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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거펠트라는 전설을 기리며

전 세계 구석구석을 영원토록 패션으로 채워 넣을 것 같았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안타까운 타계 소식. 어떤 청춘 못지않게 새로움으로 반짝였던 칼 라거펠트를 기리며 그에 대한 기억의 퍼즐을 재구성해봤다.

On April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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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영원할 것 같았던 패션 황제의 삶에 마침표가 찍혔다. 샤넬에서만 오트 쿠튀르 컬렉션과 레디투웨어·크루즈·공방 컬렉션 등 1년에 10개, 6주에 1개의 컬렉션을 선보였고, 펜디와 자신의 레이블인 칼 라거펠트까지 합치면 그가 관여하는 컬렉션의 수는 1년에 17개에 달했다. 심지어 샤넬의 광고 캠페인을 직접 촬영하는 포토그래퍼였고, 일러스트레이터, 인테리어 디자이너, 조각가 등으로도 혈기왕성하게 활동했기에 80대라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해 보였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지속될 것 같았던 그의 활동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지난 샤넬 오트 쿠튀르 때부터. 칼 라거펠트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피날레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가 샤넬에 데뷔한 1983년부터 36년 동안 피날레에 서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2월, 칼 라거펠트의 부고가 들려왔다. 많은 국내외 스타와 패션 관련 인물들이 자신의 SNS에 칼 라거펠트를 추모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과 추모 멘션을 올렸다.


필자 역시 기억을 떠올리면 그를 볼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다. 칼 라거펠트를 실제로 처음 본 건 2000년 초반, 패션지 에디터로서 컬렉션 취재차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컬렉션에 참석했을 때였다. 조금 늦게 온 니콜 키드먼 때문에 현장 분위기는 쇼를 시작하기도 전에 취재 경쟁으로 이미 펄펄 끓어올랐다. 샤넬 컬렉션은 일단 규모나 관람객 수, 등장하는 컬렉션 수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컬렉션을 스케일로 압도했다. 칼 라거펠트는 이 드라마를 완결하는 스타였다. 하나로 묶은 은빛 머리. 선글라스로 철저히 은닉한 눈, 특별 주문한 깃이 높은 빳빳한 화이트 셔츠와 몸에 꼭 맞는 블랙 재킷, 스키니 진, 부츠, 버클 벨트, 로커 같은 블랙 레더 반장갑 등 아이코닉한 스타일로 피날레에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마담투소 박물관의 밀랍 인형이 걸어 나온 것은 아닌가 꼬집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살아 있는 전설을 눈앞에서 본 느낌이랄까?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한 특유의 조심스러운 종종걸음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후 몇 년 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샤넬 공방 컬렉션에서 또다시 칼 라거펠트를 만날 수 있었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거와 일치하는 아이코닉한 스타일 때문에 몇 년 사이 그에게 어떤 외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아마도 젊음의 세계인 패션계에서 살아남는 칼 라거펠트의 치밀한 전략이었으리라!). 쇼가 끝난 후에 있었던 애프터 파티에서 칼 라거펠트는 디자이너 톰 포드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한동안 매우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지금은 고인이 된 건축가 자하 하디드와 매우 친한 사이인 듯 바로 옆 소파에 앉아 샴페인 잔을 들고(실제로 마시는 모습을 보진 못했다) 즐겁게 소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심지어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나 새삼 감사하게 된다. 칼 라거펠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진실 몇 가지를 더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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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인 칼 라거펠트의 샤넬 입성은 녹록지 않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칼 라거펠트는 19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됐을 때 프랑스 내 반대 여론이 거셌다. 1983년 1월, 샤넬 오트 쿠튀르 컬렉션 데뷔 무대를 통해 칼 라거펠트라는 샤넬의 카드는 성공적이었다는 걸 입증했고, 1984년부터는 샤넬의 프레타포르테까지 맡았다.

2 불투명한 검은 선글라스 뒤에 강아지처럼 순한 눈이 숨어 있다
선글라스로 눈을 항상 가리고 있었던 칼 라거펠트. 그가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칼 라거펠트의 눈은 뜻밖에도 순한 강아지 눈을 닮았다고! 치밀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듯한 노장 디자이너의 뜻밖의 반전이 귀엽다.

3 어린 시절, 칼 라거펠트의 어머니는 말을 빨리 하라고 종용했다
모국어인 독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언어 천재'라고 불린 칼 라거펠트.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칼 라거펠트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엄하게 훈육했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칼 라거펠트가 말하는 속도는 매우 빠르고, 비영어권 패션 기자들은 그와 인터뷰할 때 녹음기를 켜고 바짝 긴장해야 했다.

4 칼 라거펠트는 대기만성형
칼 라거펠트는 1954년, 국제양모사무국 콘테스트 코트 부문에서 1위를 하며 데뷔했다. 놀랍게도 전설적인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도 같은 해, 같은 대회 드레스 부문 1등을 수상한 '동기'라는 점. 이브 생로랑이 디올의 후계자로서 일찌감치 천재 디자이너로 추앙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칼 라거펠트의 커리어는 대기만성에 가깝다. 그는 1955년, 피에르 발맹 하우스에서 견습 디자이너로 일했고, 3년 후에는 장 파투로 옮겨 5년간 쿠튀르 컬렉션을 맡았지만, 1963년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독립해 다양한 브랜드에 디자인을 납품했다. 당대에는 오트 쿠튀르보다 기성복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됐기 때문에 그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각자 상상해봐도 좋겠다. 하지만 이후 1964년 끌로에, 1965년 펜디 디자이너로 발탁됐고, 1982년에는 샤넬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5 칼 라거펠트는 끝까지 프리랜서 마인드였다
칼 라거펠트는 끝까지 자신을 프리랜서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아마 '프리'라는 단어는 그가 펜디, 샤넬에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고 다양한 직종에 도전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칼 라거펠트는 다양한 브랜드, 디자이너와 프로젝트를 하는 건 외부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가져오는 과정이고 샤넬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6 여행 다닐 시간이 없었다
노년에도 왕성한 호기심을 놓지 않았던 칼 라거펠트는 '할 일이 너무 많아'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다. 대신 샤넬 컬렉션을 하며 전 세계를 다녔다. 뭄바이, 잘츠부르크, 두바이, 서울, 아바나, 싱가포르, 스코틀랜드에서 샤넬 컬렉션을 열었고, 자신의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홈커밍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7 퉁퉁한 시절이 있었다
뚱뚱한 사람의 외모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낳았던 칼 라거펠트이지만 그도 한때는 뚱뚱했다. 2000년에 에디 슬리먼이 디자인한 디올 옴므(Dior Homme) 슈트를 입기 위해 13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통해 42kg을 감량한 일화는 유명하다. 다이어트에 성공하기 전 칼 라거펠트는 피날레에 설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완벽한 '은둔형'이었다.

8 심각한 책 중독자, 얼리어답터
칼 라거펠트의 저택에는 20만 권 이상의 책이 있다. 그는 "책은 결코 과다 복용할 위험이 없는 마약이다. 나는 책에 행복하게 중독돼 있다"고 밝혔다. 또한 칼 라거펠트는 한때 4대의 아이폰과 30대의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얼리어답터였다. 크루즈 컬렉션을 위해 서울에 왔을 때도 그의 팔목에는 애플 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9 인스타에서 흥하는 새로운 마케팅 공식을 만들어냈다
칼 라거펠트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디자이너였다. 그는 기발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가브리엘 샤넬의 별자리이자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했던 사자 모형의 동상을 쇼장 한가운데 설치한 2010 F/W 오트 쿠튀르, 쇼장에 10대의 거대한 풍차 발전기를 설치한 2013 S/S, 슈퍼마켓을 콘셉트로 10만 개의 모조 샤넬 제품을 디스플레이한 2014 F/W, 페미니즘을 주제로 시위 피켓을 든 모델들이 피날레를 장식한 2015 S/S 컬렉션은 SNS에 수많은 피드를 양산해냈다. 또한 2015 F/W에는 쇼장에 파리의 브라세리를 재현하고, 2016 S/S에는 공항 터미널을 통째로 옮겨놓았으며, 2017 F/W에는 우주선 발사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2017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땐 무대 한가운데 거대한 에펠탑을 설치했는데, 이 모든 것은 엄청난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고, 패션 브랜드의 마케팅 패턴까지 변화시켰다.

10 고양이에게 2억 달러를 상속했다
칼 라거펠트는 8년 전 생후 4개월의 버만 고양이 '슈페트'를 입양했다. 모델 밥티스트 지아비코니가 휴가를 떠날 때 좀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고양이와 사랑에 빠져버려 아예 키우게 된 것. 슈페트는 2명의 집사와 전담 간호사가 세심하게 돌본다. 칼 라거펠트는 슈페트와만 메시지를 주고받는 전용 휴대폰도 가지고 있다. 슈페트는 맨날 놀기만 하는 고양이는 아니다. 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와 <보그> 표지를 촬영했으며, 2014년에는 두 편의 광고를 찍어 35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슈페트는 칼 라거펠트의 재산 일부인 2억 달러(약 2,245억원)를 상속받았다.

CREDIT INFO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사진
쇼비트, 스타 인스타그램
2019년 04월호

2019년 04월호

에디터
정소나
명수진(패션 칼럼니스트)
사진
쇼비트, 스타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