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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는 할 말이 많았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 편의 영화를 가슴에 품었다. 그 영화 속 배우의 눈빛도 품었다.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영화로 배우로서 성장했다. 한 편의 영화는 같은 영화였다. 한 남자는 박원상, 다른 남자는 이경영이다. 둘이 만났다

UpdatedOn December 02, 2012




이경영 크림색 터틀넥 니트·롱 코트·코듀로이 팬츠는 모두 꼬르넬리아니,
태슬 로퍼는 로크, 우산은 폭스 엄브렐러 by 커드 제품.

박원상  벨티드 롱 코트와 팬츠는 모두 꼬르넬리아니, 퍼 머플러는 동우모피, 슈즈는 미소페 제품.

 

"머리가 왜 그러냐?” 머리를 다듬는 박원상을 향해 이경영이 말한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박원상이 답한다. “오늘은 촬영 콘셉트가 특이한데?” “그동안엔 콘셉트가 아예 없었죠.” 이경영은 툭툭, 농담을 던진다. 박원상은 깍듯이 그 농담을 두 손으로 받는다. 이경영과 박원상은 그런 사이다. 일단, 함께 영화를 찍은 사이. 맞다. 둘은 <부러진 화살>에 이어 <남영동 1985>도 함께했다. 그것뿐일까? 박원상의 말과 행동엔 그 이상의 존경심이 깃들어 있다. 박원상은 이경영을 우러러보고, 이경영은 박원상을 존중한다.


이 둘 사이엔 <하얀 전쟁>이 있었다. 박원상에게 <하얀 전쟁>은 기억에 새겨진 영화였다. 그중에서 변진수를 맡은 이경영이 유독 도드라졌다. 그때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때 박원상은 직업 배우가 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배우 지망생으로서 이경영을 동경했다. 그 동경의 대상과 함께 연기한 거다. 박원상에게 이경영은 그런 존재다. 이경영도 박원상을 보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요. <하얀 전쟁>을 찍으러 갈 때 저는 작은 결심 비슷한 걸 했어요. (안)성기 형님에 대해서 ‘당신의 작은 거 하나라도 뺐겠다’고 했죠.” 이번 영화에선 이경영이 <하얀 전쟁>의 안성기 자리에 서 있었다. 젊은 이경영은 박원상이었다. 박원상은 그 설렘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형님의 눈을 보면서 연기하는 장면이 많았거든요. 이럴 수가!” 동경하는 상대와 함께 극을 이끌었다. 그 자체만으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부러진 화살> 땐 얼떨떨했다. 박원상이 그 당시를 설명한다. 갖고 싶던 로봇을, 하나가 아닌 세 개나 손에 쥔 아이의 표정이다. “<부러진 화살> 양수리 법정 세트에서 찍는데, 제 왼편에 안성기 선배님이 앉아 있었어요. 제가 변호인이었고. 재판석에는 이경영 선배님이 앉아 있고, 밖에선 모니터 앞에 정지영 감독님이 앉아 있는 거죠. 오, 이런 날이 오는구나!”


<남영동 1985>는 <부러진 화살>팀이 그대로 옮겨와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야만 제작할 수 있는 영화였다. 언론에는 노 개런티라고 나갔다. 하지만 노 개런티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흥행하면 수익을 공유한다. 박원상이 설명한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제작비에 한계가 있어요. 기존 영화 제작하듯 각자 개런티를 다 받으면, 정작 영화를 만들 제작비가 없어요. 그걸 다 공유해요. 이해해요. 이야기를 우리도 만들고 싶으니까. 그 대신 영화가 개봉해 수익이 생기면 합리적으로 나누자는 거죠. 이런 경우를 모든 영화에 대입할 순 없죠.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요.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는 서로 신뢰와 믿음이 없으면 찍을 수 없어요.”


한 편의 영화를 믿음과 신뢰로 만든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바보 취급당할 말이다. 어쩌면 둘은 바보일지 모른다. 단, 정지영 감독에 한해서다. 이경영도, 박원상도 동의한다. 정지영 감독이 구심점이 됐다고. 이경영이 말한다. “감독님이 살아오신, 또 영화감독으로 살아오신 모습에 대한 진정성이 있어요. 감독님과 작업한다는 것 자체에서 깨우침과 배움도 있고요. 우리가 치열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새롭게 바뀌어요.” <남영동 1985>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고 김근태 의원이 남영동에서 고문받은 일을 극화했다. 개봉 시기도 대선 직전이다. 영화는 영화다, 라고 해도 정치적인 프레임을 벗어나기 힘들다. 아니, 정치적인 프레임에 돌격하는 영화다. 민감하다. 말도 많고, (과거라면) 탈도 생길 영화다. 수많은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한다. 하지만 수많은 배우들이 민감한 영화에 출연하진 않는다. 이경영과 박원상은 출연했다. 그들에게도 민감한 부분은 민감하다. 하지만 둘은 정지영 감독의 생각에 동의했다. 정치적 성향은 문제되지 않았다. 이경영과 박원상은 다소 성향이 다르다. 아니, 성향을 밝히는 방식이 다르다. “저는 좀 좌쪽이죠. 이분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중도 좌파 정도는 되는 거 같아요.” 이경영의 말이다.

박원상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정말 그게 싫어요. 그렇지 않아도 나라가 나뉘어 있는데 그 절반의 땅덩어리 안에 살면서 자꾸 뭘 나누려고 하는지 정말 답답해요. 보수면 어떻고 진보면 어떻고, 좌면 우면 어때요. 가치가 뭔지, 상식만 지켜 나가면 보수도 진보도 각각 가치가 있겠죠.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면 돼요.” 박원상의 말을 종합하면, 그의 성향은 “행복한 일상”이다. 둘의 차이가 있더라도 하나는 같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 이 점에서 둘은 이견이 없다.


자꾸 인터뷰는 그 ‘해야만 하는 이야기’로 쏠렸다. 영화 이야기 말이다. 애초 둘을 만나기 전 에디터는 이렇게 다짐했다. 영화 얘기 말고 사는 이야기나 하자고. 두 배우와 잡담이나 하자고.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될 듯했다. 이경영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이제는 중년이 된 배우다. 박원상은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둘의 과거 후일담만 들어도 흥미로울 터였다. 하지만 에디터가 포기했다. 에디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그 둘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눌렸다. 그만큼 둘이 출연한 영화의 무게가 무거워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주도권을 둘에게 넘기기로 했다. 대신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한 편의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경영이 0.5초 후에 답한다. “그럼요.” 박원상이 그 말을 받는다. “맞아요. 당연히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요. 그게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 한 편으로 혼탁했던 사회가 갑자기 깨끗해진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죠.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기 위한 이유가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이야기가 공유되고, 동감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러면 점진적으로 사회가 개선되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분명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둘의 말에 공감한다. <남영동 1985>는 그럴 힘이 있는 영화일까? 둘은 진지하다. 진지한 사람의 말은 들어도 좋다. 이경영과 박원상은 믿는다. 에디터는, 믿기로 한다. 한 편의 영화가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출연한 배우를 변화시키는 건 좀 더 빠르다. 특히 사회까지 변화시킬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면 더욱. “바르게 살아야겠다.” 이경영이 말을 잇는다. “신념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용기 같은 걸 배우게 됐어요. 그동안 소극적이었고, 그렇다고 내일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이진 않겠지만, 내적으로 성숙해진 거 같아요.” 박원상도 동의한다. “저도 형님 말씀대로 그렇죠. 제가 43년, 형님 앞에서 살아온 연수를 이야기하는 건 우습지만, 43년을 어떤 모습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정지영 감독님을 만나서 올 한 해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라는 영화를 작업하면서, 제 안에는 분명히 얼마만큼 성장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굉장히 많은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둘은 영화에서 고문하고 받는 사람이다. 이경영은 고문기술자를 맡았다. 박원상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을 연기한다. 둘 다 역할은 다르지만, 느끼는 건 비슷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폭력의 무게에 몸서리쳤다. 고문 장면을 그대로 촬영한 까닭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연기가 아닌, 연기를 해야 했다. 이경영이 그때를 회상한다. “솔직히 내색하진 않았지만, 온몸이 녹아내리는 거 같았어요. 고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상대 배우가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까요. 가해자 입장의 다른 배우도 저와 같았을 거예요.” 이경영의 심정을 박원상도 이해한다. “현장에서 가해자 역할 하는 배우들은 이중의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어요. 가해자로 집중하는 에너지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상대 배우가 괜찮은지도 봐야 하니까요. 또 그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서도 안 되니까요.”


문득 재떨이를 보니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둘은 담배를 꽤 피운다. 인터뷰할 때 주거니받거니 번갈아 피웠다. 신나게 말하고, 더 신나게 듣다 보니 피운 담배가 이렇게 쌓인 것도 몰랐다. 그만큼 둘에게 이번 영화는 할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경영은 공백도 길었다. 최근에야 자주 보일 뿐이다. 한 인터뷰에선 “카메라가 그리웠다”고 말했다. 고팠을 거다. 이경영이 현장 얘기를 묻자 답한다. “이전에는 앞만 보고 달린 거 같아요. 그동안 공백기도 있었지만, 일이 너무 즐거워요. 연기를 다시 시작하는 설렘이 있고, 촬영장에 가는 게 소풍 가는 것처럼 좋아요. 설레고, 또 가고 싶고. 소풍의 의미로 영화가 다가와서 순수해진 거 같아요. 현장도 더 진정으로 즐기게 됐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영화까지 찍은 거다. 그것도 두 편이나 찍었다. 그에겐 신나는 일이다. 박원상도 과거의 떨림을 현실로 대면했으니 어련하겠나.
곧 <남영동 1985>는 개봉한다. 이경영은 빨리 지나갔으면 한다. 박원상은 선입견 없이 봐줬으면 한다. 어떤 마음이든 하나는 같다. 더 많은 사람이 봐주길 원한다는 점. 둘에게 이 영화는 여느 영화와 다르니까. 배우에겐 전환점이 되는 영화가 있다. 이경영의 표현으론, “배우를 자라게 하는 영화”다. <남영동 1985>는 둘에게 그런 영화다. 이경영은 지천명을 넘겼다. 박원상은 불혹을 넘겼다. ‘하늘의 명을 알 만한’ 남자와 ‘흔들리지 않을 만한’ 남자가 성장했다. 한 편의 영화가 사회는 몰라도, 확실히 배우는 변화시켰다. 그 영화를 만난 둘이 부러웠다. 둘의 성장이 부러웠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맺은 둘의 관계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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