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FASHION MORE+

The Critique

새로운 폐허를 발견하다

지금 광주와 부산에는 한국형 폐허가 존재한다.

UpdatedOn November 29, 2018

3 / 10
/upload/arena/article/201811/thumb/40512-342626-sample.jpg

 


최근 광주와 부산에 다녀왔다. ‘광주비엔날레’와 ‘부산국제영화제’ 때문이다.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위성 전시의 일환으로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새로 선보였다. 필리핀, 핀란드, 프랑스의 문화기관이 광주에 각자 거점을 마련해 독립적인 전시를 여는 프로젝트였는데 내 목표는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의 전시를 보는 것이었다. 팔레 드 도쿄는 혁신적인 전시 프로그램을 짜면서 소장품을 전혀 갖지 않는 독특한 성격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 명성에 홀려 광주로 향했는데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 프로젝트의 장으로 마련된 광주시민회관이었다.

1971년 완공된 광주시민회관은 광주의 근현대사가 축적된 곳이다. 광주 지역 건축가인 임병배가 설계해 당시 한국건축상 본상을 수상할 만큼 평가가 좋았다. 시민 결혼식을 여는 등 문화 공간을 표방했지만 주된 쓰임새는 관이 주도하는 행사를 위한 실내 집회 시설이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군이 머물며, 이 건물에 역사성이 침투했다. 관은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하려 했지만 2010년 보존 및 리모델링이 결정되었고 광주시민이 심사에 직접 참여하는 공모 절차를 거쳐 스튜디오 케이웍스의 김광수 소장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김광수 소장은 올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대상을 받은 ‘부천아트벙커B39’를 맡은 건축가다. 부천시 삼정동에서 늘 논란이 되었던 폐쓰레기 소각장을 성공적으로 재생해 상을 탔는데, 그의 훌륭한 과거 작품인 광주시민회관은 참으로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광주시민회관은 시민 문화 공간으로 쓸 목적으로 국·시비 39억원을 들여 2015년 재개관했다. 그러나 이 건축물은 건축가가 의도한 프로그램대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공연이나 행사가 없더라도 대중에게 완전히 개방되어야 했지만 관리 부실, 행정적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공간 일부가 광주시의 사무실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이번 전시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대중에게 전격 ‘개방’됐지만 후속 행사가 없으므로 이제 다시 전처럼 잊힌 장소로 복귀할 예정이다. 10년의 사용, 그리고 전투, 이후 폐허가 된 건물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 재생한 공간인 광주시민회관은 결국 또다시 폐허가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공간 재생이 인기를 끌고 도시적, 국가적 과제로 떠오르는 시대에 광주시민회관에서 목격한 것은 재생 이후의 디스토피아, 이미 와버린 미래였다. 이중의 폐허화를 겪은 장소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방문객을 압도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서늘하고도 외롭고, 측연하면서도 의연한, 옛것과 새것이 균형을 잡은 상태에서 생명력을 빼앗긴 하얀 콘크리트가 복잡 미묘한 기운을 내뿜어 전시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반면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오랜만에 찾은 부산은 아주 깔끔했다. 특히 해운대와 마린시티, 센텀시티로 연결되는 도시의 높은 풍광은 현대적이고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그 안정감도 잠시, 태풍 콩레이가 들이닥치면서 광풍과 폭우가 불자 가장 화려했던 고층 건물군은 위험하기로도 부산 제1 순위가 되었다. 9층에 자리 잡은 내 호텔 객실 창문도 스토커가 미친 듯이 방문을 두드리는 듯 밤새 울부짖었다. 태풍이 한국을 빠져나가고 평온해졌을 때 거리에 나와 보니 온갖 물건과 사인물이 길거리에 찰싹 붙어 널브러져 있었다. 자주 보는 태풍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뉴스를 들어보니 부산에는 의외의 피해 공간이 있었다. 해안가의 마천루 1층이었다. 태풍이 올 때마다 마천루의 1층 공간은 쑥대밭이 된단다. 성난 파도가 넘쳐 1층을 갈아엎고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바닷가 조망권을 확보하려 무리하게 해안가에 부지를 붙인 탓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장벽을 높이는 건데 정작 1층 상인들이 조망권을 지키려고 반대한단다. 도시의 모든 부분은 멀쩡한데 정작 부산의 번영을 상징하는 마천루, 부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감탄하던 고층 건물군의 밑바닥 1층에는 매년 폐허의 악몽이 찾아왔던 것이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가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복구해 사람을 맞이하는 현상의 반복이란 얼마나 우습고 아이러니한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는 폐허는 낭만적이거나 음습했다. 20세기 초에 흑백으로 찍어놓은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으로 대표되는 황폐한 과거의 영광은 전자다. 영국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풍경화 ‘올드 새럼(Old Sarum)’은 그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옛 유적이 화려한 시간을 몇 번이고 보낸 후 풍경처럼 흩날리는 것이다.

10년 전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을 때 마주했던 카르타고의 유적지 광경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 햇빛이 강하게 바다 표면에 튀며 점점 기울어져 가는데 돌무더기만 가득한 그 땅엔 오직 옛 제국의 이야기만 맴돌고 있었다. 음습한 폐허는 세계 곳곳에 많다. 체르노빌 사건이 터진 지 30년이 지났지만 사고가 일어난 당일의 끔찍한 기억을 온몸으로 간직한 건물 사진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소련 해체 이후 CIS 지역에는 방치된 옛 사회주의 건물이 널려 있다. 세계 언론에서 기이한 건물을 꼽을 때마다 늘 거론되는 평양의 류경호텔을 보라. 시간이 멈춘 풍광이 뿜어내는 서늘함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이런 폐허의 모습은 자주 숭고미와 연결되어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내가 겪은 광주와 부산의 폐허는 위의 어느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폐허를 재생한 후 다시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이 분출하는 복잡 미묘한 힘은 과연 낭만적인가? 사람으로 늘 시끌벅적한 부산의 최대 번화가가 태풍만 불었다 하면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시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은 사람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두려운 폐허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시간이라는 굴레가 만든 자연스러운 폐허의 법칙은 두 곳에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이런 폐허를 만들었다. 무책임한 관공서와 탐욕스러운 건물주. 그리고 이 현상을 계속 지켜보기만 했던 무관심한 시민까지 모두 다. 광주와 부산에서 새롭게 찾아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폐허 공간에는 숭고미가 자리 잡을 심리적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한숨과 두통을 위한 공간만 끝없이 생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형 폐허일까? ‘폐허선진국’으로 새로운 폐허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에 앞으로 어떤 신생 폐허가 나타날지, 그 풍부한 가능성을 생각할 때면 나는 두렵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이경진
WORDS 전종현(아트&컬처 저널리스트)
ILLUSTRATOR HeyHoney

2018년 11월호

MOST POPULAR

  • 1
    지창욱, 우아함과 역동적인 모습이 담긴 <아레나 옴므 플러스> 디지털 커버 공개
  • 2
    연기 없는 저녁
  • 3
    송중기가 짊어진 것
  • 4
    등산 후 가기 좋은 몸보신 맛집 4
  • 5
    가자! 촌캉스

RELATED STORIES

  • FASHION

    CLEAN and CLEAR!

    환절기 피부 관리의 첫 단계. 더욱 꼼꼼한 안티폴루션을 위한 클렌징 제품들.

  • FASHION

    GEEK OUT

    괴짜 취향의 선글라스 6.

  • FASHION

    시계 커스텀의 쟁점

    스위스 판례로 보는 커스텀 시계의 적법성.

  • FASHION

    5월의 마음

    소중한 그분들을 위해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준비한 값지고 품위 있는 선물 리스트.

  • FASHION

    Classic Finishing

    단정하고 사뿐한 클래식 슈즈의 멋.

MORE FROM ARENA

  • FASHION

    SMOOTH AND MOVE SLOWLY

    수민의 시간은 무한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한국을 넘어서 유럽, 전 세계를 무대로 어디 한 군데 머무를 틈 없이, 하지만 조급하지 않은 여유롭고 굳건한 마음으로. 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매 시즌 고귀한 하우스 브랜드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고 있다. 치열했던 시간을 지나 빛나는 현재를 보내는 그의 품격 있고 다채로운 포트폴리오, 그리고 클래식한 디자인, 대담한 다이얼 컬러의 오메가 아쿠아 테라 쉐이드 컬렉션과 씨마스터 아쿠아 테라 월드타이머 워치는 어딘가 통하는 면이 있다. 오메가 워치를 착용한 수민은 몽환적인 색채의 스펙트럼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유려한 잔상을 남겼고, 고상한 시간들을 한 폭의 그림처럼 기록했다.

  • LIFE

    스타트업 - BIOTIPAC

    환경, 빈곤, 질병 등 인류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기술로 해결한다. 채팅 앱으로 아프리카의 허기를 채우려는 농업테크, 전기차 시대에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모빌리티 기업, 착한 박테리아로 식품 유통기한을 늘리는 푸드테크, 저소득층 아이들의 발달장애 치료를 위한 에듀테크, 중력을 사용한 신개념 청정 에너지까지. 인류애를 품은 스타트업을 소개한다.

  • FASHION

    여름 필수품, 데오도란트

    퀴퀴한 여름에서 구해줄 데오도란트 8.

  • INTERVIEW

    NCT 정우, “제게 가치 있는 삶은 ‘후회 없는 삶’이에요”

    NCT 정우, 까르띠에와 함께 장식한 첫 단독 커버 미리보기

  • INTERVIEW

    라인 앞으로

    다시 <리그 오브 레전드>의 라인 앞으로 돌아왔다. 휴가를 마치고 팀에 복귀하는 SK T1의 칸나, 커즈, 테디를 만났다. 그들이 말하는 프로 선수의 고뇌와 즐거움이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