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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테토의 아트스페이스 27탄

키아프 서울 속 스타, 김현식 작가

On November 10, 2021

유한한 캔버스 안에서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는 작가 김현식. 레진과 아크릴 물감, 그리고 수행하듯 그려 내려간 선이 만들어내는 아득하고도 현묘한 공간이 이끄는 판다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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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그 드러나는 현상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율이자, 무색의 공간. 현(玄).

직접 봐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있다. 김현식 작가는 공간을 보이기 위해서 색과 형태를 만들어낸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적 공간을 드러내겠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지속해오면서, 작가는 레진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창조했다. 프레임에 레진을 바르고 말린 후 송곳으로 수직의 수많은 선들을 그어 골을 만든다.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꼼꼼히 칠하고 헝겊으로 닦아내면 선의 골 속에만 물감이 남게 된다.

다시 그 위에 레진을 올리고 말린 후 골을 만들고 색을 칠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 투명하고도 선명한 색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입체적인 선들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반짝이는 색의 평면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가까이 갈 때마다 그 속의 아득한 공간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사진은 작품의 회화적 미감은 보여주지만, 그 알 수 없는 아득함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깊이를 느껴보고 싶다면 직접 작품 앞에 서야 한다. 작가는 매력적인 색으로 관객을 자신의 작품 앞으로 초대한다. 색에 이끌려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작은 캔버스 안의 무수한 선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무한한 공간을 유영한다. 평면이 만들어내는 3차원의 공간. 김현식 작가는 이 공간을 우주의 완벽한 질서가 존재하는 ‘현(玄)’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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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레진 위에 선을 그을 때 사용하는 송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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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들이 그어진 면 위에 아크릴 물감을 바르는 김현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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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이 마르기 전 헝겊으로 닦아내면 선 위에만 물감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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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개수대에 남아 있는 물감의 흔적들도 작품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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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릴 물감이 묻은 헝겊들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려고 모아두었다.

M 작가님 안녕하세요. 멋진 작업실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 작가님의 색과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좋아했는데, 여기에서는 작업 초기의 작품도 만날 수 있어서 좋네요!
멀리 울산까지 찾아와줘서 감사합니다.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한 가지를 오래하는 성격은 아니어서 작품 스타일이 몇 년마다 바뀌기도 해요. 작업실 벽에 걸린 여성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 보이시죠? 그 작품도 레진을 굳히고 송곳으로 드로잉을 해서 색을 입힌 것인데,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세밀하게 그려본 거예요. 그 작품이 인기가 많았는데, 그 머릿결 한 부분만 확대한 것처럼 표현해보고 싶어서 지금의 작품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최근에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느꼈던 공간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감정이 여러 작품을 거쳐 결국 드러나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M 어릴 때부터 공간에 관심도 많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나요?
아주 어릴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어요. 제가 유년 시절을 보낸 함양은 지리산 밑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어요. 학교에 다닐 때 한 학년에 한 명씩 그림을 좋아하는 선후배가 있어 서로 의지하고 경쟁하면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죠.  

M 주로 어떤 그림들을 그리셨어요?
수채로 풍경화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저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하고 주말이면 함양의 ‘상림’이라는 숲에 가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렸어요. 숲속에 들어앉아 나무와 거기를 비치는 빛들을 그리곤 했는데 그 시간들이 정말 소중했던 것 같아요.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작업에도 영향을 많이 주었고요.  

M 시골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우기 어려웠다고 했는데, 어떻게 미대에 진학하게 된 거예요?
미대에 가려면 서울에서 입시 미술학원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고등학교 3학년 방학 때 한 달 동안 서울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석고 데생하는 법도 배웠을 정도로 모르는 게 많았는데, 한 달 만에 그 일대 미술학원 학생들 중에서 가장 잘 그린다고 소문이 났어요. 대학교 입시 면접에서 교수님께서 왜 홍익대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미술을 너무 좋아하지만 지방에서 그림을 배우기가 너무 어렵고, 입시도 너무 불리해서 좀 억울한 기분이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지방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미술을 좋아하고 진학하고자 하는 친구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합격했어요(웃음).  

M 시골의 자연에서 그림 그리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요.
중학교 때 숲속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요. 숲에 들어가면 외부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계, 공간을 경험하게 돼요. 어떤 판타지가 시작되죠. 숲을 벗어나면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아득한 공간에 혼자 존재하게 되고.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주위를 환기시키지만 그마저도 신비롭게 들리죠. 전 그런 시공간감을 캔버스를 통해 경험하게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M 작가님의 작품을 바라보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좋아하는 색에 이끌리고, 그다음엔 수많은 선들이 보이고, 그 선들 사이사이에서 무한한 공간이 느껴지고, 제 시선이 그 선들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관객들이 제 작품 앞에 설 수 있게 색으로 초대를 하고, 작품을 통해 경험하는 것들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M 작가님의 작품에선 빛도 중요한 역할을 하죠?
지난 전시에 대한 평론을 써주신 분이 과학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인 홍가이 선생이었는데, 제 작업 속의 선을 기둥이라고 표현해주셨어요. 선과 선의 기둥 사이를 침투하는 게 빛의 알갱이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빛의 알갱이들이 기둥에 부딪혀 반사되며 다른 기둥에 부딪히게 되고요. 작품 안에서 빛들이 부유하고 있다는 거였죠.  

M 작가님의 작품은 특히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어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네. 2차원의 캔버스 안에 3차원의 공간을 가두겠다는 발상 자체가 엉터리였지만, 레진이라는 재료로 가능하게 되어서 재미있어졌어요. 제 작품을 두고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논쟁도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빛으로 결론을 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끼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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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갤러리에서 열렸던 김현식 작가의 개인전<현>의 전시전경.

현은 색이 아니다.
 현은 본질과 그 드러나는 현상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율이고 빛을 담은 무색의 공간이다.
현은 검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완전한 무색이다.
그 깊이가 아득하여 오묘한 색으로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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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작가의 신작 ‘who likes YJ Co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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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관람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크 테토와 김현식 작가.

작품을 관람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크 테토와 김현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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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김현식 작가의 초기작들.

작업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김현식 작가의 초기작들.

M 작업은 어떤 식으로 주로 진행되나요?
깊이감이 있는 캔버스를 제작하고, 그 안을 레진으로 채워요. 마른 레진의 표면에 칼과 송곳으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합니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수건으로 닦으면 선으로 만들어진 골 안에는 색이 남고 표면의 색은 지워지고요. 그리고 또 레진을 올리고 선을 긋고 물감을 칠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현’의 공간이 담긴 그림이 완성돼요.  

M 최근 개인전〈현〉의 주제와 연결된 거죠? ‘현’은 어떤 뜻이에요?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려워요. 우주를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섭리를 형용하는 말이에요. 세상은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우주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세계 안에 머물러 있고, 그 기운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 ‘현’의 공간이죠. 아득하고 깊고 어두운 공간이에요. 보이진 않지만 직감할 수 있죠.

M 동양적 철학이 깃든 작업들인데 서양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외국에서도 제 작품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더라고요. 색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마크 씨처럼 비슷하게 색과 선의 기둥이 만들어내는 색다른 기분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 분들도 많아요.  

M 서양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효과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의 작품은 그 안에서 길을 좀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그 길을 걷고 나온 저는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고요.
제 작품 안에서 한 바퀴 돌고 나온 후 기분 좋은 감정을 느꼈다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그게 제가 작품 활동을 하는 목적이고요.  

M 작가님만의 스타일과 철학이 담긴 특별한 작업 방식과 작품에 큰 감동을 느낀 인터뷰였어요. 오늘 흥미로운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저도 마크 씨와 즐거운 대화 덕분에 앞으로 더 힘내서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많은 이들이 그렇듯 캔버스에 작업을 했는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뭔가 나만의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거든요.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레진이라는 재료를 시도해보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스타일을 찾았어요. 좋은 작가의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저는 그 첫 번째로 자기만의 것을 찾아가기를 권해요.

마크 테토(Mark Tetto)

마크 테토(Mark Tetto)

JTBC〈비정상회담〉의 훈남 패널로 이름을 알렸다. 한국 생활 11년 차, 북촌의 한옥 마을에 거주하며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매일 누리고 있다. 경복궁 명예 수문장을 역임하고, 한국 공예품과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 중 한 명. 매달〈리빙센스〉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유한한 캔버스 안에서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는 작가 김현식. 레진과 아크릴 물감, 그리고 수행하듯 그려 내려간 선이 만들어내는 아득하고도 현묘한 공간이 이끄는 판다지의 세계.

CREDIT INFO

기획
심효진 기자
사진
김덕창
취재협조
학고재갤러리(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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