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밴드 유튜브 페이스북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LIFESTYLE

LIFESTYLE

나의 인생 책

작가 백영옥의 인생 책

7명의 작가에게 물었다. “당신의 인생 책은 무엇인가요?”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생애를 두고 다시 읽고 싶은 한 권의 책에 대하여.

On November 11, 2019

/upload/woman/article/201911/thumb/43250-391194-sample.jpg

<혼자 책 읽는 시간>(니나 상코비치)

힘 빼는 기술

작가 백영옥


슬픔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괴로워서, 일 분 일 초가 칼날처럼 느껴지는 때 말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온다. 그것이 이혼의 형태일 때도 있고, 해고나 실연일 때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고나 병으로 잃는 것 같은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것일 때도 있다.

내가 깨달은 건 이처럼 슬픔에 압도당할 때, 없는 힘을 쥐어짜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틀림없이 실수하거나 넘어진다는 것이다. 수영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와 비슷하다. 물속에서 몸부림치는 동안 몸은 점점 더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다.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빼는 것 말이다.

‘힘내는 것’이 아닌 ‘힘 빼는 기술’을 터득하는 건 역설적으로 정말 중요하다. 재난 같은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적인 일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은 적어도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어떤 문장은 실제로 그 어떤 약보다 깊은 위로를 주었다.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내겐 그런 책이었다.

세 아이의 엄마이며 변호사였던 한 여자가 언니를 암으로 잃는다. 그녀는 언니를 잃고 난 후 더 열심히 일하며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독한 투병 끝에 죽어간 언니를 잃은 슬픔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혼란스러웠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떠난 휴가지에서 400쪽이 넘는 소설 <드라큘라>를 읽고 편히 잠든다.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때의 일로,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그녀가 택한 것은 책 읽기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최소한의 일을 제외한 생업을 멈추고, 1년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짤막한 서평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절망과 슬픔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책은 그 기록의 산물인데 이것은 대부분 압도적인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처방전이기도 하다.

“우리 내면의 자아의 생존 역시 기억에 달려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왜 예리한 후각을 가졌겠는가? 나는 상록수의 냄새를 맡으면 기뻐 어쩔 줄 모른다. 왜냐고? 크리스마스트리 발치에서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 때문이다. 팝콘의 냄새가 유혹적인 것도 그걸 먹으면서 본 영화 때문이다. 푸른 올리브 열매의 맛은 배고픔을 느끼게 한다. 올리브를 한두 개 먹으면서 함께 맛보았던 맛있는 음식과 넘쳐흐르던 와인의 기억 때문이다.”

이 책은 내게 ‘현재’를 살 수 없다면 ‘소중했던 기억’을 사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다양한 사례로 입증한다. 나는 아이를 잃고, 그 아이를 좇아 하늘나라에 가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던 한 엄마의 얼굴에서 강렬한 빛을 본 경험을 아직 기억한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던 때, 아이가 처음으로 자신을 ‘엄마’라 불렀을 때의 기억을 소환할 때 생긴 일이었다. 마른 식물에 물을 준 것처럼 바로 그때, 내내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에선 한순간 삶이 충만해 보였다.

기억이 우리를 살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존했겠는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은 그것의 반증이다.

‘카르페 디엠’은 현자의 말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전지대인 소중했던 사람과의 추억’ 안으로 잠시 피신해야 한다. 이것은 ‘극복’ 대신 ‘피신’에 관한 말이며, 힘내기 대신 힘 빼기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것이 ‘패배’가 아닌 ‘인내와 용기’에 관한 얘기라 말하고 싶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만의 ‘안전지대’가 어디인지를 기억하는 일이다. 내게는 말할 것도 없이 한 권의 책을 들고 어두운 방 안의 스탠드를 켤 때의 그 따뜻한 빛과 연관돼 있다. 침대 스탠드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문장을 햇볕처럼 쪼일 때, ‘이젠 혼자 책 읽을 시간이야’ 라는 속삭임 말이다. 이 책이 그 시절의 나를 살렸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사진
김정선
2019년 11월호

2019년 11월호

에디터
하은정
사진
김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