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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가 사랑한 영웅들 PART 2

포레스트

죽은 딸과의 재회를 위해 신이 되려 한 남자, TV 시리즈 <데브스>의 포레스트는 과연 지금 행복한지 물었다.

UpdatedOn March 22, 2021

나의 영웅은 누구인가. 창간 15주년 특집 기사 기획안을 받고 고민했다. 기획은 에디터들이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취향도 말투도 걸음걸이조차 서로 다른 에디터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만의 영웅을 꼽았고, 각 영웅의 면면에서는 그 에디터의 화보와 문체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기획은 현재 <아레나> 콘텐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추적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기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영접하고자 메일과 왓츠앱, 전화와 줌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영웅들과 접선했다. 영웅들은 단번에 인터뷰를 승낙하진 않았다. 바쁜 일정으로 인터뷰가 불가능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해 뒤늦게 답변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을 보면 섭외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평소 우리가 갈망했지만 만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옷으로 낭만을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무뚝뚝한 에디터의 감정을 뒤흔든 사진가, 독일 현대 미술을 이끄는 작가,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내는 영화감독,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정복한 최초의 인간 등 그들에겐 아직 묻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다. 기사는 9명의 실존 인물과 6명의 가상 인물 인터뷰로 구성된다. PARTⅠ에는 실존 인물들과의 감도 높은 대화와 사진이 담겼다. PARTⅡ는 만날 수는 없지만 에디터들이 큰 영향을 받은, 롤모델로 삼기도 한 인물들과의 가상 인터뷰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자아 형성의 토대를 찾아 방황하는 이들에게 <아레나> 창간 15주년 특집 인터뷰가 나침반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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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이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자동차 사고로 죽은 딸의 이름을 따서 만든 IT 회사 ‘어마야’의 대표다. 나의 실수로 일어난 것만 같은 그 사고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미래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비밀 프로젝트 ‘데브스’를 연인 케이티와 함께 만들었다. 우주 만물은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입증해 어마야의 죽음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

데브스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
엄청난 데이터 분석 능력을 가진 양자 컴퓨터를 사용한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어떤 물질이 가진 정보와 상태를 데이터화해 데브스에 입력하면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물질의 과거와 미래까지 볼 수 있다. 예수의 실제 목소리와 그가 못에 박히는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프랑스 수학자 라플라스의 주장처럼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가설에 기반해 생생한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만들었다. 하지만 금기시했던 미래를 보게 되면서 모든 일이 꼬여버렸다.

너무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그때 아내와 통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일찍 전화를 끊었더라면 어마야는 죽지 않았을까?

듣다 보니 당신은 스스로 신이 되기를 원한 것 같다. 막상 미래를 보게 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데브스를 외부에는 개발 부서(Devs.)로 설명했지만 사실 신을 의미하는 ‘Deus’의 철자 ‘u’를 로마 표기법인 ‘v’로 바꾼 거다. 내가 봐도 자만심이 넘쳤지. 결국 난 신만이 할 수 있다고 여긴 일을 해냈다. 수도 없이 미래를 시뮬레이션했고, 그때마다 릴리가 나를 죽이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만 말이다. 딸이 죽던 당시도 되돌려보며 다른 데이터를 입력해봤는데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데브스가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데브스도 내가 죽은 이후를 시뮬레이션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 같은 첨단 물리학은 철학과 맞닿아 있다. 이 드라마에서 던지는 질문도 결국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사내 연애 중이던 직원 릴리의 남자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물론 스파이였던 그가 데브스의 비밀을 알아채고 유출하려 했지만 그로 인해 릴리까지 휘말렸다. 릴리는 어떤 존재인가?
릴리라는 이름은 유대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자다. 성경의 이브라고 할 수 있지. 전지전능한 신은 자신이 창조한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몰랐을까? 그렇다면 이브는 자유의지를 실현했다고 봐야 한다. 직원 릴리 역시 결국에는 자유의지를 실현해 데브스가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데브스가 신이라면 릴리는 신앙을 깨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중우주를 만들었다.

결정론은 알겠는데 갑자기 다중우주는 또 무엇인가?
결국은 양자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결정론은 과거의 원인이 필연적인 미래의 결과를 도출하고, 모든 사건은 정해진 대로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탁자 위에 펜을 굴려보자. 이때 마찰력, 공기저항, 속도, 온도와 습도 등 정보를 알고 있다면 내가 굴린 펜이 어떤 궤도를 그리고 어디에서 멈출지 알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중우주론은 결과가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다중우주 분류법은 MIT 물리학과 교수 막스 테그마크가 <평행우주>라는 논문에서 제안한 4단계 분류법이다. 그중 3단계인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양자역학적 결정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우주로 갈라지고 있다. 그 안에 사는 우리는 그저 하나의 우주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에서 나는 어마야와 아직 행복하게 살고 있다.

결말에서 당신과 릴리는 죽은 후에 데브스가 창조한 시뮬레이션 속 세계로 들어간다. 그 안의 나머지 모든 사람은 그 시뮬레이션이 현실이라고 믿고 살고.
그렇다. 여기에서 마크 테그마크의 다중우주 분류법 중 4단계가 등장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라는 것. 영화 <매트릭스>도 같은 맥락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고 생각하는가? 단지 두뇌 작용으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면? 인간의 뇌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와 똑같은 전기 자극을 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과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이 느낄 수 있다. 진정한 현실은 시뮬레이션을 만든 그 우주, 단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시뮬레이션이며,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마야가 살아 있는 또 다른 시뮬레이션 우주는 현실과 차이가 없나? 죽음을 경험한 후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간 그곳에서는 행복한가?
당연한 소리. 여기의 나도 진짜 나이고, 죽은 나도 진짜 포레스트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론 머스크 역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 아닐 확률은 10억 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물론 그가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럼에도 시뮬레이션 이론은 현재 과학계에서 터무니없는 가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드라마 <데브스> 초반에 등장하는 단세포 생물의 미래 행동 예측은 지금도 실제로 가능한 기술이다. 자고로 기술은 발전한다. 아메바와 같은 생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도 예측 가능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 때문에 미리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지구상에 살아 있는 모든 인류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진실은 밝혀지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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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노현진
ILLUSTRATION 두원

2021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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