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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류승완

자고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늘어놓는 감독을 만나본 적이 없다. 무던한 성정을 지닌 감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칼날처럼 날렵한 감독 류승완에게 `최고`와 `최악`을 물었다. <br><br>[2008월 8월호]

UpdatedOn July 22, 2008

Photography 임한수 Editor 이지영 hair 김원숙(윤휘 Hair Do) make-up 이현숙 stylist 고민희

인생에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은 그 취향 자체도 무난한 편이다. 삶의 극단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무던한 촉각을 지닌다. 반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라온 사람은 누구보다 명확한 자신만의 식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봐야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듯이, 적지 않은 사연을 겪는 동안 세상 만물에 대해 자신만의 호오가 분명해진 것이다. 우리는 주로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좋고 싫음이 명확한 사람’이라고 평한다. 혹은 둥글둥글한 성정을 지닌 반대편 저 쪽에 이 까칠한 족속을 세워두거나.
백 명의 배우보다 감독 한 명의 기가 더 세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끊임없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워낙에 휘둘리지 않아야 마땅한 자리에 앉아 있기에 보통 기로는 그 수도 없는 스태프를 통솔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좋고 싫음, 계속 해야 하는 것과 멈춰야 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이가 감독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결코 무던해서도,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서도 안 된다. 최대한 아주 명확한 선택을 끊임없이 계속 내려줘야 하는 것, 그게 감독의 위치다.
류승완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은 접어두고서라도, 이 사람이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러니 행여 그가 ‘무릎팍 도사’에 나와 코미디언보다 웃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게 단지 서툰 유희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도 좋다. 류승완에게 ‘최고’와 ‘최악’ 두 가지 버전의 질문을 던진 것은, 그가 분명 무던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였다. 그가 누군가. 말 잘하기로 소문난 감독이다. 그가 누군가. 대학 졸업장 없이도 <아레나> 인터뷰 자리에까지 오게 된 셀러브리티다. 그러니 그에게 중간 정도의 대답을 끌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는 절대로 모호한 사람이 아닐 것이기에 극단의 말들을 주워담고 싶었던 것이다.

혼자만 진지한 배우 임원희와 또 한 번 함께했다.
이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의 첫 시작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작년에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는데 그게 여러 여건상 1년을 미루게 됐던 거다. 조수 시절에는 영화가 엎어지고 미뤄지고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내가 데뷔한 후에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많이 당황했다. 시간적 공백이 생기면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 결정이 나고 얼마 안 돼서 <다찌마와 리>를 한번 제대로 써봤다. 연휴 동안 수월하게 쓴 대본을 가지고 사무실에 나왔더니 다들 낄낄대면서 읽더라. 해볼 만하겠다 싶어서 임원희에게 들어간다고 연락을 했다.

그때 임원희의 반응은 어땠나? 다른 배우라면 몰라도 임원희라면 분명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거다. ‘내가 평생 다찌마와 리로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웃음)
맞다. 임원희는 진지했다.(웃음) 그 외의 배우들은 뭐, 다들 거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모두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고.(웃음) 임원희를 또다시 캐스팅한 이유는 적어도 원작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예전에 <엘 마리츠(Marichi)>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이 영화를 할리우드 주류 영화인 <데스페라도>로 만들면서 감독이 주연을 바꾼 거다. 원래 주연은 자신의 친구였는데 <데스페라도>는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데리고 찍었다. 그 캐스팅이 난 항상 불만이었다. 그래서 2000년도에 인터넷에 공개했던 <다찌마와 리> 이후로 또 한 번 가는 거니까 당연히 임원희를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의리다. 그건 배우에 대한 의리도 될 수 있지만, 원작 영화의 팬들에 대한 의리도 될 수 있는 거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배우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열연이 필요한 영화를 찍는 사람이지만, 열연하는 배우보다 설렁설렁 연기하는 배우가 좋다. 연기의 톤이 리 마빈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가 좋다. 연기를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그 애매한 사이에 있는 배우에 끌리는 거다. 그렇다고 스티븐 시걸과 척 모리슨까지는 아니고.(웃음) 그들은 최선을 다해도 표정이 몇 가지 안 되는 것 같지만 리 마빈은 귀찮아서 몇 가지 안 나오는 그런 느낌이 있다. 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류승범이 좋다. 연기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그런 느낌이 좋은 거다. 물론 <주먹이 운다>에서 어떤 표정들은 나도 되게 놀랍긴 한데, 그렇다 할지라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의 류승범 연기가 좋다. 왜 옛날 웨스턴 영화들에서 주름진 아저씨들이 별다른 연기 안 하는 것 있지 않나. 햇볕은 내리쬐고 빨리 컷 했으면 좋겠다는 그 얼굴들 있지 않나. 그런 배우들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토해내는 사람에게는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 사람은 사실 현재가 다다. 다음이 궁금해 지지 않는 거다.
사람 관계가 그런 것 같다. 열심히 하는 건 물론 굉장히 좋은 건데 매력적이지 않다. 내 손에 잡히는 순간 매력이라는 게 희한하게 사라지는 거다. 잡힐 듯 말 듯 그런 게 있어야 하는 건데 참. 이 세상 모든 부부의 비애가 그런 게 아니겠나.

‘잡힐 듯 말 듯’ 그런 것 잘하나? 그게 또 타고난 재주가 있어야 하는 분야인데.(웃음)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밀고 당기고를 잘 못한다. 기다리질 못하는 거다. 현장에서도 된다 안 된다를 빨리 판단해서 될 것 같으면 밀어붙이고, 안 된다 싶으면 바로 다른 대안을 찾는 편이다. 아니면 포기를 하거나.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큰 단점 중에 하난데, 내가 포기를 잘한다.
내 인생 철학 중 하나가 ‘포기를 잘하는 사람이 되자’다.(웃음) 안 되는 것 가지고 계속 붙잡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나. 그것 말고도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또 굉장히 무서워하는 말이 ‘안 되면 되게 하라’다. 우리 고3 때 급훈이었다.

아니,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나.(웃음)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류승완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부지런한 것 같다. 빈틈이 없는 필모그래피만 봐도 그렇다.
부지런한 건 아니고 긴장하며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할 시기를 일찍 접했고, 데뷔하기 전까지 극심한 경제고에 시달리면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긴장 상태에서 살았다. 내가 여기서 정체하는 순간에 한없이 도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끊임없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마구 달리지 않으면 멈추는 순간 얼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백수로 지낸 시절이 아예 없었던 건가.
내 인생 중에 아무것도 안 하고 논 시절은 며칠이 안 되는 것 같다. 돈 버는 일을 못하고 있을 때도, 계속해서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든지,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든지 했다. 그게 내가 약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하면서 무서운 지점인데 그렇다 보니 주변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물론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면 만나줄 친구는 있는데, 친구는 단 한 명이다. 진짜 앞만 보고 달린 것 같다. 누가 농담처럼 “너 친구 없지?” 그러면 약간 움찔한다. “아 저 새끼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여성지 같은 새끼 같으니라고”(웃음) 막 이런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사람을 만나면 일에 대한 얘기를 가장 많이 한다. 물론 20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술 마시며 폼 잡고 앉아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런 고민하는 애들 보면 이해가 안 갔다. 그런 자리에 가서 앉아 있을 때면 속으로 ‘아 씨발 시간 아까워’ 하면서 슬쩍 핑계 대고 나오곤 했다.

당신이 꼽는 최고의 노래를 알려달라.
박인수의 ‘봄비’. 난 그와 거의 똑같이 부른다. 인정받은 적도 있다. 김성수 감독이나 이현승 감독이나 노래방 가면 “야! 류승완 봄비 쏴!” 그런다. 내가 들어도 진짜 비슷해.(웃음) 내가 약간 듣는 귀가 보수적이다. 왜 예전에 송골매의 배철수 아저씨가 부른 ‘빗물’, 한대수 아저씨의 ‘행복의 나라로’ 패티김 여사의 ‘이별’ 그런 곡 진짜 명곡 아닌가. 비틀스, 퀸, 엘비스 프레슬리 진짜 좋아한다. 아, 정말 최고의 가수다. 나는 요즘 소몰이 하는 듯한 ‘우워워워’ 하는 노래들은 별로다. 나도 한두 달 합숙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고.(웃음) 남진 버전의 ‘하숙생’ 들어봤나? 아, 진짜 녹는다 녹아.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들어봤나? 죽인다. 내가 예전에 비디오 가게에서 일할 때 임희숙 아줌마가 고객이었는데, 그때 진짜 설레었다. 그런데 하필 연체 고객이어서 나중엔 진짜 싫어했지.(웃음)

최고로 욕심 부려본 영화 기억나나.
<다찌마와 리> 이전까지는 모든 영화에 욕심이 많았다. 내 눈에도 그게 보인다. 그 욕심이 영화에 보이는 거다. <피도 눈물도 없이>나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는 과욕의 영화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만 해도 비교적 어린 30대 초반이었으니까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나이니까 만들 수 있었지 싶다.
욕심을 비우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이를 먹으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무욕의 경지인가.
어느 순간 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속 경쟁 그런 게 싫어서 영화를 택했었는데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최고로 인정받고 싶어진 거다. 아니 세상에 무슨 공산품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감정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매체를 다루면서 최고를 지향할 수가 있겠나. 어렸을 때는 내 꿈들이 물 밖에 있었는데 이제는 이 물 안에서 경쟁하게 됐다.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최동훈, 나홍진과 피 터지게 경쟁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든 생각이 ‘트랙을 바꾸자’였다. 나는 다른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나. 류승완 최고의 봄날은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은 과거를 항상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좋았던 시절이 언제였느냐’는 설문에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과거 어느 때’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그런 게 맞물리면서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이러는 거다. 그런데 솔직히 생각해보면 경제 상황이나 모든 것들이 지금보다 열악했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화장실에서 신문지 혹은 ‘일력’을 휴지 대신 사용했고, 통금이 있었고 그랬다. 그런데 그 시기들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 힘든 시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안도감이랄까 그런 심리로 과거를 미화하는 것 같다. 물론 나에게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순간들이 있다. 지하철 보수 공사를 하다가 시멘트 독이 올랐을 때나, 돈이 없어서 쓰레기장에서 옷 찾아내서 주워 입던 때.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순간, 그래서 혼자 남은 것 같던 순간, 친했던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면서 ‘아, 얘랑 두 번 다시 못 보겠구나’ 싶었던 순간이야 있다. 그런데 그게 또 흘러가고 나면 그게 그렇게 최악이었나 싶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 거지. 그러니 굳이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 지금 이 순간, 현재가 아닐까 싶다.

혹시 스트레스 잘 받는 성격인가. 요즘 최고의 스트레스는 무엇인가.
나는 되게 스트레스 잘 받는 타입이다. 소심하고 오래 가슴에 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한다. 진짜 나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복수할 기회를 놓쳤다 싶으면 끊임없이 저주한다. 완전 저주한다. 저주.(웃음) 감독으로서 무언가 하려고 하는 것들이 머릿속에 너무나 명확히 서 있는데,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을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의외로 내가 돌발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 의도하지 않은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시민으로선 뭔가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을 때도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줘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꼴을 보면 참지를 못한다. 예를 들어 운전할 때 깜박이만 한 번 켜줘도 될 것을 그냥 휙 끼어드는 경우, 길거리 지나갈 때 부딪혀놓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다거나, 우리가 먼저 왔는데 저쪽 테이블에 음식이 먼저 나온다거나 그런 사소한 거에 민감하다.(웃음) 그리고 너무 말 막하는 것, 잘난 척하는 사람, MB 등등 모조리 다 스트레스다. 며칠 전에 국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 시식하는 것 보고 정말 기가 막혔다. 내가 볼 때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알면서 그런다면 그건 진짜 기백 있는 분들이고.

MB를 왜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웃음)
나는 무언가에 꽂혀가지고 맹신하는 걸 싫어한다. 그 열정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는 뭐든 대충 좀 살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사는 게 싫다.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이 강요하니까. 그냥 대충 살았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얘기다. 열심히 살면 살수록 우리가 윤택해지는 게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이 윤택해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윤택해지기 위해 열심히 살라고 조장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왜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걸 해야 인생이 즐거운 건데 말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감독은 판단하는 직업이니, 혹자는 반장 역할 같다고 말하더라.
통솔력, 지도력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리더십은 양심과 책임감이다. 가끔 양심 없는 사람이 있다. 짜증 난다, 그런 사람들 보면.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나 스스로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양심에 비추어봤을 때 명확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과 자본에 대한 책임감. 그게 되게 중요하다. 한국 영화 제작비가 40억인데 그 돈은 한 개인이 일생 동안 구경도 못하고 죽을 수 있는 돈이다. 나도 그 돈을 두 눈으로 확인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돈이 굴러가고 있는 거다. 영화는 의식주가 아니기 때문에, 살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영화는 철저하게 영화를 즐기려는 사람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건데 그러니 그 돈으로 뭘 만드는 거면 책임감을 갖는 게 일종의 의무다. 나는 영화 만들 때 예산 함부로 쓰는 연출자들 보면 정말 짜증이 난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최악의 콤플렉스가 있나. 콤플렉스라는 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예 없어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희석되거나 한다. 현재 류승완의 위치라면 아마 많은 부수적인 업적들로 인해 애초의 콤플렉스는 거의 사라졌을 것 같다.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잊힌 지는 꽤 됐다. 나한테 대학 교수 제안이 들어오는 순간 없어졌다.(웃음) 굉장히 웃겼던 게 하루 사이에 어떤 대학에서는 학생으로 오라고 제안했고, 다른 대학에서는 교수로 오라고 제안했다.(웃음) 그리고 머리 나쁜 것. 내가 학습 능력이 좀 떨어진다. 키 작은 거. 자꾸 사람들이 호빗이라고 한다. 내가 작은 걸 요즘 알았다.(웃음) ‘류승완은 키가 에러’. 이런 말 보면 깜짝 놀라는 거다. 그런 게 다 콤플렉스지. 아, 그리고 나는 뭘 해도 태가 잘 안 난다. 이상하게 뭘 해도 그렇다, 나는.

스트레스는 뭘로 푸나. 뭘 해도 태가 안 나면 뭘 해도 억울한 부분이 있을 텐데.(웃음)
욕을 되게 많이 한다.(웃음) 내가 언어가 참 깔끔하질 못하다. 지금 하는 말투는 굉장히 정화된 수준이다. 심지어 나는 싸우기도 많이 한다. 요즘에야 어쨌건 가족이 있어서 막 싸우고 그러진 못하니까 어떤 상황에 열받으면 대신 시나리오에 쓴다든가 한다.(웃음)

감독으로서 최고의 보람을 느껴본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 영화를 의도한 대로 따라가줄 때가 아닐까. 아, 그리고 <주먹이 운다>로 칸 영화제 갔을 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데 사람들이 너무 잘 봤다고 해줬을 때. 그리고 왜 해외 영화제에서는 기립 박수 치는 게 예절이지 않나. <짝패>를 베니스에서 상영하는데 애들한테 쫙 둘러싸이는 장면에서 박수가 터지는 거다. 다다미방이 착착착착 열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또 박수가 터졌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옛날 어렸을 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박수가 터지던 때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박수 소리를 들은 영화가 <공작왕>이었다. 그 영화를 할리우드 극장에서 봤는데 원표가 글로리아입을 구해주는 장면에서 박수가 막 터져나왔다. 그리고 뭐 우리 애들 건강하게 잘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서 애들 일부러 흔들면서 ‘아저씨 여기서 자면 안 돼요. 많이 드셨나봐’ 할 때 그저 기분 좋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본 경험이 꽤 있을 것이다. 당신을 무던히도 괴롭힌 최악의 영화를 꼽아달라.
아마 두 번 다시 <아라한 장풍대작전> 같은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면 못할 것 같다. 정말 1백8회를 찍는 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해에 제작비 상위 랭크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본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시작한 영화였고. 그 어마어마한 스태프를 끌고 가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액션이면서도 코미디여야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지금 보면 되게 과잉되어 있다. 계속해서 ‘이거 웃기는 거야’ ‘이거 액션이야’ 그러는 거다. 그때 스태프들과도 진짜 많이 싸우고. 메이킹 보면 내가 막 집어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때 사람 때린다는 소문도 돌았었다.(웃음)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영화판 스태프도 봤다.(웃음) 최악의 현장을 견디게 해주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가 있나.
굉장히 힘든 순간이 되면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하나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사실은 성룡의 영화들 때문에 영화를 진짜 좋아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그 영화를 보면 에너지가 솟는다. 진짜로 DVD를 현장에 들고 다닌다. 힘들 때 액션 장면을 보면 에너지가 막 생기니까.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의 <데이 포 나잇>. <아라한 장풍대작전> 때 정말 많이 돌려봤다. 그 영화를 보면 왜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감독으로 나오는데 악몽을 꾸지 않나. 그게 나중에 플래시백이 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포스터를 가지고 도망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걸 보는데 ‘아, 내가 영화를 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연애 대상이었지’ 생각했다. 사실은 아마도 중간에 이 영화를 보지 못했더라면 내가 정말 피폐해졌을 거다. 그 장면 끝나고 다음날 현장에 나가는 그 모습 때문에 다음날 현장에 나가고, 또 나가고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다.

워낙 어린 나이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마 당신은 죽기 전까지 적어도 백 편은 더 만들 것 같다는, 아직도 남은 게 한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젊어서 반짝 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은 편이다. 그래서 내 목표는 나이 들어서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였으면 하는 거다. 사람들은 오슨 웰즈가 <시민 케인> 이후에 계속 내리막이었다고 하지만 <악의 손길> 같은 걸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내뱉는 한마디가 진짜 같다. 그런데 진짜가 되게 좋은 경우가 드문 거다. 그러니 갈수록 잘 찍기가 힘든 거다. 심지어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고. ‘류승완은 데뷔작 이후 계속 내리막이야’ 이런 말들을 듣기도 하거든.(웃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깃발을 딱 꽂고야 마는 감독이 되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 세르지오 멘데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이런 사람들은 정말 갈수록 잘 찍지 않나. 로버트 알트만의 유작은 정말 어떤 영화보다 가벼운데 그 어떤 영화보다 되게 묵직하게 딱 남겨주고 가지 않았나. 현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그런 경지에 가고 싶다. 꼬부랑 노인네가 됐을 때 정말 괜찮은 영화를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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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임한수
Editor 이지영
hair 김원숙
make-up 이현숙
stylist 고민희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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