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STYLE MORE+

피서의 지혜

물놀이는 기본, 연꽃을 감상했으며 투호 놀이도 했다. 선조들의 피서법엔 더위를 애써 멀리하지 않는 지혜가 숨었다.

UpdatedOn June 24, 2022

3 / 10
/upload/ktx/article/202206/thumb/51251-490655-sample.jpg

 

1527년 7월 11일, 좌의정 정광필 등 대신들이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가자고 간청하자 중종 임금은 대번에 거절한다. “창덕궁은 습하다. 창경궁은 트였으므로 이곳에서 더위를 피하는 것이다. 처서를 지나 한랭해질 때 창덕궁으로 가겠다.” 그렇게 중종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옮김’이라는 피서(避暑)의 의미를 성실히 실천했다. 승정원 같은 국가기관이 멀어 불편하다는 신하와 더위 때문에 안 돌아간다는 임금의 밀고 당기기 현장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계가 더위를 식히는 오늘날과 달리 과거에는 거처를 옮긴 중종처럼 뭐라도 해야 했다.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은 1824년 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방법 ‘소서팔사’를 읊었다. 그중 몇몇을 소개하자면 ‘허각투호(虛閣投壺)’ ‘서지상하(西池賞荷)’ ‘동림청선(東林聽蟬)’. 빈 누각에서 투호 놀이를 하고, 서쪽 못에 핀 연꽃을 감상하고,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다. 그래 봤자 얼마나 시원해지겠느냐는 의구심은 거두고 상상한다. 홀로 선 누각이 고요한데 연꽃은 아리따우며 매미 소리 청량하다. 더위를 멀리한다기보다 더위 속에 파고들어 운치로 승화하는 정신이 고상하다.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지혜, 불평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기백, 즐길 줄 아는 격조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피서법이다.

그래도 땀은 흐른다. 더위가 운치로 변모되길 기다리는 동안 더위 먹는 경우야 비일비재했을 터. 선조들은 승화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한 직관적인 피서법도 개발했다. 기역 자도 모른다 하려거든 낫부터 놓아야 하듯, 당최 더위가 무엇이냐 말하기 위해선 도구가 필요하다. 부채와 죽부인, 모시나 삼베 옷을 비롯해 등나무 줄기를 엮어 적삼 밑에 착용하는 등등거리와 등토시를 만들어 몸에 바람이 잘 닿도록 했다.

도구로 통풍은 해결했고 다음은 물놀이. 음력 6월 보름은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인 유두절이다. 신라 시대부터 사람들은 이날 가족과 함께 시내와 계곡을 찾아 온종일 몸을 담그고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강에 들어가 헤엄치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진탕 놀다 강가에서 매운탕을 끓여 먹는 천렵(川獵) 역시 주로 서민이 행하던 물놀이였다. 첨벙 빠져 같이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양반은 발만 살짝 물에 넣는 탁족(濯足)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을 땐? 아무도 없는 깊숙한 산에 올라 상투를 풀고 옷을 모두 벗었다. 바람결에 목욕하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이라는 은밀한 풍속이었다.

가만히 앉아 리모컨만 누르면 더위가 식는 시대에 선조들의 피서법은 싱겁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나가서 홀로 감상하거나 함께 뛰노는 동안 옛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진짜 피서법은 아닐는지.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그것을 찾아 밖으로 나가 보자. 홀로여서 좋고 함께여서 또 좋은 더위 속으로, 이토록 신나는 여름 속으로 뛰어들어 보자.
 

3 / 10
/upload/ktx/article/202206/thumb/51251-490656-sample.jpg

 

<KTX매거진>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editor 김규보

RELATED STORIES

  • LIFE STYLE

    친절하고 안전한 기차역을 만듭니다

    승차권 발권부터 열차 탑승까지, 기차역 운영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한국철도공사 역운영처 역운영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 LIFE STYLE

    미술관 옆 다이닝

    아트부산과 부산비엔날레가 열리는 예술 도시 부산에서 미감과 미각을 두루 충족하는 다이닝 공간 세 곳을 찾았다.

  • LIFE STYLE

    목포에 즐거운 바람이 분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항구도시, 전남 목포가 담긴 굿즈를 모았다.

  • LIFE STYLE

    레일을 누비는 새로운 희망, KTX-청룡

    지난 4월, KTX 개통 20주년 기념식에서 신형 고속열차 KTX-청룡이 공개됐다. 한국 철도 기술을 집약한 고속열차 탄생에 힘을 쏟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 LIFE STYLE

    서촌이 그리는 색다른 한식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특별한 한식을 만끽한다. 서울 종로구 서촌의 퓨전 한식 음식점을 모았다.

MORE FROM KTX

  • CULTURE

    문화-전시·신간, 영상 콘텐츠·공연

  • TRAVEL

    남도의 초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남도맛기행’의 도시 나주와 광주가 초대장을 보냈다. 극진한 마중과 배웅이 기다렸다.

  • LIFE STYLE

    이달의 아이템

  • LIFE STYLE

    힐링폴링, 알찬 수원

    10월 수원화성에서 ‘힐링폴링’이라는 이름으로 축제 네 개가 열린다. 수원의 이야기를 알차게 담은 물품을 소개한다.

  • CULTURE

    작은 생물과 정을 나누는 ‘생물인’ 유튜버 정브르

    지난해 11월 <정브르의 곤충일기>를 펴낸 유튜버 정브르와 이야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