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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글'이 뭐길래?

요즘 매일 밤 에어팟을 끼고 외간 여자가 귀 청소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웬 청승인가 싶지만, ASMR 단골 소재인 데다가 알고리즘에 뜨는 영상들은 조회수도 수백만 회에 육박한다. 그 외에도 머리 빗어주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손바닥 스치는 소리, 보글보글 끓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를 듣는다. 변태도 아니고 이런 걸 왜 듣냐고? ‘팅글’ 때문이다. 성욕도 아니고, 단지 심리적인 만족감도 아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작은 쾌감. 도대체 이 감각의 정체는 뭘까?

UpdatedOn June 05, 2021


ASMR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잡념을 떨치거나 잠들기 위해서 듣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에는 이전 세대가 공부를 핑계로 듣던 심야 라디오 방송의 21세기 버전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ASMR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개발된 기술들이 VR과 결합되면서, 시각에만 국한되던 VR 체험의 영역을 넓히고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팅글’은 무엇인가? 팅글이라는 개념은 ASMR과는 조금 다르다. 뭔가 뇌리에 꽂히는 듯한 느낌 혹은 소름이 돋는 짜릿한 기분을 뜻하는 단어다. 대개는 뜻밖의 상황에서 지적인 깨달음이나 감각적인 만족을 경험할 때 사용한다. 어떤 천을 만졌는데 마음에 드는 촉감을 느꼈을 때,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예상 못했던 식감이나 향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때도 ‘팅글’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팅글을 느끼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어떤 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고, 누구는 어떤 노래의 반주를 들을 때마다 악기의 현을 누르던 연주자의 손가락이 코드를 바꾸며 긁는 잡음이 들릴 순간을 두근두근 기다린다. ASMR이 말 그대로 잡다한 소음들을 포괄한다면, 팅글은 그 ASMR 속에서 각자가 발견한 자기만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잡음에 끌리는 걸까? 잡음이 우리에게 팅글 경험을 주는 이유는 뭘까? 빛을 보려면 어둠이 필요하듯, 잡음의 힘을 알려면 그 잡음이 없는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1950년대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에서 시작했다는 ‘감각 박탈 실험’의 결과는 잡음이나 진동 같은 무의미한 감각 신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이 실험은 지극히 미국적인 방식으로 동양의 수행자들이 추구하던 바를 달성해보려던 의도로 시작됐다. 평소 우리 뇌를 피곤하게 만드는, 외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온갖 불필요한 정보로부터 뇌를 자유롭게 만들면 뇌가 능력을 100% 발휘해서 더 똑똑해지고 전에 깨닫지 못했던 의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외부의 감각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모든 촉각을 차단하기 위해서 가만히 힘을 빼고 누워 있으면 둥둥 떠 있을 수 있도록 염도를 조절한 물탱크에 사람을 집어넣었다. 외부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주는 흡음재로 그 물탱크와 실험실을 감쌌고, 조명은 물론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빛도 막았다. 특별하게 만들어진 수트를 입히고 안대와 헤드폰을 씌워서 물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감각 차단 시설은 한때 활발한 과학 연구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제작자들에게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기묘한 이야기>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사실 요즘도 이 기법은 꽤 인기 있다. 세상에 소개된 시점부터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정신적인 모험을 해보고 싶었던 유명인들이 이 장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파인만 같은 천재도 있고, 칼 루이스 같은 유명 운동선수도 있다. 지금도 미국 NBA 농구 스타 스테판 커리가 뇌의 완전한 휴식과 집중력 향상을 위해서 2주에 한 번씩 이 감각 차단 탱크의 21세기 버전을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어쨌든 당시 실험 결과는 흥미로웠다. 감각이 차단된 처음 몇 시간은 명상과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집중력이나 기억 능력도 좋아지며 정신도 맑아진다. 애초에 의도했던 깨달음의 경지를 경험하는 경우도 꽤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스테판 커리 같은 선수가 비싼 돈 들여가며 격주로 이 장비를 사용하겠지. 하지만 감각 박탈이 2~3시간을 넘어 6~7시간 혹은 하루 이틀 이상 길어지면 이상한 증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증상은 환각이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 자극이 완벽하게 차단된 사람들이 뭔가를 보기 시작하고, 귀로 들어오는 청각 자극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는데도 뭔가 소리가 들리는 거다. 벽이 울렁거리거나 테이블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기괴한 소음이나 이명이 들리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자극 차단이 길어질수록 뇌의 능력은 오히려 저하되기 시작한다. 처음 몇 시간은 집중력이 좋아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오히려 단 1분도 한 가지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다. 외부의 잡다한 자극에 대해 신경 끄고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라고 감각을 차단해줬더니 뇌가 없는 감각을 만들어가며 헛짓을 하더라는 거다. 마치 공부 열심히 하라고 좋은 컴퓨터 사줬더니 그걸로 게임만 하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이 실험은 뇌의 본성에 대해 분명한 사실을 하나 알려준다. 우리의 뇌에게 잡음은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필수 요소라는 점이다. 인간의 뇌에는 잡음으로부터 신호만 골라내는 신호감지 필터가 있다. 세상은 신호와 잡음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연은 잡음으로 가득하다. 캠핑을 해봤다면 자연 속에서 보내는 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알 거다. 벌레 소리, 야행성 새소리,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등, 포장되지 않은 길을 걸으면 우리는 흙과 모래, 돌과 식물들을 느낀다. 삶 역시 끊임없는 소음의 발원지다.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나로 인한 소음과 진동이 시작된다. 마룻바닥 위를 걸어갈 때도, 물을 컵에 따라 마실 때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아내고, 헤어 드라이어를 작동시키는 동안에도 소음과 진동은 계속된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소리와 진동을 유발한다. 산소와 질소와 각종 물질로 가득한 공기를 호흡하는 동안에도 소음과 진동은 발생한다. 물리적인 존재는 반드시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부딪치고 미끄러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건, 온갖 의도하지 않은 잡음과 진동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소음과 진동은 그러니까 삶과 존재의 증명이다. 지금까지 뇌는 언제나 잡음과 함께 들어오는 신호를 받아서 이를 분류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인공적인 환경이 점차 우리 주변을 채워가면서 그런 잡음의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온라인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대부분 시각 정보, 그것도 인위적으로 제작된 이미지나 텍스트들이다. 실물 사진들은 대부분 실물보다 더 뚜렷하게 필터를 거쳐 정돈되어 있으며,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배경 처리까지 되어 있다. 소리 역시 음향 장비를 통해 이미 잡음이 걸러진 상태다. 실물에 존재하던 시각적 청각적 노이즈들은 이미 한 번 이상 필터링된 상태다. 직접 요리할 때 뇌에 입력되는 감각들을 생각해보라. 도마와 식칼 소리, 식재료를 다듬으며 느끼는 촉감, 재료가 익어가며 변화하는 향기 등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 이런 감각은 전부 건너뛰고 오로지 조리된 음식의 감각만 받아들인다.

21세기의 가정에 비해 20세기의 생활 속에는 잡다한 감각들이 가득했다. 그만큼 뇌는 많은 잡음을 향유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어릴 적 상자에서 사과를 꺼낼 때의 촉감을 기억한다. 얇은 나무로 제작된 상자 속에 완충재 역할을 하는 쌀겨 속에 그 사과는 숨겨져 있었다. 사과를 하나 꺼낼 때마다 쌀겨가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가는 소리와 촉감을 느꼈다. 현대엔 많은 감각이 사라졌다. 요컨대 현대인의 뇌는 마일드하지만 만성적인 감각 박탈 상태를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태의 뇌라면 ASMR에서 팅글을 경험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혹시 ASMR에 갈증을 느낀다면 한번 구식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깔끔하게 가공된 환경에 사는 우리의 뇌는 가끔은 지저분하고 거친 날것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아마 한동안은 계속 그럴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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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예지
WORDS 장근영(심리학자)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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