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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인생 2막

굴곡진 인생의 끝에 인생 2막이 열린 김성수를 만난 건 그가 운영하는 용인의 한 꽃게식당에서였다. 재료 손질부터 전단지 홍보, 서빙까지 해내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였다.

On October 17, 2013

“힘든 시기에 우연히 <127시간>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한 청년이 육중한 바위에 팔이 낀 채 조난돼 닷새간 홀로 사투를 벌이다 자신의 팔을 직접 절단하고 살아나오는 영화예요. 실화이기도 하죠.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127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고 이 과정에서 친구, 연인, 가족 그리고 사고 전에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죠. 저 역시 그 영화를 보면서 제 인생이 정리됐어요. 저는 힘든 시기를 이제 막 지나 팔을 절단하고 간신히 생존한 상황입니다. 앞으로의 제 인생은 달라질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고 했다. 운명이라 여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실에 매몰돼 도태된다. 그는 하루에 1억을 벌던 잘나가는 가수였다. 그런 그에게 사업 실패와 이혼, 처절한 생활고 그리고 전처의 죽음까지, 이 비극이 모두 지난 3년간 일어났다. 세월은 그렇게 야속하게 흘러버렸다.
‘죽으라는 것인가? 그래, 죽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역술인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답은 없었다. 3년을 버티면 숨을 쉴 수 있게 된다는 한 스님의 말을 듣고 일단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버티지 않으면 딸은 세상에 혼자 남게 될 테니까. 전처의 죽음은 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뒤통수를 내리치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루 일과요? 예전에는 오후 1시쯤 일어나는 게으른 생활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완벽히 아침형 인간이 됐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9시에 가게에 나와 자정까지 정신없이 하루를 보냅니다. 방송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가게에 나와서 손님들을 접대해요. 상호가 쿨의 히트곡인 ‘해변의 연인’을 각색한 ‘해변의 꽃게’예요. 해변의 연인이 나이가 들어 꽃게를 잡았네요.(웃음)”
1만2천9백원에 꽃게가 ‘무한 리필’이다.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는 싱글벙글이다. 가격이 싼 만큼 많이 팔아야 남는 장사지만 다행히도 남는 장사다. 감사하고도 또 감사한 일이다.

"주말이면 딸과 함께 교회에 간다. 기도를 하며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몸이 아파서 하나님이 치료해주시려고 먼저 데리고 간 거야. 엄마에게 기도하고 편지도 많이 써. 엄마가 다 듣고 계셔.” 아이도 차츰차츰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전처의 죽음이 내게 남긴 것
얼마 전까지 끼니를 때우지 못했을 만큼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가 어떻게 제법 큰 규모의 가게를 오픈할 수 있었을까?
“매 끼니를 라면으로 때울 만큼 힘들었죠. 아마 저는 죽어도 몸이 부패되지 않을 거예요. 방부제를 많이 먹어서요. 이혼 후 딸에게 그럴듯한 밥을 사줄 돈이 없어딸을 만나지 못하는 아빠였지요. 이 식당요? 저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죠. 벼랑 끝에 몰리니 철판을 깔게 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습니다. 도움도 받고 빌리기도 했죠. 참 신기하게도, 그 스님의 말처럼 3년이 딱 지나니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는 느낌이랄까요. 제게는 이게 마지막 기회이고 도전이에요. 죽을 힘을 다하는 일만 남았죠.”
서비스업이다 보니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생긴다. 하지만 그것마저 즐겁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고 미래를 그린다는 것, 그 자체가 그에게는 희망이다.
“연예계 생활요? 당연히 그립죠. 잘나갈 때는 하루에 1억 넘게 돈을 벌었고, 지금의 아이돌 인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죠. 현찰이 많아 지갑이 터질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현실은 하루 12시간 서빙을 하다 보니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힘들다는 것이죠. 하지만 꿈이 있으니까 참을 수 있어요.”
그의 꿈은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사는 것이다. 현재 딸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조만간 가게 근처에 집을 장만해 딸과 함께 지낼 생각이다. 적지만 차곡차곡 돈을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행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도 딸이 밝고 명랑하게 자라준다는 것. 또래보다 키도 크고 리더십이 있어 학급회장이 됐다.
“씩씩한 딸이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때면 마음이 미어져옵니다. 드라마에서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나오면 딸이 자리를 피해요. 늘 밝은 모습이지만 간혹 그늘진 모습을 볼 때면 죄책감이 들고 큰 숙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아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게 일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 학부형으로서의 역할도 오롯이 그의 몫이다. “준비할 게 너무 많아요(웃음)”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예방접종, 온갖 서류, 수업 준비물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장모님이 연로하세요. 아이를 보살필 상황이 아닙니다. 전처와는 성격 차이로 합의이혼을 했기 때문에 장모님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에요. 지금도 저를 사위처럼 대해주세요. 딸과는 일주일에 3~4번 만납니다. 저는 한없이 부족한 아빠예요. 예전에는 10분 정도 아이를 봐주는 것도 힘겨운 아빠였어요. 어느덧 딸이 자라서 말도 통하고 오히려 절 이해해주네요.”
엄마의 죽음을 어린 딸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엄마에게 사고가 난 이후 친구들이 딸에게 물었나 봐요. ‘너희 엄마 어떻게 됐어?’라고.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근데 내색을 안 하는 거예요. 언젠가 아이 이모가 그러더라고요. 딸이 ‘아빠가 힘들어할까 봐 혼자 참고 있어’라고 하더래요. 딸의 의젓한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리면서도 고마워요. 우리 딸은 정말 최고예요.”
주말이면 딸과 함께 교회에 간다. 기도를 하며 아이에게 늘 말한다. “엄마가 몸이 아파서 하나님이 치료해주시려고 먼저 데리고 간 거야. 엄마에게 기도하고 편지도 많이 써. 엄마가 다 듣고 계셔.” 아이도 차츰차츰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차를 타고 갈 때면 하늘을 보며 엄마에게 얘기도 한다. “엄마, 나 오늘 회장 됐어.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내가 반 친구들보다 키도 커.” 딸의 편지는 허공에 흩날리지만 엄마는 하늘에서 딸의 씩씩한 모습을 보며 대견해할 것이다.
“사실 제가 종교 생활을 하게 된 건 우연이었어요. 총각 시절 집에서 곰탕을 끓이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예수님이 저를 깨우는 거예요. 잠이 들기 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하고 궁금해했거든요. 참 뜬금없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처럼 그 느낌이 아주 강렬했어요. 잠에서 깼고 순간 온 집 안이 연기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죠. 숨을 쉬려고 해도 쉴 수가 없었어요. ‘아,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간신히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죠. 그 일이 있은 뒤에 저는 크리스천이 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찬송가 가사만 봐도 눈물이 주루룩 흐르게 됐어요. 참 신기한 일이죠. 십자가를 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느낌, 용기를 받는 느낌이 들어요.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힘들 때 그를 응원해준 지인도 많다. 서경석, 김창렬, 이하늘이 그들이다. 특히 이하늘과는 낚시를 하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난 1년간 도피하듯 낚시를 다녔다고 했다. 힘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기에 그는 버텼다.

“쿨의 멤버인 두 동생과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요.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납니다. 뜻이 맞는다면 언젠가 다시 함께 무대에 설 날이 오겠죠. 제가 가게를 한다고 하니 무척 좋아해주고 응원도 해줍니다. 재산과도 같은 동생들입니다.”

그럼에도 씩씩한 내 딸에게…
그에게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가 언제였느냐고.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고 나약하게 포기했을 때라고 했다.
“지난 2005년 MBC <무한도전>에 출연했는데 얼마 못 가서 하차한 적이 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순간이죠. 당시 유재석씨가 내게 ‘형, 조금만 참아봐. 좋은 일 있을 거야’라고 말했는데 저는 포기해버렸어요. 그때 ‘유느님’을 믿었어야 했어요.(웃음) 뭐랄까, 가장의 무게라고 할까요? 총각 때는 편한 마음으로 예능에 임했다면 결혼 후에는 모든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어요. 더 재미있게 해야지, 더 잘해야지, 그런 중압감이 오히려 자신감을 떨어뜨리더라고요. 그 스트레스가 슬럼프가 됐어요.”
하차 이후 일부러 <무한도전>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를 메운 정준하를 볼 때면 후회가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박수를 보냈다. 정준하는 예전에 쿨의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제요? 극복했죠. <아빠! 어디가?>에 욕심이 나네요.(웃음)”
재혼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그도 딸도 아내와 엄마가 필요하다.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고 싶어요. 늘 공허하니까요. 저보다도 딸에게 더 절실합니다. 제가 죽을힘을 다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다 해도 제가 해줄 수 없는 엄마의 빈자리는 분명히 있으니까요. 요즘 들어 옷을 갈아입을 때 등을 돌리고 갈아입는 딸을 보며 딸아이의 성장 과정에 엄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딸에게 말했다.
“딸아, 밝은 모습이 정말 대견하지만 간혹 힘든 것을 내색하거라. 아빠가 늘 노력하고 있단다. 아빠가 잘돼야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거 알지? 너와 나의 둥지를 마련하는 그날까지 우리 6개월만 참자. 사랑한다!”
철없던 아빠가 철이 들고, 딸은 그런 아빠를 응원한다. 부녀는 서로가 험난한 인생의 다리가 되어 밀고 당기며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사진
이상윤
2013년 07월호

2013년 07월호

취재
하은정
사진
이상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