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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바이러스로 죽지 않았다

‘로지’ 같은 가상인간이 계속 등장하지만, 정작 이들에게 관심 갖는 건 뉴스 기사와 미디어 광고뿐이다. 반면, 얼마 전 지하철 광고판을 점령했던 ‘우마무스메’ 캐릭터와 최근 세빛둥둥섬을 침몰시킨 ‘원신’ 게임의 압도적인 팬덤 규모를 보면, 2D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20대 남성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 보인다. 가상인간에겐 없고 2D 애니메이션 캐릭터에겐 있는 콘텐츠의 힘은 무엇일까.

UpdatedOn September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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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제인, 루시, 이솔, 여리지, 와이티, 애나 마치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한 구절처럼 요즘 미디어에선 이국(異國)적인 소녀들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SNS에 일상을 공유하고 뮤직비디오를 발표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라이브 홈쇼핑에까지 출연했다. 여느 인간 인플루언서와 다르지 않은 활동이지만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딥페이크(얼굴 합성 변조 기술)와 VFX(시각 특수효과)의 은총을 입어 탄생한 가상인간이다.

가상인간이란 개념은 낯설지 않다. 국내 가상인간의 할아버지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버 가수 아담을 1990년대 이미 우리는 만나봤다. 당시 아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인기가 무색하게 눈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항간에선 아담이 바이러스에 걸려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담을 죽인 건 바이러스 따위가 아닌 손익분기점이었다. 속된 말로 단가가 맞지 않았다. 당시 기술력으론 아담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는데, 개발사인 ‘아담 소프트’의 형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경영난에 시달린 ‘아담 프로젝트’는 결국 폐기됐고 아담소프트는 게임 개발사로 전환했지만 결국 2000년대 초반 파산하고 만다. 달리 말하면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아담의 인기가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최근 가상인간이 등장한 이유는 아담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기술 발전으로 가상인간을 작동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 가상인간은 격한 스케줄에도 결코 지치지 않으며 동료 연예인과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학폭 논란으로 은퇴할 일도 없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불만도 없는, 그간 연예 산업이 꿈꿔왔던 궁극의 아이돌인 셈이다.

일각에선 가상인간이 인간 스타의 자리를 위협할 거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점치기도 한다. ‘될 만한 새싹’을 끌어모아 적게는 수년, 많게는 10여 년을 육성해야 하는 기존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방정식과 비교하면 효율성 면에선 분명 가상인간이 앞서 있다. 트렌디한 외모를 갖추는 건 가상인간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스타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팬’을 최근의 가상인간에게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가상인간은 아직 아담에서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다. 정작 소구해야 할 대상인 팬들의 마음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덕질’을 채용 과정에 비유하자면 외모는 서류 면접 정도에 해당한다. 취향에 맞는 외모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이것만으로 스타는 완성되지 않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쉽다. 최애는 결코 1화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소구할 만한 이야기, 서사가 곁들여질 때 스타는 완성된다.

그렇다면 혹시 게임에서 가상인간이 활약할 여지는 없을까. 미형의 가상 캐릭터들에게 환장하는 듯 보이는 ‘오타쿠’니 공략이 쉬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게임 역시 가상인간에게 호락호락한 시장은 아니다. 오타쿠 게임, ‘서브컬처’ 게임이야말로 캐릭터들의 각축전이자 매력적인 서사가 집대성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전적으로 허구의 세상이다. 허구의 세상에선 사건 간의 인과관계만으로는 캐릭터가 실존한다고 느끼기 어렵다. 가짜가 진짜처럼 느껴지기 위해선 그럴싸한 세계관을 창조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수많은 배경 설명과 인물 심리, 세부 묘사로 점철된 일종의 역사서를 만드는 작업이다.

미소녀 경마 게임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는 매력적인 허구의 세계관을 창조해낸 좋은 예다. 이용자는 말과 미소녀를 반반씩 섞인 듯한 ‘우마무스메(말딸)’를 육성하는 트레이너가 돼야 한다. 전국의 뛰어난 우마무스메들이 모여 있는 트레센 학원 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다. 우마무스메를 직접 플레이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게 들릴 만한 설정이다.

실제 플레이에선 기괴함을 느끼기 어렵다. 극도로 세심한 배경 설정이 허구의 세계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드는 핍진성을 부여한다. 겉으로는 경마 게임의 형태를 취하지만 실제 이 게임을 작동시키는 중추는 뛰어난 캐릭터성이다. 캐릭터를 육성하는 동안 이용자는 왜 우마무스메가 트레센 학원에 오게 됐는지, 누구와 경쟁하는지 등 이야기를 자연스레 접하게 된다. 육성 중 우마무스메들은 끊임없이 트레이너(이용자)에게 말을 건다. 이용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우마무스메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연스레 우마무스메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내가 애정을 주고 동고동락을 함께한 파트너가 된다.

‘원신 둥둥섬’ 사건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얼마 전 서울 반포 한강공원 인근 ‘세빛섬’에서 열린 ‘원신 2022 여름축제’에는 무려 3만 명이 방문했다. 서브컬처 게임 코스프레 퍼레이를 보러 성인 남성이 구름 떼같이 모여들었다. 원신의 직업(Class)은 저마다 각자의 이름과 설정이 부여된 소녀들이다. 호요버스는 중국 회사지만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 정통한 게임사다. 매력적인 세계관, 캐릭터 없이는 이용자가 애정을 느낄 수 없음을 잘 파악하고 있다.

최근 가상인간에 대한 관심은 얼마나 진짜 같은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매력적인 진짜 아이돌이 즐비한 한국에서 가상인간이 얼마나 사람처럼 보이는지를 자랑하는 것이 팬심 자극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무리 진짜 같은들 매력적인 서사가 없다면 ‘덕심’은 자극되지 않는다. 역경과 고난, 퍼포먼스를 접하며 쌓인 설득력 있는 서사가 마음에 와닿았을 때 수천수만의 소년, 소녀에 불과했던 아이돌은 나에게로 와 유일한 최애가 된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가상인간은 결국 잘 만든 컴퓨터그래픽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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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정소진
Words 신진섭(게임 칼럼니스트)
Illustration 송철운

202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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