 내주는 세트 안주가 있다는 것. 육전, 두부김치, 해물파전, 제육볶음 등 여덟 가지쯤 되는 안주 가운데 두 가지를 고르면 두 접시에 담아 내주는데 한 접시에 1만1천원을 받아도 될 정도로 양이 푸짐하다. 세트 메뉴가 아닌 안주도 준비되어 있다. 모든 음식이 맛있고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함께 가서 다양한 메뉴를 맛보길.
“만 18세,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줬던 위스키 한 병. 생애 처음으로 마신 위스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 지금껏 위스키의 매력에 푹 잠겨 있다. 위스키뿐 아니라 와인, 럼, 샴페인, 칵테일 등 식사를 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면 술이 빠지지 않으므로 거의 매일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에 곁들이니 입맛이 돋고, 좋은 사람과 함께여서 즐거우니 술병이 난다는 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마이크 솔드너(Mike Soldner) B28 대표
곡물, 이스트, 물. 재료는 아주 단순하지만 곡물 품종, 피트의 종류, 증류기의 모양, 숙성에 사용된 오크 통의 종류, 심지어 숙성 창고의 위치와 자연환경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면서 독창성과 개성이 담긴 싱글 몰트위스키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위스키는 마실수록 색다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맛의 위스키를 찾는 일이 업이 된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맛의 싱글 캐스크를 찾아 B28에서 손님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것이 재미있다. 나는 술을 마시면 더욱 즐거워지는 사람이다. 술은 내게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고마운 친구인 것이다.
참고로 한 양조장에서 나온 것이 싱글 몰트위스키라면 그중에서도 한 통에서 숙성된 것만 병에 담은 것이 싱글 캐스크다. 최근에 기가 막힌 싱글 캐스트를 찾아냈다. 1977년 제조된 글렌카담 1977(Glencadam 1977)로, 알코올 도수가 52.4%나 된다. 오래된 가죽 냄새와 견과류, 그리고 말린 오렌지 껍질의 향까지, 뚜껑을 열었을 때 복잡 미묘한 향이 진동한다. 포트와인을 숙성시켰던 오크 통에서 숙성해 달콤하면서 오렌지 맛과 스모키함이 감돈다. 마지막으로 헤이즐넛 향과 스파이시한 맛의 여운이 오래 머문다. 개인적으로 도수가 강하고 묵직한 싱글 캐스크를 좋아해 얼음을 넣지 않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을 권유하지만, 처음 맛보는 사람에게는 본연의 맛을 알 수 있도록 스트레이트로 주다가 강하면 얼음을 넣어 맛을 조절해준다.
무엇보다 싱글 몰트위스키는 여유 있고 편안하게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B28은 오직 재즈 음악만을 틀고, 22~25℃의 온도를 유지하며, 푹 감싸주는 안락한 가죽 소파를 구비해두었다. 매일 술을 마셔도 그다음 날 컨디션에 영향은 전혀 주지 않는다. 술을 즐기면서 마시는 것도 있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다. 곡주로 시작한 날은 ‘Grain day’로 정해 맥주, 위스키처럼 곡류로 빚은 술만 마신다. 또 와인으로 시작한 날은 ‘Grape day’로 정해 와인, 샴페인, 꼬냑과 같이 포도로 빚은 술만 마신다. 맥주를 연거푸 마시다가 와인을 마시고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경험이 있다면 내 규칙이 꽤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술을 마실 때 술 양의 배로 물을 마셔야 다음날 숙취가 없다.
B28 대표 마이크가 추천하는 괜찮은 술집
한남동, 스피크이지 몰타르(speakeasy mortar)
간판 하나 없는 집이다. 심지어 전화번호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게 이름이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 몰래 위스키를 팔았던 바들의 별칭 ‘스피크이지’다. 올해 초 몰트위스키 전문 바로 문을 열었다. 안주는 훈제 베이컨과 연어 단 두 종류이지만, 술은 셀 수 없이 많다.
신사동, 페타테
최근 스피크이지, 즉 숨는 게 국내 위스키 바의 트렌드인 것과 반대로 페타테는 꽤 오픈된 술집이다. 일단 위치 자체가 지하가 아닌 건물 2층이며 테라스석도 마련되어 있다. 싱글 몰트위스키는 종류가 많지 않아도 있을 건 다 있는 수준이다.
애주가들이 펼치는 자기만의 수작록(酬酌錄; 술을 즐기는 방법에 관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