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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김지운

김지운은 느리다. 모든 것이 재빨리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서울의 일상 풍경과 대비되는 `유유자적`은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영화`라는 단어만 나오면 180도 변모한다. 가끔은 유순한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독기마저 감돌곤 한다. 그게 너무나도 신기하다는 거다.<br><br>[2008년 12월호]

UpdatedOn November 22, 2008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미안합니다. 말주변이 그다지 좋은 편이 못 되어서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아, 그렇군요. 제게 ‘르네상스 맨’이라는 별칭을 붙이는 건 지나친 과찬입니다. 이것저것 잡스러운 것들을 다양하게 좋아하는 취향을 갖고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전 기본적으로 백수 품성을 지녔다는 거예요. 책 읽고 싶으면 침대 위에서 빈둥거리고, 영화 보고 싶을 때는 극장엘 가고,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면 쉬엄쉬엄 야외로 나가는 삶이 곧 제 이상향입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 일주일에 영화 한 편, 이틀에 비디오 한 편씩 볼 수 있을 정도의 돈만 정기적으로 들어온다면 전 육십이 되더라도 기꺼이 백수의 삶을 선택할 겁니다.

맞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환쟁이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단 한마디로 그림을 금지시켰어요.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죠. 하지만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로맨티시스트였습니다. 지독한 영화광이었고 인문학에 두루 밝은 박학다식한 분이셨죠.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반면에 어머니는 대단히 현실적인 분이셨어요. 경제적으로는 무능력자에 가까운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셨죠. 제가 영화를 만들 때 제작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또는 쿨하거나 냉랭한 모습을 종종 노출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머니에게 이어받은 유전자 탓일 거라 생각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전 옷차림을 무척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명품’을 입어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요. 전 좋은 취향, 즉 훌륭한 테이스트를 갖춘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취향은 1차적으로는 옷차림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라이프스타일, 감수성, 촉각, 철학, 인문학적 지식까지 옷차림 안에 모두 녹아들기 마련이죠. 그래서 전 자신의 스타일을 정확히 알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사람을 존경하는 겁니다. 사실 평소에 수트를 즐겨 입지 않는 터라 오늘 촬영이 조금 불편하긴 합니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색다른 경험을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도 빈티지 스타일이 나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네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마음 편하게 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영화 만드는 걸 제외한 모든 일이 제게는 크나큰 스트레스로 받아들여집니다. 심지어 영화와 관련된 파티, 인터뷰, 각종 홍보 행사도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만든 영화가 폭삭 망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진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자괴감에 시달리다 보면 여기저기 미친 듯이 뛰어다닐 때가 종종 생기는 것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놈놈놈>은 마치 유희를 즐기듯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며 영화 만들기를 즐겼던 제게 이례적으로 큰 부담감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과연 앞으로 이 3명의 배우가 한 작품에 등장할 일이 또 있을까요? 더군다나 ‘만주 웨스턴’이라는 초유의 장르에 도전해 성공을 거둬야 한다는, 아니 최소한 나락으로 치닫는 한국 영화계에 폐를 끼치지는 말아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촬영 기간 내내 저를 압박했습니다. 그래도 투자 비용은 뽑았을 뿐 아니라 런던, 파리 등 여지껏 외국에서 줄줄이 개봉되고 있는 걸 보면 기본은 한 것 같아 한시름 놓고 있는 중입니다.

<반칙왕>을 촬영할 때부터 <체 게바라 평전>을 옆에 끼고 살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이상과 세계관도 물론 존중하지만 체 게바라만의 삶의 철학에 경의를 표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공이란 걸 거두고 나면 그 자리에 안주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그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직이라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볼리비아의 밀림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안정적이지만 퇴보할 수밖에 없는 삶 대신, 위험하더라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모험을 선택한 거죠. 제가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탐구하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릅니다. 만약 명예건, 물질이건 성공에 안주하게 된다면 이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여전히 <체 게바라 평전>을 새롭게 펼쳐 드는 이유입니다.”

Arena Says

김지운 감독과 처음 조우하는 순간 ‘이 남자, 꽤나 불친절한 타입이구나’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않는 건 기본,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채 주변만 휘 둘러보다가 금세 자신만의 상념에 빠지곤 하는 냉랭한 모습 앞에 말 한마디 붙이는 것조차 녹록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게 대화를 시작한 지 딱 5분 만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 날카로운 외모와는 달리 낯을 꽤 가리는 샤이 가이, 착한 남자에 가깝구나.’ 자연인 김지운은 유순하고, 누군가를 책임질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그런 남자라는 것이 그의 자평이다. 추우면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 입도 짧고, 하루 종일 에스프레소만 찾는 그런 남자라는 것. 하지만 ‘영화감독 김지운’은 어머니의 부고에도, 절친한 친우이자 평생 동료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도 절대 꺾이지 않는 강인한 근성을 표출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 김지운식 카리스마다.

Profile 연극배우와 연극 연출가를 거쳐 자작 시나리오 <조용한 가족>으로 1998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1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아이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코미디, 호러, 누아르 등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모색하는 탐구 정신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스타일 가이이기도 하다. 칸영화제에 초대받으며 2008년 최고의 화제작으로 부상한 만주 웨스턴 <놈놈놈>은 시체스영화제 최우수감독상과 하와이국제영화제 매버릭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도 해외 영화제의 초대 러시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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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보리
Retouching 신호준
Set Styling 노제향
Feature Editor 박지호
Fashion Editor 민병준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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