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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읽어볼게요

1990년대생 작가들이 자신이 태어난 해의 베스트셀러들을 다시 읽었다. 동시대의 시선이 지난 세기에 가닿을 때 발생하는 시차.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거나,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나.

UpdatedOn November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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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990

호주제 문제를 다룬 박완서의 중편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1990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거나 “사랑과 비즈니스에는 국경이 없다”고 분연히 외치던 대기업 총수의 자서전들 사이에서 남편이 미국에서 바람이 나 졸지에 빈털터리 이혼녀가 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박완서의 이 작품은 ‘아메리칸 드림’류의 서사가 누락시킨 시대의 공백을 메우는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회장님들의 글로벌 성공 신화와 더불어 평범한 서민 남성들의 성적 불안과 콤플렉스가 드러나는 소설 또한 유행했다는 사실이다. “뿌듯함을 넘어 일종의 포만감까지 주는 그들(서양인)의 아랫도리”에 중독된 첫사랑 여성을 총으로 쏴 죽이는 남성을 그린 이문열의 치정 연애 소설, 참전 후 성기능이 저하된 자신에게 아내로부터 “당신은 남들처럼 섹스에 몰두할 능력이 없나 보다”라는 치욕적인 소리를 들은 후 버림받는 남성의 이야기를 그린 안정효의 전쟁 소설 등이 바로 그렇다. 이때 여자들은 더 이상 성녀가 아니라 창녀로 표현되며 남자에게 모욕과 부담을 선사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비슷한 구도가 반복되는데, 여자 입장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다른 시각의 이야기가 보인다. 결혼을 약속한 상대와 뜨거운 초야를 치른 후 돌연 남자는 침대 맡의 십자가를 치우지 않았다며 여자에게 화를 낸다. “난 신앙은 없지만 저런 걸 보면 경건해지는 정도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라고. 저런 것이 내려다보는 데서 정사를 벌일 수 있는 당신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해”라며 남자는 노기등등해 곧장 옷을 입고 집을 나가버리고 여자는 황당해한다. 남자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자기에게 이해할 수 없는 죄책감까지 심어주려 하는지 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문하던 여자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아, 그만 그만…. 그 여자는 다시 어제의 착오점으로 돌아가려는 자신을 황급히 제어했다.”

그러나 그렇게 경건한 양심을 지녔던 남자는 임신한 여자친구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해버리고, 출산 소식을 알려온 여자를 야멸차게 떼어낸다. 미혼모가 된 여자는 교직 사회에서 퇴출당해 베이비시터 일을 하고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홀로 아들을 키운다. 더 기가 막힌 대목은 그렇게 아이의 친부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남자가, 자신의 아내가 딸만 낳고 자궁 수술을 받자 여자를 찾아와 아들을 내놓으라며 소송을 건 것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가정법원 조정위원으로 활동했던 박완서가 법원에 불려 나온 여자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구상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호주제 폐지에 대해 가장 열띤 토론이 일어나던 지면인 <여성신문>에서 연재되었고, 그해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 헌정 사상 대대적인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박완서 개인의 생애사 차원에서도 이 소설은 특별한 데가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박완서에게 ‘부계 가족의 부재’는 언제나 그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이자 작품의 중요한 테마였다.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에는 어머니가 전쟁 중 딸이 아닌 아들이 죽었다고 딸을 원망하며 산송장처럼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전쟁 중 죽은 오빠에 얽힌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반영돼 있다. 그리고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연재하기 전해인 1988년 박완서는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연달아 겪으며 집필 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아버지와 오빠, 남편과 아들까지 작가 박완서의 호주였던 남성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직후에 나온 소설인 셈이다. 박완서는 연재를 예고하며 다짐하듯 덧붙였다. “그 여자가 구호나 박제가 되지 않거늘, 나도 그 여자와 더불어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쓰겠다.”

호주제는 진작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2020년 가을 여성들은 ‘낙태죄’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또다시 낙태를 여성만의 문제로, ‘죄’의 문제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연인에게 낙태를 권하고, 친자를 버린 채 살다가 아들이 필요해지자 갑자기 친자 소송을 건 남자와 홀로 낳아 기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육법전서를 비롯해서 몇 가지 법률 서적”을 달달 읽으며 법원에 출두한 여자, 그 사이에 놓인 수고와 노력의 불균형함이 지금까지도 잔존하고 있다.

성애를 즐기는 여성을 두려워했던 1990년, 초음파를 통한 성별 감별이라는 최신 기술과 백말띠 여성은 드세다는 민간신앙이 만나 역사상 최악의 신생아 성비 불균형 수치를 기록한 1990년, 운이 좋게 그해에 무사히 태어나 그해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을 읽게 된 나는 소설 제목에 어쩐지 미묘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여자는 말한다. “저의 가장 찬란한 꿈이 뭔 줄 아세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남자로 내 아들을 키우는 것이죠.”

그런데 작가는 그 꿈에 대해 실컷 연설해놓고는 소설에 다소 아이러니한 제목을 붙였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라고. 감탄문 같기도 하고 반문 같기도 하다. 사회에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 같기도 하다. 그 꿈을 계속 열심히 꾸길 격려하는 것인지, 그런 꿈은 절대로 이룰 수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2020년에도 여성에게 ‘낙태죄’를 묻겠다니. 우리에겐 겨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신종 남자’보다는 더 나은 꿈을 꿀 권리가 있지 않은가.

WORDS 오은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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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

추석이었다. 전을 5천 장쯤 부치고 툴툴대던 나는 방에 들어와 이 책을 읽다 일어나 박수를 쳤다. 양귀자는 소설의 신이다. 이건 정말인지 여자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태어난 해에 쓰인 양귀자 작가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여성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뻔뻔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나는 책에 빨려듦과 동시에 작가가 숙련된 도살자처럼 욕망의 해체 쇼를 벌이는 솜씨에 깜짝 놀랐다. 매번 느끼지만, 시치미를 떼는 제스처도 없이 화자의 욕망을 밀어붙이는 작품은 취향과 상관없이 독자를 설득하는 힘을 지닌다. 주인공 강민주는 지성과 아름다움, 돈과 무술 실력까지 갖춘 20대 여성이다. 그는 여성단체에서 일하다가 가정폭력 사례를 접하고, 여자에게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 죄로 미남 톱스타 백승하를 납치한다. 이 애처가의 부드러운 껍질을 벗기면 더러운 똥이 나올 걸 기대하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백승하는 강민주가 예상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만 가벼운 반항을 했을 뿐 꾸준히 하오체를 쓰며 강민주를 존중한다. 두 사람은 매일 티타임을 가지며 정신적 교류를 나눈다. 감금돼 있는 동안 백승하가 그리워하는 건 아내가 아닌 아들이다. 아들 외에 그를 아프게 하는 건 (예상되는 바와 같이) 강민주뿐이다.

여기까지 봐도 ‘이래도 되나?’ 싶은 여성의 ‘웻드림’인데, ‘서브 남주’인 남기는 한술 더 뜬다. 그는 강민주의 어머니가 구해준 밑바닥 인생으로, 민주에게 반해 모든 것을 바친 남자다. 밥도 기가 막히게 잘하고(특기는 새우튀김이다), 커피도 잘 내리고, 민주의 말이라면 범죄도 묻지 않고 저지른다. 그러나 강민주는 자신만 따르는 ‘굶주린 야수(제가 쓴 거 아닙니다)’이자 ‘밤의 황제(진짜로요….)’인 남기를 북어처럼 패곤 한다. 급기야는 “날 사랑하지 마”라는 대사까지 친다. 누군가는 초반의 대찬 가부장제 고발이 뒤로 갈수록 약해진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애초에 강민주는 사상의 전사가 아니었다. 매 맞는 여자의 사례가 나열되지만 그뿐이다. 강민주는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다. 스스로 ‘세상을 초월한 존재’라고 말하는 강민주에게 그저 남자는 죽이고 싶은 존재고, 여자는 짜증나고 불쌍한 존재다.

백승하 납치가 여성주의적 실천의 의미가 있는지도 모호하다. 강민주의 목적이 백승하도 뻔한 남자임을 보여주고 환상을 박살내는 거라면, 털어서 먼지 안 날 거라는 판단이 선 순간 그를 보내줬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백승하를 데리고 있다. 이런 강민주의 행동은 그가 처음부터 백승하에게 반했었다고 하는 순간 이해된다. 강민주는 그 미끈한 얼굴이 역겹다고 하면서도 백승하의 속눈썹이나 저물녘 빛이 비껴 들어올 때 그의 옆모습을 정성껏 묘사한다. 나는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을 또 본 적이 있는데 바로 나다. 그리고 포스타입(아마추어 창작자의 플랫폼으로, 여성 독자가 주 타깃이다)의 ‘존잘님’(서브컬처 독자들이 추앙하는 작가)들, 기타 (허상)남자에 미친 여자들. 그렇게 강민주의 야심도, 작가의 야심도 통속이라는 늪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가?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했던 90년대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다’는 신인류도 등장했지만, <우묵배미의 사랑>에 나올 법한, 토 나오게 허름한 집에서 개 같은 ‘놈편’에게 맞으면서 어금니 꽉 깨물고 사는 여자들이 태반이었다. 이 책이 출간된 92년엔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가 나왔고, ‘김보은 사건’이 있었다. 남자가 예술과 외설이라는 논쟁을 즐기는 동안, 여자는 자신을 강간한 의붓아버지를 살해하고 감방에 갔다. 양귀자는 이 틈바구니에서 남성 폭력을 고발하는 한편, ‘그럼에도’ 현실을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여자를 위해 도련님과 머슴을 설정해주고 강민주라는 멋진 대리인도 만들어줬다. 마지막엔 ‘순백의 비단옷’을 입은 그를 희생시키며 영웅 비극의 애틋한 감미와 잘난 여자의 추락이라는 은밀한 희열도 맛보여줬다. 어떤 의미론 여성 독자야말로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임을 가장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강민주와 어머니 사이에 모녀 드라마도 있다. 어머니는 너는 특별하다는 언령으로 강민주를 조종한다. 강민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 보통이 아닌 테러리스트가 된다. 두 남자 사이에서 줄 타는 멜로와 모녀의 애증까지, 어떤 이념을 내세우지 않아도 이건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시대가 흐른다고 모녀의 애증 관계나, 나훈아와 남진, 2PM과 샤이니, 몬스타엑스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로 이분되는 여자의 취향은 바뀌지 않으니까 말이다. (클래식 네버 다이!)

그렇다고 남성 독자가 겁먹을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에 있으니까. 네이트판 보듯 혀를 차며 읽든, 두 남자가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 가슴이 웅장해지며 19금 버전으로 망상하든(제가 지금 뭐라고 했나요?), 강민주가 던지는 페미니즘적 의제를 논하든, 여자의 인기를 얻기 위해 백승하와 황남기를 분석하든 읽는 방법은 상관없다. 재미있으니까 손이 간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많은 얘기가 나온다. 그걸로 이 소설은 제 몫을 했다.

모든 것이 짤방이 되는 시대다. 독자는 텍스트가 아닌 자기 욕망을 읽는다. 독자는 욕망에 따라 읽고 원하는 부분을 찢어서 가지면 된다. 나는 그 편이 훨씬 재미있다고, 마땅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디오니소스가 그루피에게 몸이 찢기듯 갈가리 찢겨야 한다. 한 권의 책을 던지면 그 자리에 떨어진다. 그러나 종이는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문학은 단권의 프로파간다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WORDS 이희주(소설가, <환상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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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1993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문학 가운데 독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출판되자마자 1백 주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고, 출간된 지 2년 만에 무려 5백만 권 이상 팔렸다. 그토록 잘 팔렸던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1930년대 미국 앨라바마주의 한 마을, 백인 여성 마엘라는 흑인 남성 톰을 유혹하다 아버지에게 들키고, 화가 난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하려 했다며 톰을 고소한다. 그리고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가 톰의 변호를 맡는다. 소설의 화자 ‘스카웃’은 어린 여자아이로,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약 3년 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이 작품은 내가 태어난 해인 1993년,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인종차별을 다룬 작품이라는 점에서 당시 굉장한 주목을 받았지만, 현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좀 다르게 보인다. 우선, 억울한 흑인 노동자를 돕는 역할이 이상적인 백인 남성 인물에게 부여되었다는 점에서 백인중심주의적인 세계관과 선민적인 태도로부터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놀랍게도 여전히 ‘BLM’을 외쳐야 하는 세상이고, 인종차별 문제는 이전보다 복합적인 양상으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얼마 전 논쟁이 불거진 방송인 샘 오취리의 경우도 그러하다. 샘 오취리는 블랙 페이스 분장을 한 학생들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 비난 폭격을 받았다. 뒤이어 샘 오취리가 과거 방송에서 눈 찢기, 즉 동양인을 비하하는 포즈를 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차별 당사자가 차별을 행하는 모순은 비단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종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성차별을 할 수도 있는 것처럼.

톰이 아닌 마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법정에서 용의자 톰이 동석한 가운데 피해 여성 마엘라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장면을 보자. 변호사인 애티커스는 “저 사람이 증인을 강간한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 이 소설의 줄거리에서도 드러나듯 물론 톰은 무고하다. 하지만 톰이 무죄라는 사실은 우리가 독자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을 유혹해놓고 강간했다고 허위 주장하는 소설 속 마엘라의 캐릭터는 현실의 여성에 대한 혐오와 편견에서 기인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동시에 그러한 편견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좀 더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고 싶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어린 여자아이 ‘스카웃’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이 ‘스카웃’이라는 인물의 성장 서사로도 읽을 수 있다는 시각은 이미 연구된 바 있다(신영헌, <성장소설에서의 성(性)과 성장유형: 그 상관관계 연구>). 번역자 김욱동 또한 “스카웃에게 숙녀가 된다는 것은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잘할 줄 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카웃에게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숙녀가 되는 일이다”라며 스카웃의 성장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역시 ‘숙녀’라는 틀 안에서 아이의 성장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스카웃, 젬, 딜 세 어린이는 함께 놀지만 젬은 종종 스카웃을 “계집애”라고 하며 무시한다. 어느 날 밤, 에이브리 아저씨가 노상 방뇨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곧이어 둘이서 누가 더 멀리까지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지 시합을 벌이는 바람에 스카웃은 소외감을 느낀다. 스카웃이 느끼는 소외감은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닌 듯하다. 소년들은 스카웃에게 “천사 같은 꼬마 아가씨, 넌 따라올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래들리 집으로 침입하려는 오빠를 말리려 하자 “스카웃,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는데, 입을 다물고 있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정말로 넌 갈수록 계집애처럼 돼가는구나.” 그 말을 듣고 스카웃은 하는 수 없이 따라 나선다.

이 책은 왜 ‘앵무새 죽이기’일까? 애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공기총을 사주지만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려 한다. “난 네가 뒷마당에 나가 깡통이나 쏘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라. (…) 앵무새들은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뿐이지.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되는 거야.”

이는 약자에 대해 연민을 가지라는 교훈이 담겨 있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노예에 대한 예의’처럼 읽히기도 한다. ‘앵무새’는 소설에서 사회적 약자를 의미하는데, 이를테면 흑인이나 노동자 등이 포함된다. 즉,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예에게 최소한의 감사를 느끼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를 금지하는 애티커스의 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아마도 ‘자신은 절대 앵무새가 아니라는 확신’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백인 남성이면서 변호사인 애티커스는 ‘앵무새’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서 표상된다. 그렇지만 꼭 앵무새는 인간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까? 앵무새는 앵무새를 위해 노래하고 싶다. 아무것도 위하지 않고 노래할 수도 있다. 혹은 노래와 무관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앵무새에 대한 비유를 떠나, 그렇다면 앵무새 아닌 새는 죽는 게 당연한가? 어떠한 새도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거나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이유는 없는데. 나는 스카웃과 이런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

WORDS 조해주(시인,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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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1994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필생의 작품 <개미>를 접했다. 교실 뒤쪽에 자리 잡은 ‘학급 문고’에 겉표지가 벗겨진 채로 꽂혀 있던 양장본 종이의 그 부드러운 질감까지 나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그 책은 내가 태어난 1994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내가 난생처음 읽은 장편 SF 소설이었고, 지금도 꾸준히 인기 있는 스테디셀러이자, 1백만 부 넘게 팔린 책이다.

이 세상에서 개미는 이미 널리 알려진 조직적인 사회상에 더해서 개체 하나하나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개미와 인간, 두 지성체의 세상은 분리되어 있지만, 괴팍한 천재 과학자가 상호 통신이 가능한 통역기를 만들어내면서 두 세상의 교류가 일어난다. 좋게 말하면 공동체주의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제련된 전체주의 사회인 개미 세상은 작품에서 시종일관 우호적으로 묘사된다. 그에 반해 기술과 개체성을 앞세운 인간 세상은 어떤 정신적 타락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뉴에이지와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은 스스로 고립을 택하면서까지 개미와 교류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듯, <개미>는 내가 맨 처음 접한 장편 SF 소설이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대체 뭘 먹고 자라면 이런 상상을 하는지 궁금했다. 맨날 라타투이를 먹고 살아야 하나? 초등학생이던 내가 얼마나 감화됐냐면, 일기장에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그가 자기 책에서 틈만 나면 써먹는 매우 극단적인 신비주의 설정집의 이름이다. 담담하게 썼지만, 이것은 내 삶에서 가장 민망한 기억 중 하나다. 작가로 먹고살려면 이런 치부를 고백해야 한다.

덕분에 나는 SF 장르 전반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SF 소설 팬덤을 찾아 나섰다. 트위터도 없던 시기, 당시 SF 소설 팬덤 규모를 생각하면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처음 팬덤과 접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 ‘최애’ SF는 베르베르의 <개미>예요! <나무>도 정말 좋아하고요.” 아, 물론 그때 ‘최애’ 같은 단어는 쓰이지도 않았지만 대충 시적 허용이라고 생각해주시길.

돌아온 반응은 액체 헬륨처럼 차가웠다. 인터넷에서 만난 SF 소설 독자들은 베르베르를 증오했다. 그들은 합창했다. 그 프랑스인 대머리 작가의 모든 소설은 지나치게 자가 복제적이야. 너는 아직 초짜니까 대단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소재들, 사실은 그렇게 참신한 게 아니라 수십 년 전에 이미 뼛속 가장 깊은 골수까지 우려낸 거야. 그리고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심각한 신비주의를 보라고.

나는 고전 SF 소설을 읽어보았다. 정말로 즐겁게 읽은 작품도 있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도 만만찮게 많았다. 그런데 다시 베르베르 작품을 읽자니 그들이 한 말이 생각나서 손도 대기 싫었다. 내가 ‘수준 낮은 독자’라고 생각될 것 같았으니까.

그가 들은 비난이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르베르의 작품은 <개미> 이후로 꾸준히 밀도가 낮아졌다. 그의 소설은 한 말을 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을 곁들인 신비주의 사상은 온건히 말해서 당혹스럽다. 인간의 뇌는 우주와 동등하다든가, 정신적 성장을 통해서 말 그대로 신적인 존재로 거듭난다든가. 생각해보면 <개미>가 그렇게 잘 팔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90년대 특유의 세기말적인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비주의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너드’ 남성이 매력적인 금발 백인 여성과 지속해서 맺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어떤 의심을 하지 않기란 힘들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기 소재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참신한 소재라고 동네방네 자랑한 일이 없다. 또 그의 소설들은 재미있다. 강렬한 착상에 고유한 세계관, 빠른 호흡의 문체로 전개되는 그의 글은 페이지 터너다. <개미>는 가장 엄혹한 시선으로 보아도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 훌륭한 소설이다. 그 신묘한 판매량은 결코 허투루 얻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자가 복제적이면 뭐 어떤가! 모든 작가는 그 수준은 달라도 자가 복제 자체는 하게 되어 있다. 원래 잘 쓰면 한 주제를 평생 천착했다는 평을 듣고 못 쓰면 자가 복제했다는 평을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일부 팬덤의 잘못만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포장의 문제도 있었으니까. 베르베르의 소설이 SF 소설이라고 적극적으로 딱지가 붙는 경우는 드물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SF라는 단어가 붙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 SF 소설로 분류되면 판매량이 급락하는 것은 출판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SF와 베르베르를 분리하려 들기도 한다. 베르베르는 SF 소설답지 않게 허황되고 공상적인 면이 없다나? 그런 말을 들으면 애꿎은 작가에게 적대감이 생길 만도 하다. 그것도 오랫동안 ‘마이너’함으로 고통받은 팬덤에서는.

베르베르의 책 판매량이 한국 SF 소설의 성장을 좀 더 직접적으로 견인했다면 좋았을 텐데. SF 작가로서는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수 있는 기회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제 그럴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괜찮다. 이제 SF 문학 시장도 자라나고 있으니 베르베르가 받는 애꿎은 비난과 증오도 계속 줄어들 거다. 그때 SF 문학 독자는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 나로 따지자면 베르베르를 사랑했다가 증오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왜? 그는 지금도 매년 최소 한 권의 장편을 뽑아내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렇게 책이 많이 판매됐는데도 말이다. 나는 만약 해외의 특정 국가에서 내 책이 수백만 부씩 팔리면 모든 출판사의 연락을 당장 차단한 후, 그 국가의 언어를 배우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커다란 성취를 이뤄낸 다음에도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은 오직 진정 글쓰기를 사랑하는 완성된 영혼만이 해낼 수 있는 위업이다.

WORDS 심너울(SF 소설가,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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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예지
PHOTOGRAPHY 정재환

202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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