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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봄이 진 후에

전 세계가 주목했던,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은 봄을 향한 홍콩의 열망은 지워졌다. 민주화에 실패한 도시는 어떻게 되는가. 희망이 꺼져버린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오랜 기간 홍콩에 거주한 한국인의 시선으로 봄을 잃은 홍콩의 풍경을 그린다.

UpdatedOn March 31, 2021


2월의 마지막 주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저녁을 먹었고, 누군가는 기르던 고양이 두 마리를 친구에게 보내며 작별을 고했고, 누군가는 앞으로 닥칠 시련 속에서 힘을 줄 문구를 타투로 새겼다. 이들은 홍콩의 민주 진영 정치인과 시민 리더 47명으로, 이틀 전 경찰로부터 기소 통보를 받고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인터넷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이들은 페이스북에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24세의 운동가 오웬 차우는 이렇게 썼다. “우리 앞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가왔고, 아마도 오래 이어질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그 너머의 희망이라든가 확신을 보는 일일 테지요.” 두려움을 넘어 이렇게 담백하게 확신에 대해 말할 수 있기까지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며, 뜨거웠던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2019년 6월, 범죄인 인도법이라는, 궁극적으로 홍콩의 독립적인 위치를 위협하는 법 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평화적으로 시작한 시위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맞으며 굴곡을 겪었다. 더 큰 누군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지키려는 일에 홍콩 밖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모멘텀을 갖고 6개월간 불타올랐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대규모 시위는 팬데믹을 맞으며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홍콩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무엇이 변했고, 앞으로 이 도시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가장 큰 변화는 지난 6월 베이징에서 발표한 ‘홍콩 국가보안법’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과 홍콩의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법적 처벌 대상으로 정의하는 이 법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 보였다. 홍콩은 더 이상 자유로운 도시가 아니라는 것.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누려온 홍콩은 이제 달라질 거라는 것.

같은 달, 시위의 슬로건 ‘Liberate Hong Kong, Revolution of Our Time(홍콩에 자유를. 우리 시대의 혁명)’이 적힌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온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국가 보안’이라는 개략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쓰인 이 법이 어떻게 현실에 적용될까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시민들은 당황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나씩 다양한 곳으로 제재의 손길이 번져갔다. 시위의 상징인 ‘레넌의 벽(시위 응원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벽. 체코 프라하에 있는 ‘존 레넌의 벽’에서 따온 이름이다)’이 대학 캠퍼스에서 철거되었고, 거리의 그라피티도 지워졌다. 시위를 보도해온 외국인 기자들의 비자 연장 신청이 거절되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육 개편을 통해 도덕 수업이나 철학 수업 같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기본 교육이 사라졌다.

예상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다가온 규제 앞에서 사람들은 주춤했지만, 곧 국가보안법 아래에서의 삶, ‘뉴 노멀’에 적응해갔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플래카드를 들고 소리 없는 시위를 하고, 기존의 SNS 계정을 삭제하고 익명의 계정으로 온라인 활동을 한다. 금지된 시위 슬로건 대신 동음이의어로 만들어진 새로운 슬로건을 쓰며 언어 유희를 보여준다.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로 잘 알려진 타블로이드지 <애플데일리>의 창립자인 지미 라이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판대의 신문을 모조리 사들이고,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면서 그를 지지하는 마음을 표했다. (며칠 내내 가판대의 <애플데일리>는 완판되었고, 모회사인 ‘넥스트 디지털’의 주가는 300%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상황은 참담하고 사람들의 두려움도 커지고 있다. 체포 릴레이는 이어지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종신형을 살 수도 있다. 현재 민주 진영의 리더 대부분이 수감 중이거나 해외에서 망명 중인 상황이다. 선거를 통해 한 발씩 변화를 만들어가려고 했던 시민들의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누군가는 ‘어차피 승산이 없었던 게임이 아니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들의 목소리가 진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믿었다.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2009년 10월,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으로 취업하면서 홍콩에 첫발을 내디뎠던 날을 기억한다. 후덥지근한 공기, 불쾌한 습도, 차갑고 무관심한 얼굴로 바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어쩐지 낯설고 다정하지 않은 이 도시가 묘하게 좋았다. 내가 원했던 조금 다른,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홍콩은 이렇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이 모인 도시다. 그래서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자연스러움 대신, 조금 과열된 열기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 <첨밀밀>은 중국의 서로 다른 도시에서 온 주인공 장만옥과 여명이 홍콩에서 치열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이민자의 이야기였다.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홍콩의 매력, 혼란스러움 속에서 지치지 않고 들끓는 열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삶의 다양한 층위에서 일어나는 변화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충격을 흡수하고 있다.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장을 보고, 공부를 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담담한 표면 아래에는 울렁이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과 체제에 대항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고, 시간이 걸렸고, 익숙한 무력감 대신 조금 무모한 용기를 택한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역사 안에 있다. 광주를 거쳐 1987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보며 홍콩 사람들은 희망을 읽는다. 동시에 홍콩의 지난 몇 년을 보며, 오늘의 태국과 미얀마 시민들은 군사 정부에 대항해 거리로 나갈 용기를 얻었다. 가능할 것 같지 않았던 것들을 희망할 용기 말이다. 세 나라는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달콤한 밀크티를 딴, ‘밀크티 동맹’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뭉쳐 서로의 시위 전략을 공유하며 뜨거운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MilkTeaAlliance)

우리나라 현대사를 책과 영화로 배워온 1980년대 생인 나에겐 ‘민주화’라거나 ‘혁명’이라는 관념적인 가치가 현실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한때는 현재진행형이었고, 지금의 순간 역시 언젠가는 역사가 될 것임을 말이다. 제일 마음이 아렸던 것은 세상을 아직 알기 전인 10대 아이들이 시대적 과업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듯, 의연하게 거리로 나와서 경찰과 대치하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역사는 쉽게 ‘실패’라거나 ‘성공’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일어나는 일임을 깨달았다. 전혀 답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 어떤 상황에선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그렇다.

“이렇게까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수감되던 날, 인터뷰에서 27세의 정치인 티파니 유엔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결과가 이렇다고 해서 그때 선택의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홍콩 사람으로서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래서 저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해요.” 그녀의 말에 담긴 초연함이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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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조진혁
WORDS 박소연(칼럼니스트)

2021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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