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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그릇 속에 담긴 느림의 미학

유기

On August 12, 2014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거푸집에 붓거나 불에 달궈 수없이 두들겨 만든 유기는 단순히 그릇이라기보다 예술품에 가깝다. 천천히 새기며 살라고 회유하듯 은은한 광택을 발하는 그 자태에 세상 근심을 잠시 내려 둔다.

생명의 그릇, 유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놋을 우리나라 특유의 담금질 기법으로 만든 그릇 또는 생활용품, 악기 등 은은한 광택을 내는 금속 제품을 ‘유기’라 한다. 예로부터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대를 물려가며 쓰던 유기그릇은, 은은한 광택이 품위 있고 고급스러우며, 견고하고 탁월한 보온 보냉 효과를 내는 데다 음식에 조금이라도 독성이 있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으로 ‘생명의 그릇’으로도 불렸다.

우리나라 전통 유기 제작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불에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 유기, 놋쇠를 불에 달궈 망치질을 되풀이해 형태를 잡아가는 방짜 유기, 주물 기법과 방짜 기법을 결합한 반방짜 유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방짜 유기는 먼저 78%의 구리와 22%의 주석을 1,200℃ 이상의 센 불에 녹인 뒤 망치질로 얇게 펴서 일정하게 잘라 여러 장을 겹쳐 우묵한 틀을 만든다. 그다음 당기고 쳐서 늘리고 형태를 만드는 등 무려 아홉 단계 이상에 걸친 전통 수공 비법을 통해 탄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고 변색이 잘 되지 않고 쓸수록 윤기가 난다. 또한 유기를 만드는 장인의 솜씨가 그대로 묻어나고 성형할 때 두드린 울퉁불퉁한 메 자국은 수공품만의 자연스럽고 은은한 멋을 자아낸다.

제기, 반상기, 악기 등 폭넓은 쓰임새

조선 시대에 놋쇠로 만든 유기는 생활용구로 폭넓게 쓰였다. 식기를 비롯해 향로, 소반, 대야, 악기 등 다양한 제품이 놋쇠로 만들어졌다. 특히 임금님 수라상에 사용될 만큼 무독, 무취, 무공해 금속으로 음식을 담는 최상의 식기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반상기’는 예법과 범절을 갖춘 사대부의 식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기로 된 반상기를 정성스럽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아녀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재조명받는 현대의 유기

유기는 1960년대에 들어와 푸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무겁고 변색이 심해 관리도 힘들다는 이유였다.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같은 화학제품에 밀려 생산과 유통이 거의 중단되고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 유기가 농약 성분을 감지하고 식중독균을 없애며, 소화를 돕고 혈압을 안정시키는 등 다양한 질병 예방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게 됐다. 채소를 유기에 담으면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는 등 기능 면에서도 뛰어나지만, 신진 작가들에 의해 탄생한 유기의 고급스러운 빛깔과 디자인이 재조명되면서 젊은 층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한정식집뿐 아니라 캐주얼한 비빔밥이나 냉면 전문점, 심지어 팥빙수를 판매하는 디저트 숍에서도 유기를 만날 수 있다. 전통 기술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접목한 다양한 유기 제품은 최근 혼수 예단으로도 애용된다.

  • 유기 손질법
    유기는 쓸수록 윤기와 빛깔이 나는 그릇이다. 그러나 잘못 관리하면 변색과 얼룩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잔칫날을 앞두고 동네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놋그릇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제가 특별히 없던 시절에는 가루 낸 기와 조각이나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재를 연마재 삼아 짚을 뭉쳐 문지르며 놋그릇을 닦았다. 요즘에는 혼합비의 발달로 예전에 비해 녹이 덜 슬고 관리가 편해졌지만 다른 그릇들보다는 좀 더 섬세하게 관리해야 한다. 식사 후 바로 설거지하고 그것이 힘든 상황이라면 물속에 완전히 잠기도록 둬야 한다. 설거지한 다음에는 마른행주로 물기를 말끔히 제거하고, 얼룩이 졌다면 전용 수세미를 이용해 한쪽 방향으로 일정하게 닦으면 된다.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모양새가 매력적인 김일웅 장인의 유기. 6대째 가업을 이어온 김일웅 장인의 방짜 유기는 오늘날 식문화에 맞춘 디자인이 엿보이면서도 유기의 고급스러운 전통적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판매.

경남무형문화제 제14호인 이용구 장인과 그의 전수자 이경동이 선보이는 놋그릇 브랜드 ‘놋이’. ‘현재에 사랑받는 전통을 만드는 일’을 목표로 기존의 유기 제품에서 볼 수 없던 색다른 디자인을 만날 수 있는데, 끝 부분에 꽃을 형상화한 그릇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놋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1대 김근수 장인에 이어 2대째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안성유기의 맥을 잇고 있는 김수영 장인의 2인 반상기 세트. 밥그릇과 국그릇을 보면 끝이 퍼진 모양이 남성, 오목한 모양이 여성의 그릇이다. KCDF 갤러리 숍에서 전시 및 판매.

위) ‘방짜 유기의 대중화와 실용화’를 실천하고 있는 이형근 장인의 반상기 세트. 문경 방짜 유기촌의 유기장 우두머리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유기장의 아들로서 기술을 전수받은 이형근 장인은 전통 기술로 현대 생활에 적합한 그릇을 만들고자 평생 노력해왔다. 정소영의 식기장에서 판매.

광주요에서 선보이는 명작(名作) 유기. 광주요의 모던한 디자인에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이용구 장인과 이경동 전수자의 유기 제작 노하우에 따라 구리와 주석을 황금 비율인 78:22로 섞고 1,200℃ 이상 고열에서 쇠망치로 두드리며 완성한 최고급 방짜 유기 제품이다. 광주요.

놋이에서 선보이는 유기 제품들. 유기가 한식을 넘어 세계의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임을 보여주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클래식, 모던, 베이식, 내추럴, 프티, 다이닝 등의 다양한 카테고리에 반상기뿐 아니라 샐러드 담기에 좋은 큼직한 접시, 치즈나 쿠키를 담는 접시, 와인 잔과 쿨러 등 기존의 유기 제품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놋이.

이윤정 작가의 유기함으로 뚜껑 손잡이를 비취로 제작해 유기 고유의 품격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더해졌다. 거실이나 주방의 탁자에 올려 장식하거나 사탕, 견과류를 담는 등 실용적인 기능까지 갖춰 친근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함이다. KCDF 갤러리 숍에서 전시 및 판매.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거푸집에 붓거나 불에 달궈 수없이 두들겨 만든 유기는 단순히 그릇이라기보다 예술품에 가깝다. 천천히 새기며 살라고 회유하듯 은은한 광택을 발하는 그 자태에 세상 근심을 잠시 내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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