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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다리 마비, 김병지 병상 인터뷰

‘꽁지머리’ 김병지 선수가 교통사고로 허리 디스크가 파열돼 다리가 마비된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샀다. ‘골 넣는 골키퍼’로 한국 축구계에 새로운 역사를 쓴 김병지 선수를 단독으로 만났다.

On January 17, 2018



“회복은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예요. 걱정이에요. 지도자로 활동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사고가 났어요. 집사람을 빼고 세 아들과 함께 남자끼리 유럽 여행을 가려고 계획했는데 그것도 미뤄졌어요.”

지난 11월 27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김병지 선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교통사고로 허리 디스크가 파열돼 수술하게 됐다고 밝힌 것. 전 국민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병지 선수에 따르면 그는 지난 11월 19일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음 날인 20일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이틀 후인 22일 병원을 찾아 MRI(자기공명영상)를 촬영했다. 허리 디스크가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고 1차적으로 약물치료를 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28일 수술을 받았다.

“축구 경기를 응원하러 가다가 사고가 났어요.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우리 차를 박았는데 차에 큰 이상이 없어 몸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대로 응원하러 갔다가 오후에는 미팅이 있어 갔죠. 다음 날 K리그 시상식에 시상자로 가야 해서 집을 나서는데 구두가 안 신겨지더라고요. 발이 살아 움직여야 하는데 마치 제 발이 아닌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의 발을 잡고 신발을 신겨주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는데도 차도가 없어 병원에 가서 MRI를 촬영했어요. 약물치료를 먼저 했는데 나아지지 않아서 결국 수술을 했어요.”

김병지 선수의 설명에 따르면 허리 디스크가 파열됐고, 파열된 디스크가 허리의 신경을 누르는 바람에 신경이 괴사해 다리에 마비가 왔다는 것. 사고 직후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다면 마비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운동선수인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니 웬만한 사고에도 끄떡없다고 생각해 곧바로 정밀 검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운동선수이니 워낙 몸이 튼튼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디스크가 파열됐는데 주변 근육이 잡아줘서 통증이 늦게 온 거였어요. 일반인이었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났을 텐데…. 그날 수술을 했으면 다음 날 바로 걸을 수 있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김병지 선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수술 역시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일반인보다 뼈가 굵어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고 뼈를 깎는 과정에서 피도 많이 났다.

“제가 통뼈래요. 뼈가 굵어 뼈를 깎는 데 남들보다 배로 시간이 걸려 수술이 길어졌어요. 수술 중에 보니까 손가락 마디 2개 정도 길이의 뼈가 신경에 박혀 있었대요. 뼈를 깎다가 출혈도 상당했다고 하네요.”

힘든 수술을 마쳤지만 다리의 감각이 회복될지는 미지수다. 신경이 괴사돼 회복 기간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 6개월 뒤에 경과를 보고 회복이 가능한지, 혹은 장애가 남을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만져도 감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살짝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진 않고 발가락 두 개에 감각이 없어요. 주치의 선생님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고 하시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신경 1mm가 살아나는 데도 시간이 되게 많이 걸려서 다리 감각이 완전하게 돌아오려면 2년 정도 걸린대요. 만약 6개월 후에도 다리에 감각이 전혀 살아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그래도 재활 치료를 하면 회복될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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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전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프랑스의 친선 경기에 출전한 김병지 선수. 우_2002년에 열린 프로축구 올스타전에 참가한 홍명보·김병지·김태영(왼쪽부터) 선수. 태극 마크 페인팅을 한 모습에서 장난기 넘치는 김병지 선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포기를 모르는 긍정의 아이콘

상황은 심각했지만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워낙 긍정적인 김병지 선수의 성격 덕이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자연스레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원래 성격이 긍정적이에요. 선수 활동을 하는 동안 어려울 때가 많았어요. 어느 날 고비를 넘길 때를 되돌아보니 제가 포기하지 않았더라고요. 매달리다 보니 목표가 이뤄졌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대학교에 소속된 팀에 들어가는데 전 대학교를 안 가서 직장 소속 팀에 들어갔죠. 사실 직장 팀에 들어가면 선수 생활은 끝났다고 봐야 해요. 그런데 전 포기하지 않고,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갔어요. 보통 군대를 면제받으려고 하는데 전 정면 돌파한 거죠. 대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가면 6년이란 시간이 비잖아요. 전 대학을 가지 않고 군대를 갔으니 4년을 번 셈이죠. 국군체육부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 프로 축구선수가 되고 국가대표 축구선수까지 됐어요. 언덕들을 넘다 보니 정신력으로 버티면 된다는 걸 습득했죠.”

김병지 선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꽁지머리에서 느껴지는 즉흥적이고 거친 느낌과 달리 부드럽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많은 후배가 그를 ‘병지 삼촌’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하는 것 역시 그의 성격 덕분이다. 또한 항상 미래를 생각하며 다음 스텝을 밟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병지 선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무서운 선배였다고 농담을 하더니 다시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는 내용인 <그래도 계속 가라>(조셉 M. 마셜 저)라는 책이 있는데, 제가 살아온 삶을 가리키는 메시지가 많아요. 저는 어떤 상황이든 제가 생각한 대로 갔어요. 그러다 보면 목표가 되고 목표를 이뤘죠. 목표를 한 번, 두 번 이루어보니 목표를 어떻게 잡아야 하고,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항상 타깃을 정해야 돼요. 너무 멀리 있는 것 말고 자신이 이룰 수 있는 수준으로 정하는 것도 중요해요. 고등학생 때는 국군체육부대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복무 기간 동안에는 프로팀에 가려고 준비했어요. 프로팀에 들어가 게임을 뛰려면 2년 정도 걸리겠다고 생각하고 조동석 코치님과 최은성 선배님을 보고 모든 것을 흡수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2개월 만에 게임을 뛰었어요. 그다음 목표가 국가 대표였고, 월드컵이었어요. 그다음엔 400경기, 500경기를 뛰자는 목표를 세웠고요. 나중엔 777경기가 목표였는데 이건 못 이뤘네요.”

지난 1992년 울산 현대에 입단해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김병지 선수는 24년간 선수로 활약하다 지난 2016년 은퇴식을 치렀다. 무려 46살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했다. 운동선수가 선수로서 수명이 짧다는 생각은 편견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활약이었다.

“선수 생활을 길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후배들이 오랫동안 선수로 생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 같아요. 후배들이 나중에 저보다 더 잘할 거예요. 또 감독이나 코치들도 ‘김병지도 했잖아’라면서 선수로 더 활동하라고 용기를 줄 거고요. 지금 K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이동국 선수도 곧 40살이 돼요. 이동국 선수가 잘해주면 필드에 있는 선수들이 더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골키퍼로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 김병지 선수는 이후의 삶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룸메이트로 지내던 이재명과 윤일영 선수가 운전면허를 취득하러 다닐 때, 시험장까지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다가 유소년 축구단을 떠올리고 버스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은 귀여운 에피소드다. 유소년 축구단이 이동할 때 버스 운전이라도 해서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해온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제가 30대 중반일 때 축구 지도자 라이선스 과정이 생겼어요.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지도자 라이선스를 준비하면 4~5년이 걸려니까 38살 때부터 준비했어요. 축구는 1월에 전지훈련을 가서 3월에 시즌이 시작되고, 11월에 끝나요. 12월 한 달을 쉬는데 그때가 교육 기간이에요. 그 기간에 꾸준히 교육을 받았어요. 골키퍼, 필드 지도자 과정을 다 준비했고 올해 12월에 결과가 나오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교통사고가 났네요. 하지만 재활 치료를 열심히 하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늘 그래왔듯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 목표도 중요하지만 사실 이제 저한테 남은 목표는 가족들에 대한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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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병문안을 온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수술 후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그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매사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그의 눈에선 긍정 파워가 느껴졌다. 우_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치료 중인 김병지 선수.
 

그리고 나의 전부인 가족

김병지는 아내와 태백, 산, 태산 세 아들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솔직했고 열정적이었다. 특히 막내아들 태산 군이 얽힌 폭행 사건을 이야기하며 몹시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다. 지난 2015년 태산 군이 학교에서 다른 학생에게 공을 던지며 괴롭히고 상대 학생을 심하게 폭행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김병지 선수와 태산 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생겼다. 게다가 상대 학생 부모가 김병지 선수 가족에게 별다른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해 비난이 거세졌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태산 군이 장난으로 던진 공을 맞은 상대 학생이 태산 군에게 여러 차례 공을 던져 싸움이 시작됐다. 화가 난 태산 군이 상대 학생을 할퀴자 상대 학생이 태산 군을 깔고 앉아 폭행한 것. 더불어 김병지 선수 측이 여러 번에 걸쳐 사과를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지금도 재판 중이에요. 태산이가 친구와 다투고 할퀸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에요. 저는 제 잘못을 금방 인정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번 사건은 거짓말이 너무 많아 끝까지 진위 여부를 가리려고 해요. 한 아이의 인생이 파괴당했어요. 여론 재판을 심하게 당해 아이가 상처를 받고 축구까지 그만뒀어요. 저 역시 이 사건 때문에 은퇴를 결심했고요. 아빠가 유명인이니까 항상 조심하라고 가르쳤는데, 결국 아빠가 유명인이라서 아이가 피해를 본 거죠.”

김병지 선수는 문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줬다. 그는 오른 팔에 첫째 아들 태백 군, 왼쪽 팔에 둘째 아들 산 군, 등에 막내아들 태산 군과 각각의 생일을 문신으로 새겼다.

“아이들이 되게 좋아해요. 막내는 저한테 ‘아빠, 오른쪽은 첫째 형아, 왼쪽은 둘째 형아, 등은 나지? 제일 크니까 날 제일 좋아하는 거지?’라고 묻기도 했어요.(웃음) 아빠랑 대화를 안 하는 친구들이 많다던데, 저희 아이들은 그런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저하고 되게 친하거든요. 저보다는 집사람을 더 좋아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솔직하게 아빠한테 다 말하죠.”

이어 자녀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평범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줬다. 현재 태백 군은 일본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을 앞두고 있으며, 산 군은 실용음악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다.

“첫째 아이가 일본 야마나시현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해요. 둘째 아이는 축구를 그만두고 음악 쪽으로 진로를 틀었어요. 저하고 함께 세 아이가 드럼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흥미를 느꼈대요. 집사람에게 들어보니 어렸을 때 머리를 감겨주면 물소리를 듣고 세세하게 표현하고 그랬대요. 음악 선생님도 산이가 음악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감각도 있는 것 같아요. 실용음악고등학교 입시 결과가 곧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도록 지지해요. 그저 아이들이 그 나이에 맞는 스텝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해요.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될지 모를 수 있으니까 도움을 주는 거죠.”

24살에 만나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조를 한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인터뷰 현장에 아내가 함께하지 못해 그의 말을 생생하게 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김병지 선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아내가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어요. 연애할 때 제가 워낙 무명 선수다 보니 실력은 자신 있는데 제 존재가 알려지지 않는 거예요. 그때 집사람이 외형적으로 변화를 줘서 포인트를 주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그게 꽁지머리였고 그때부터 제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 이후 아내는 오로지 저를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는 데 힘을 썼어요. 아내는 섬유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자신의 꿈을 다 포기했죠. 이젠 아내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작업실을 만들어주고 전시회를 열도록 돕는 일이 저한테 가장 중요해요. 얼마 전에 아내가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이제 제가 할 일은 외조를 잘하는 것뿐이에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쉴 틈 없이 이어가던 김병지 선수는 인터뷰 말미에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아니냐며 머쓱해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오히려 김병지 선수가 더 멋져 보였다.

골 넣는 골키퍼, 듬직한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하루빨리 그라운드 위 벤치에서 김병지 감독으로 만날 수 있기를. ‘꽁지머리’ 김병지 선수, 파이팅!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객원 에디터
김지은
사진
하지영, <일요신문>DB
2018년 01월호

2018년 01월호

에디터
하은정
객원 에디터
김지은
사진
하지영, <일요신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