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인스타그램 네이버포스트 카카오 스토리 유튜브 네이버TV캐스트 블로그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FEATURE

양태오 디자이너와 #내일의_공예⑧

영원을 간직한 칠피의 미감

On April 08, 2021

조선 중기 이후 명맥이 끊긴 칠피공예가 한 사람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칠피공예 장인이 꿈꾸는 제2의 전성기는 어떤 모습일까?

/upload/living/article/202104/thumb/47764-449366-sample.jpg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기증한 칠피금보함. 금보함은 조선왕실에서 왕의 권위를 표시하는 금보를 보관하는 함이다. 소나무로 만든 상자에 상어 가죽을 씌우고 옻칠로 마감했다.

거북이 등껍질에 흰 종이를 붙이고 문양을 그려 그 자리를 톱질로 잘라 장식을 만든다.

거북이 등껍질에 흰 종이를 붙이고 문양을 그려 그 자리를 톱질로 잘라 장식을 만든다.

거북이 등껍질에 흰 종이를 붙이고 문양을 그려 그 자리를 톱질로 잘라 장식을 만든다.

나무함에 상어 가죽을 가공해 씌우고 옻칠로 마감한 어피함.

나무함에 상어 가죽을 가공해 씌우고 옻칠로 마감한 어피함.

나무함에 상어 가죽을 가공해 씌우고 옻칠로 마감한 어피함.

만드는 이의 정성이 담긴 어피함은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만드는 이의 정성이 담긴 어피함은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만드는 이의 정성이 담긴 어피함은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가죽에 옻칠을 하면 벌어지는 일

칠피(漆皮)는 전통공예 중에서도 생소한 분야다. 웬만한 전통공예품은 이름은 생소해도 실물을 접하면 대부분 박물관이나 TV에서 접했던 기억이 떠오르지만, 칠피 공예 기술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기에 박물관에서도 관련 제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칠피는 한자 풀이 그대로 옻칠을 한 가죽. 옻의 주성분인 우루시올이 방부·방습·방열에 효과적이라 칠피로 만든 제품은 오래도록 제 모습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 소, 돼지, 양, 철갑상어와 거북 등 다양한 동물의 가죽을 활용했는데 가죽의 종류에 따라 질감과 무늬가 달라 가치도 달라진다.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는 칠피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부터 피전 공방이 성행했다는 기록이 있고,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다래(말안장 아래 늘어뜨리는 진흙받이)에는 자작나무에 옻칠한 가죽으로 마감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칠피로 제작한 보관함과 갑옷이 인기였다. 나무로 만든 기물에 가죽을 씌우고 옻칠로 마감해 아름답고 견고한 보관함을 만들었다. 일반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것은 칠피함으로 통칭하고, 생선 가죽으로 만든 것은 어피함, 황칠을 한 것은 황칠함으로 불렀다. 소가죽에 옻칠을 해서 제작한 갑옷은 조선시대 무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조선시대의 대표 갑옷은 서애 유성룡이 입은 것으로, 소가죽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오려서 여려 차례 옻칠을 한 후 다른 천에 배접하고 하나하나 이어 만들었다.

칠피 갑옷은 방수·방부 기능을 기본으로 탑재해 철편 갑옷보다 훨씬 가볍고 화살도 막을 정도로 견고해 최고의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문병이 사용했던 가죽 말안장(보물 제747호)은 소뼈로 매화 문양을 아름답게 박아 넣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 높은 가죽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그 이후의 칠피공예 작품이나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완전히 맥이 끊긴 칠피는 역사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것. 그런데 199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한 참가자가 칠피공예품을 출품하고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해 모두를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혼자만의 힘으로 칠피 기술을 익힌 박성규 장인. 이전까지 주목 받지 못했던 무명의 공예인은 이후 10년 동안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온갖 상을 휩쓸며 칠피공예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칠피함에 장식할 동물 가죽을 조각하는 박성규 장인.

칠피함에 장식할 동물 가죽을 조각하는 박성규 장인.

칠피함에 장식할 동물 가죽을 조각하는 박성규 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칠피 기술을 이수 받고 있는 딸 박선영 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칠피 기술을 이수 받고 있는 딸 박선영 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칠피 기술을 이수 받고 있는 딸 박선영 씨.

/upload/living/article/202104/thumb/47764-449372-sample.jpg

가죽을 전통 방식 그대로 석회질이나 잿물 등을 넣은 천연 혼합물에 담가 지방질을 빼고 말리면 딱딱했던 가죽이 부드러워진다. 사진은 가죽에 옻칠한 후 말리는 모습.

박물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유물이 바꾼 인생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칠피가 되살아난 건 박성규 장인 개인의 피땀어린 노력 덕분이다. 10대 후반부터 고향인 전북 익산의 나전칠기 공방에서 일을 배운 장인은 20대에 서울로 상경해 본격적으로 나전칠기 가구를 만들며 풍족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우연히 박물관에서 칠피공예품을 만나고 그 매력에 빠진 그는 안정된 직장과 풍요로움을 포기하고 칠피 기법을 복원하는 데 인생을 바쳤다. 사라진 공예 기법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특히 칠피의 핵심은 가죽이 갈라지거나 꺾이지 않게 옻 도료를 배합하는 것인데,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은 기법을 혼자 힘으로 복원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칠피 기법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장인은 1992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대한민국 기능전승자와 명장으로 인정받으며 칠피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장인의 작업실을 찾은 양태오 디자이너는 전통 칠기공예품을 접하고 복잡하고 섬세한 제작 과정을 직접 살펴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주전자에 옻칠을 하는 양태오 디자이너.

가죽으로 만든 주전자에 옻칠을 하는 양태오 디자이너.

가죽으로 만든 주전자에 옻칠을 하는 양태오 디자이너.

다양한 색깔의 옻칠 도료들.

다양한 색깔의 옻칠 도료들.

다양한 색깔의 옻칠 도료들.

작업실에 걸려있는 각종 칠도구들.

작업실에 걸려있는 각종 칠도구들.

작업실에 걸려있는 각종 칠도구들.

사라졌던 칠피 기법을 복원하셨는데, 어떻게 입문하시게 되었어요? 저는 원래 나전을 했는데 휴일에 갈 곳이 없으니까 박물관을 자주 구경 다녔어요. 어느 날 박물관에 새 유물이 보이는데 그게 가죽으로 만든 것이고 옻칠을 했더라고요. 원래 가죽은 약한 소재라 물이 닿으면 썩어서 없어지는데 그건 칠을 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던 거예요. 그걸 보니까 그동안 했던 나전하고 소재만 다르지 똑같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접 해보니까 어떠셨나요? 가죽에 칠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나무하고 가죽에 칠하는 방법이 완전 달라요. 나무는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코팅 형식으로 칠하는 것이라 그대로도 잘 유지되는데, 가죽은 움직이는 부분에 칠을 하면 자꾸 갈라지고 꺾이고 그러더라고요. 박물관에서 봤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칠피를 가르쳐주는 곳은 없고 해서, 구두를 만드는 지인에게서 가죽 다루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스승이 없어 전통 기술을 터득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책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박물관밖에 믿을 곳이 없었어요. 박물관에 계시는 분들께 옻칠과 가죽에 관한 문헌이 나오는 것마다 복사 좀 해달라고 부탁했죠. 어떤 흔적이라도 있으면 보고 복원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 박물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고마웠죠.

어려운 길을 혼자 개척하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칠피공예품은 우리 일상에서 많이 쓰였던 물건이었나요? 예전에는 흔한 물건이었다고 해요. 동물이 죽고 나면 가죽이 나오니까 그걸로 생활 도구를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로 옷을 담는 함으로도 쓰고, 중요한 소품을 넣어두기도 했죠. 예전에는 가죽 위에 옻칠 대신 기름을 먹여서 만들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칠피공예 명장이신데 어렵게 배우신 것들을 이제 누구에게 전수하나요? 그동안 찾아온 사람들이 좀 있긴 했어요. 옻칠을 배워가서 활동하는 분들도 있고요. 하지만 칠피공예를 이수 받겠다는 사람은 없었는데, 제 딸이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문화재 보존 처리를 공부하고 박물관에서 일하더니 이제 제 일을 물려받으려고 해요. 뒤를 이어서 제기 못 다한 걸 마무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마지막으로 칠피공예품이 일상에서 쓰임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점들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저희는 사실 기술자라 잘 파는 법도 모르고,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디자인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세상이 바뀐 만큼 마케팅도 잘해야 하는데 물건만 만드느라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아요. 물건을 만드는 건 잘하니까, 잘 파는 방법을 연구해야겠죠. 그래야 공예가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저는 아직도 어렵기만 하네요. 다행히 예올 같은 단체에서 후원도 해주시고, 딸아이가 전수 받고 있으니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질 거라고 믿어요.

/upload/living/article/202104/thumb/47764-449376-sample.jpg

서류를 보관하고 서재를 장식하는 오브제로 제격인 어피함.

3 / 10
/upload/living/article/202104/thumb/47764-449378-sample.jpg

가죽에 옻칠을 바르면 단단해지기 때문에 튼튼한 트레이로도 제작 가능하다. 장인의 딸 박선영 시가 만든 트레이는 다도를 즐길 때 활용하기 좋다.

가죽에 옻칠을 바르면 단단해지기 때문에 튼튼한 트레이로도 제작 가능하다. 장인의 딸 박선영 시가 만든 트레이는 다도를 즐길 때 활용하기 좋다.

어피함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어피함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은 테이블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어피함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어피함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은 테이블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어피함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는 데 유용하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어피함의 고급스러운 디자인은 테이블 위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쓸모를 찾아가는 여정

칠피공예의 장점은 가구에 가죽을 덧대고 옻칠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견고함이다. 가죽 고유의 질감과 패턴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자개를 붙이고 가죽에 압력을 가해 문양을 만들면서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제작 과정이 길고 복잡한 데다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거치기 때문에 칠피공예품은 대체로 가격이 높은 편이다.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가격대의 칠피공예픔은 과거의 디자인에 머물러 있는 제품이 많아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현실. 전통공예 장인을 후원하는 예올과 전시를 열어 칠피공예를 알리려는 노력도 기울여왔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젊은 소비자에게 쓸모를 인정받는 일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박성규 장인을 만나 칠피공예품의 제작 과정을 지켜본 양태오 디자이너는, 예의와 품격을 갖춘 물건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칠피공예품은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마음으로 치장한 물건으로 보여요.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공예 기법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상적이고, 손상되기 쉬운 소재에 옻칠을 해서 영원성을 부여한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죠.” 친환경 도료인 옻칠을 사용하는 것도 칠피의 큰 장점. 가죽을 손질하고 가구를 마감할 때 화학 가공이 필수조건인 요즘, 천년을 간다는 친환경 코팅제를 사용해 만든 칠피공예품은 앞으로 더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최근 들어 라이프스타일과 패션 분야에서 새로운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소재를 고민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칠피공예는 좋은 선택지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태오 디자이너의 제안대로 칠피공예는 새롭고 이로운 것을 찾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있다. 칠피공예를 배우고 있는 이수자인 박성규 장인의 딸 박선영 씨가 요즘 주력하는 제품은 친환경 옻칠 가죽 가방.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디자인과 견고함으로 젊은 세대에게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준비 중이다. 칠피공예라는 소중한 전통이 현대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쓸모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리빙센스>×디자이너 양태오×예올

‘내일의 공예 프로젝트’ 여덟 번째 이야기- 칠피 공예
<리빙센스>가 디자이너 양태오, 재단법인 예올과 함께 한국 전통공예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내일의 공예’ 프로젝트. 전통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는 일에 힘쓰는 단체 예올, 우리의 전통을 토대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동시대적 미감을 구축하고 있는 디자이너 양태오,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의 품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주는 매거진 <리빙센스>가 의기투합해서 한국의 전통공예 장인들을 찾아갑니다.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을 지키고 이어오는 장인을 만나 한국공예의 미래를 그려보고 그 현대적 쓰임을 구체화할 예정입니다. 소개된 공예품은 칠피아트 홈페이지(www.chilpicraft.com)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명맥이 끊긴 칠피공예가 한 사람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칠피공예 장인이 꿈꾸는 제2의 전성기는 어떤 모습일까?

CREDIT INFO

기획
심효진 기자
사진
김덕창, 정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