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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내려온 버버리

1백여 년 만에 버버리가 말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패션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을 내려놓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UpdatedOn October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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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트램 하나가 지나갔다. 북적대는 홍콩의 소호를 지나가는 트램은 영어 폰트 T와 B로 뒤덮여 있었고, 건너편에서 오는 트램 앞쪽에는 새로 바뀐 버버리(Burberry)의 광고가 보였다. 갑옷을 입고 말을 탄 기사의 모습 대신, 철로 위로 새로운 모노그램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버버리의 모습이었다.

버버리 디렉터 자리가 공식적으로 공석이 된 이후, 버버리의 ‘유산’을 이어받을 다음 타자는 누가 될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었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을 떠난 킴 존스(Kim Jones), 셀린느(Celine)를 떠난 피비 파일로(Phoebe Philo) 등이 언급됐다. 크리스토퍼 베일리(Christopher Bailey) 이후 버버리의 적임자를 다들 궁금해했다. 하지만 다소 충격적이게도, 버버리는 12년간 지방시(Givenchy)를 이끌었던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를 수장으로 삼았다. 현실적으로,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뒤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버버리는 차후 패션 산업 청사진은 ‘변화가 세상을 이끈다’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고상한 하이패션 브랜드인 지방시(Givenchy)와 스트리트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융합한 그 ‘티시’를 데려온 것이니까 말이다.

티시를 필두로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1901년 만들어진 버버리의 로고와 그 상징인 버버리 체크 패턴 대신, 라프 시몬스(Raf Simons)의 파트너 디자이너였던 피터 새빌 (Peter Saville)이 만들어낸 T와 B를 섞어낸 모노그램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이 모노그램과 함께, 역사적인 버버리의 기사 또한 산세리프(Sans Serif) 폰트로 대체했다. 앞으로는 버버리를 상징하는 개버딘 트렌치코트 속의 기사를 더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이 디비전(Joy Division)과 뉴 오더(New Order)의 전설적인 앨범 커버를 제작한 디자이너로 유명한 피터 새빌은 얼마 전 라프 시몬스와 함께 새로운 캘빈 클라인의 로고를 디자인했다. 새로운 메가폰을 잡은 라프 시몬스와 함께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오리지널리티’를 되살리고 브랜드 설립자와 패션 하우스의 취지를 나름대로 알린다는 의도를 밝혔다. 자신이 태어난 해에 설립된 캘빈 클라인의 아이덴티티를 책임지며 그만의 확장된 미니멀리즘 코드로 브랜드를 전개하고 있는 라프 시몬스도 로고 변화와 함께 브랜드의 근간을 다지고 있다.

피터 새빌은 이번 버버리와의 작업에서 브랜드의 상징성을 그 나름대로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는 브랜드 설립자인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의 이름을 딴 반복되는 T와 B 패턴으로 모노그램을 만들었다. 디자인 웹진 디진(Dezeen)과의 인터뷰에서 피터 새빌은 “이 새로운 로고가 헤리티지 브랜드인 버버리의 거대한 변화이며, 21세기에 역사적인 브랜드가 어떻게 문화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언급했다. 시대에 적응하는 것인지 혹은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행보인지는 버버리의 차후 행보와 시장의 반응이 결정하겠지만, 해당 방식의 리브랜딩은 어쨌든 꽤 역사적으로 잘 먹힌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 패션 하우스에서 리브랜딩을 가장 잘 써먹던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을 떠올려본다. 그만의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수단으로서 에디 슬리먼은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앞 단어를 떼내버렸다. 그 당시 기존 팬들의 반발이 심하긴 했지만, 생 로랑 파리(Saint Laurent Paris)의 성공적인 데뷔와 함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패션계의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 에디 슬리먼은 다시 한번 브랜드 로고를 건드린다. 전임자였던 피비 파일로(Phoebe Philo)의 유산을 전부 지우고 새로 시작하려는 듯, 셀린느(Celine)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프렌치 악센트를 지운 새로운 셀린느 ‘CELINE’의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다. 에디 슬리먼은 돌아오는 파리 패션 위크와 함께 그만의 셀린느를 보여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패션계에서 디자이너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일까? 혹은 디자이너를 바꾸는 행보만으론 부족하다는 패션계의 판단일까? 1990 S/S를 기점으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브랜드의 근간을 움직이는 행보가 잦아지고 있다. 드디어 하우스 브랜드의 디폴트 값을 건드려도 상관없는 시대가 된 것일지 모르겠다. 패션을 소비하는 주체들의 반작용보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전파하는 행보들이 눈에 더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주요 도시의 랜드마크들이 버버리의 모노그램으로 채워졌고, 메인 스토어인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의 버버리 스토어도 리뉴얼을 마치고 새 시작을 공표하고 있다. 과연 말에서 내려온 버버리의 모습이 패션계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 있을까? 이 흥미로운 변화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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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서동현
WORDS 김수호(패션 칼럼니스트)
ILLUSTRATOR HeyHoney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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