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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피어난 금잔디

트로트 외길 인생에 드디어 햇살이 드리웠다. 마침내 금잔디가 활짝 피었다.

On November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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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예능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 애청자라면, 금잔디의 얼굴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끼 많고 흥도 많은 그녀는 특유의 쾌활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트로트 열풍에 힘입어 갑자기 등장한 신예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금잔디는 2000년에 데뷔해 벌써 20년째 트로트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내공 깊은 가수다. '일편단심' '오라버니' 등 히트곡을 남겼고 트로트 팬들 사이에서는 맛깔나게 노래 잘하는 가수로 이미 유명세를 떨쳤다. 실제로 마주한 금잔디는 방송에서처럼 밝은 에너지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트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긴 세월에 강산도 변한다지만 금잔디의 트로트를 향한 마음은 한결같았다. 날 때부터 트로트와 부대끼며 살았고 트로트 때문에 울고 웃는다던 그녀는 오늘도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대세입니다. 기분이 어때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에요. 트로트 전성시대를 상상만 했지,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거든요. 아직도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요. 이 분위기에 기운을 얻어 저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콜센타>를 통해 인지도가 달라진 걸 실감하나요? 네, 실감해요.(웃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로트 가수가 설 수 있는 무대가 한정적이었잖아요. 트로트 팬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느낌이었죠. 그런데 <사랑의 콜센타>에 출연한 이후 저를 알아보는 이들의 연령대가 다양해졌어요. 예능이다 보니 잘 웃고 잘 놀면서 재미있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그 덕분에 친근한 이미지를 얻게 됐죠.


이번에 예능 프로그램 첫 고정 출연도 꿰찼어요. MBC <트로트의 민족>에 응원단장 역할로 합류했어요. 조력자이자 멘토로서 출연자들을 독려하고 동시에 예능감까지 보여줘야 하는 자리라 부담이 돼요. 사실 저는 성격상 예능보다 다큐에 가까운 사람이거든요.(웃음) 그런데 요즘엔 노래 하나로 승부를 보기엔 실력자가 너무 많잖아요. 예능이라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저를 알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방송을 통해 새로 배우는 것도 많아서 요즘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예요.


어떤 것을 새롭게 배웠나요? 트로트 시장이 급변하고 기회가 늘다 보니 오히려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20여 년간 노래를 부르면서 연륜이나 경력이 많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1~2년 새에 벌어진 변화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어요. 휩쓸리지 않고 단단히 두 발을 딛기 위해 한동안 안간힘을 썼죠. 방송에 나가서도 '어떤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지?' 고민이 많았는데, 고민한다고 꼭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았죠. 더 열심히 하려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서 역효과가 났어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다행히 조금씩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 같아요.


금잔디의 팬층은 어떤가요? 제가 가녀린 이미지는 아니잖아요.(웃음) 맏며느릿감에 복스럽고 통통한 게 매력이라 중장년층 팬이 많아요. 제 노래 중에 '오라버니'라는 곡이 있는데 실제로 오라버니 팬이 정말 좋아해주시거든요. <사랑의 콜센타> 이후에는 제 털털한 말투나 성격을 보고 어머니 팬들도 늘어서 요즘에는 부부 동반으로 많이 응원해주세요. 평소에도 팬들과는 정말 가족처럼 지내요. 실제로 저희 부모님보다 더 자주 만나고 전화 통화도 하니까요. 제 노래인 '일편단심'처럼 쭉 함께하는 분들이 있어서 언제나 든든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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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이라도 제 무대를 보면서 미소를 짓는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그게 최고의 원동력이에요

금잔디라는 예명은 어떻게 지었나요? 예전 소속사에서 박수빈이라는 예명을 지어줘 그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그 회사가 망하고 믿었던 매니저한테 배신까지 당하면서 힘든 시간을 겪었어요. 이름에 얽힌 기억을 지우고 새 출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차에, 철학과 교수님에게 예명 리스트를 받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잔디였어요. '너의 노래가 금빛 물결이 일듯이 퍼져나가길 바란다'는 뜻이 담겼는데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예명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나요? 금잔디라는 예명은 지었는데 어떤 루트로 앨범을 내야 할지,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러던 중에 KBS2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나온 거예요. 배우 구혜선 씨가 맡은 배역 이름이 금잔디였잖아요.(웃음) 공교롭게도 드라마 종영할 때쯤 앨범이 발표됐는데 이름 때문에 엄청난 악플에 시달렸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악플도 관심이라고 생각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였어요. 꾸준히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는 포털사이트에 제 이름이 먼저 뜨기도 해요. 사실 신인 시절엔 이름 한 번 거론되기 힘들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꽃보다 남자>와 구혜선 씨 덕을 많이 본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할 뿐이죠.


트로트를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아빠가 운수업을 하셔서 차 안에 늘 트로트를 틀어놓으셨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태교 음악도 트로트였죠. 그 영향 때문인지 옹알이도 트로트 소절로 했대요.(웃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가 최병걸 선배님의 '난 정말 몰랐었네'(1978)의 가사를 중얼거렸나봐요. 5살쯤엔 허리춤에 바구니를 차고 동네에 노래를 부르러 돌아다니면서 용돈을 벌었고, 초등학생 때는 강원 KBS 동요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어요. 중학생 시절부터는 시장에 '노래자랑' 팻말이 붙은 곳은 어디든 찾아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1등을 해서 얻은 가전제품, 살림살이도 엄청났죠. 돌이켜보면 저는 늘 트로트와 함께 했죠.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엄마는 제가 성악을 배워 선생님이 되길 바랐어요.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부업을 하며 고가의 레슨비까지 마련해주셨으니까요. 근데 도저히 흥미가 안 생겨서 엄마 몰래 수업을 빠졌어요. 한 1년쯤 지나서야 들켰는데 그동안 안 쓰고 모아둔 레슨비를 돌려드리면서 트로트를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제안을 하더라고요. 성악 콩쿠르와 청소년 가요제를 동시에 준비해 더 높은 성적을 받는 쪽을 택하자고요. 결과는 뻔했죠.(웃음) 콩쿠르는 꼴찌였고 가요제에서는 대상을 탔어요. 엄마가 그제야 저를 인정해주셨어요. 트로트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힌 것도 그때부터였죠.


우여곡절 끝에 꿈같은 데뷔를 이뤘네요. 2000년 1집 앨범 <영종도 갈매기>를 발표했어요. 그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넌 무슨 어린애가 촌스럽게 트로트를 하니?" 하고 타박하던 시절이었는데 꿋꿋하게 트로트 외길을 걸어서 결국 어린 나이에 앨범까지 냈으니 성공한 기분이었죠.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이 체감되더라고요. 1집은 그냥 기념 앨범에 불과했어요. 전혀 활동을 못 했으니까요. 앨범이 있다고 모두가 가수 타이틀을 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그 시간들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나훈아 선생님의 콘서트를 보는데 문득 가수라면 노래뿐만 아니라 무대 연기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자 나훈아'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 편입했어요. 수업이 끝난 후에는 차 안에서 드레스로 의상을 갈아입고 밤업소를 8군데씩 돌아다니면서 노래했죠.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럼에도 지쳤던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쉼 없이 달리다 보니 결국 체력적으로 한계가 오더라고요. 2015년에 공황장애가 찾아왔어요. 아파트 10층에서 떨어져도 지금보다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라는 무서운 생각까지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 성격상 적당히 하는 게 잘 안 돼요. 저를 만나러 오는 관객 단 1명이라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힘들어도 약속된 무대는 꼭 올랐어요.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 순간 관중의 박수 소리에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더라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단 한 사람이라도 제 무대를 보면서 미소를 짓는다면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그게 최고의 원동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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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롤 모델이 있나요?
김연자, 주현미, 최진희 등 존경하는 선배님은 많지만 제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는 오직 나훈아 선생님이에요. 이번에 '테스형' 무대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봤어요(지난 9월 추석 특집으로 진행된 <2020 나훈아 콘서트>에서 나훈아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딴 노래 '테스형'으로 화제 몰이를 했다). 그동안 트로트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우리네 한을 담은 전통 가요라고 생각했는데 '테스형' 무대처럼 가상의 이야기로도 드라마틱하게 꾸밀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누가 이런 무대를 할 수 있겠어요. 나훈아 선생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그분과 동시대에 살아가고 함께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에요.


곁에서 본 <미스터트롯> 멤버들은 어때요? 장민호, 임영웅, 영탁은 무명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요. 최정상 인기를 누리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인품이 정말 좋아요. 특히 영웅이와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영웅이가 행사장에서 제 팬의 자녀들을 맡아, 화장실 뒤처리까지 도와준 적이 있거든요. 생색 한 번 안 내고 수더분하게요. 평소에 게임 하나도 허투루 안 할 만큼 굉장한 노력파기도 해요. 늘 "열심히 노력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게 참 예뻐 보여요. 영탁이는 끼와 의욕을 방출하지 못해 늘 꽉 찬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 그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면서 이미지가 더 좋게 변했어요. 여유가 넘치니 이제는 눈가 주름까지도 잘생겨 보이더라고요.(웃음) (정)동원이, (이)찬원이는 <미스터트롯>을 통해 처음 알게 됐는데 다들 겸손하고 귀여워요. 이 친구들 칭찬이라면 밤새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장민호와의 열애설도 이슈였어요. '오빠 덕분에 열애설도 터지고 좋아~ 고마워~' 하면서 웃고 넘겨요. 많은 분이 열애설 때문에 즐거워하신다면 얼마든지 도마 위에 올려놓고 즐기셔도 됩니다.(웃음) 가끔 '장민호를 진지하게 남자로 생각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희 둘 다 연애보다는 노래와 일에 욕심이 더 많아요. 믿음직한 동료이자 심성이 정말 착한 오빠일 뿐이에요.


결혼 생각은 없나요? 극한의 비혼주의자였는데 마흔이 넘어가면서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요. 제 생각을 이해해주고 저를 차분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분에 못 이겨서 쉽게 흥분할 때가 있는데, 몇 마디 말로 저를 다독여줄 수 있는 진중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덩치가 좋은 남자면 더 좋겠네요. 생각해보니 연애를 쉰 지 꽤 됐더라고요. 일단 한번 만나보고 그러다가 좋으면 결혼까지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트로트가 어떻게 발전되기를 바라나요? 저는 트로트가 우리의 한과 정서를 담은 전통가요라고 생각해요. 이번 계기로 많은 분들이 트로트의 깊이와 매력을 알아주셔서 기뻐요. 앞으로 더 좋은 음악이 많이 알려지고 사랑 받기를 바라요. 저도 더 노력해야겠죠?


금잔디의 목표가 궁금해요. 내년부터 한국예술원에 트로트과가 신설되는데 겸임교수로 합류하게 됐어요. 음악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던 엄마의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교수보다는 같은 음악인이자 트로트의 길을 걷는 동반자로서 제 경험과 이야기가 조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가수로서 목표는 딱 하나예요. 사람들이 금잔디의 노래를 많이 알아주고 들어주는 거예요. 저는 '스타'가 되기보다는 '가수'로서 머물고 싶어요.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그날까지 꾸준히 좋은 곡들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해주세요.

CREDIT INFO

에디터
박주연
사진
이대원
스타일링
유미상
헤어
정아름(포레스타블랙점)
메이크업
허재인(포레스타블랙점)
2020년 11월호

2020년 11월호

에디터
박주연
사진
이대원
스타일링
유미상
헤어
정아름(포레스타블랙점)
메이크업
허재인(포레스타블랙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