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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줄 아는 남자

주자학에서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끝까지 따지고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함을 이르는 말이다. 카드 돌려막기만 할 줄 알았던 에디터가 드디어 격물의 기술을 깨달았다.<br><br>[2006년 11월호]

UpdatedOn October 18, 2006

cooperation 크로노 스위스, 던힐 Photography 정재환 model 박만서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성범수

곤란했다. 가진 건 없는데 눈만 높아진 거다. 난 결국 거신병처럼 몰려오는 카드 영수증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카드빚 독촉 전화를 받는 것에 질려서인지 죄진 내가 되레 호통을 칠 정도였다. 내 몸은 이미 신용불량의 늪에 반쯤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제품을 구입할 때 정서적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바탕은 가격이다. 여자 친구한테 차여서, 시험에 떨어져 홧김에 정서적 마지노선을 넘거나 허영 때문에 경계선을 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나처럼 된다.
패션 에디터들은 고가 제품들과 친밀하다. 내가 패션 기자를 시작할 때는 촬영을 위해 협찬받은 제품들이 모두 내 것만 같았다. 촬영하고, 만지고, 걸쳐본다 해도 진정 내 것이 되려면 할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가의 제품들이 내 손에 잡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잘게 쪼개 카드로 구입하면 어떤 제품인들 못 사겠느냐만, 그게 ‘쥐약’이었다. 나눠 사면 만만해 보이고, 다 좋아 보이고 그렇게 거액을 투자해 제품에 대한 사랑을 질펀하게 뿌려대봤자 울리는 건 카드빚 연체 독촉 전화였으니까. 나는 신용불량자 명단에 등재될 뻔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처럼 소비를 모르던 사람이 패션 제품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갖게 되는 정신병임에 틀림없다. 볼수록 멋스러운 것도 많고, 그래서 자제력을 잃어버리는 그 질환 말이다. 이건 제품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눈이 없어 걸리는 병이다.
돈이 사방에서 날 옥죄는 상황에서도 ‘지름신’ 덕분에 확실히 배운 건 있다. 꽤 알아줄 만한 감식안이 생겼다는 거다. 권장하고 싶은 긍정적 방법은 아니지만 지르다 보면 감식안이 자연 발생한다. 신라면만 먹던 사람이 생생우동(약간 더 비싸다)이 처음 출시됐을 때 충격은 대단했다. 그러다 돼지 사골로 국물을 낸 일본식 생라면(신라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을 맛보면 라면의 신천지를 만난 것 같은 격정에 빠질 거다. 음식 맛을 제대로 알려면 다양한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 그래야만 정확한 기호를 찾을 수 있다. 일본 생라면보다 더 고가의 뭔가를 찾아 헤맬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신라면의 포지셔닝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시원하고 매운 라면이라는 단순무식한 평가만 받던 신라면의 맛은 라면의 제왕으로 인정할 정도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하늘에서 청양고추가 떨어지는, 아니 이것보다 더 환상적인 그림이 만화 <맛의 달인>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리게 될지니. 이런 현상은 돈 좀 투자해 이제껏 먹어본 라면들 덕분이다. 미시적 개념의 개안이긴 하지만 라면 맛에 있어선 당신은 감식할 수 있는 혀를 가지게 된 거다.
내가 시계를 좋아하게 된 건 스위스 시계 박람회를 두 번 다녀온 후부터지만 각 브랜드의 정체성과 아우라를 알게 된 건 결혼 예물로 받은 브라이틀링 내비타이머 월드를 가진 후부터다. 시계 담당 기자를 2년 넘게 해온 덕에 사람들은 내가 시계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무방어전 같은 접근 방식은 좋아하는 시계를 물어볼 때 여실히 드러났다. 난 그들이 들어본 적 없을 법한 글라슈테, 블랑팡, 유블로 같은 시계를 좋아하는 시계 목록에 올린다. 거들먹거림도 분위기에 한몫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는 시계의 이름을 언급하면 그들은 ‘역시 전문가’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손목에 한 번은 차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끝내주는 감식안을 가진 사람들은 낡아빠진 세이코에서도 참다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전자계산기가 달린 카시오 시계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가격은 나중 문제고, 그냥 어깨에 힘줄 때만 필요한 조건일 뿐이라는 걸, 그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게 시계를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생긴 건, 시계에 투자한 시간과 역사 덕분이다. 그 시작은 카파라는 정체불명의 시계부터였다. 그러다 대학 떨어지고 대성학원에 다닐 때 카시오의 전자계산기 시계를 사고 싶어 이삿짐센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후 스켈레톤 케이스의 스와치를 샀고, 군대 가기 전에 로마 교황 근위병처럼 보이고 싶어서 스위스 밀리터리의 스틸 브레이슬릿 시계를 구입했다. 그리고 스포티한 타이맥스 시계도 장만했다. 그게 또 당시 유행이었다. 한때 조지 W. 부시의 아버지 부시가 차고 다녔다며 매장 직원이 날 꾀었기 때문이다(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미국 대통령이 차는 시계라는 말에 그만 내 인생 최초로 발급한 카드로 긁어버렸다. 인기 광풍을 몰고온 엠포리오 아르마니 시계도 내 손목을 장식했다. 시계에 대한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가 시계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티쏘나 부로바 같은 시계는 생략하기로 하고 당당하게 뛰어넘어 태그호이어 포뮬러원을 사게 됐다. 크게 지르고 나니 가격에 비례해 만족감도 덩달아 상승했다. 하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결혼을 앞두고 인생 역전 혼수를 노리게 됐다. 언젠가는 갖고 말겠다던 브라이틀링의 내비타이머 월드를 노골적으로 바랐다. 결국 소원은 이루어졌다. 뭔가를 바랄 땐 일정량의 고통과 비난은 무시해야 한다. 친구들한테 ‘빨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내 욕심을 충족한 난 의기양양했다. 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어도 시계만 바라보면 모두 잊혀질 정도였으니까.
이제 내가 사야 할 시계의 마지막은 브레게다. 그렇게 생각하고 언젠간 사고 말 거라는 망발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만만찮은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거쳐온 브랜드들의 정체성이 브라이틀링을 갖게 되니 덩달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산 카시오 시계를 찾아 손목 위에 올려놓아봤다. 플라스틱 박스 안에 방치했기 때문에 러버밴드가 녹아버린 게 문제였지만 제법 초창기 세운상가 시절 밀수품의 희귀함을 아직도 뽐내고 있었다. 줄을 바꿔야겠다는 의욕이 날 흔들어댔다. 막강한 방수 기능의 스위스 밀리터리 시계는 바다로 나설 때 빠지지 않는 준비물이 됐다. 그렇게 끝간 데 모르고 전진 속공하던 내 고가 시계에 대한 물욕은 종막에 다다랐다. 드디어 시계에 대한 감식안이 생긴 거다. 친구가 10년 넘게 차고 있는 세이코 시계를 빼앗기 위해 현재 물밑 작업 중이다.
모든 물건에는 그만의 가치가 있다. 그게 빈센트&코라고 해도 그렇다. 극단적 사기 방식이 문제였지, 중국 무브먼트를 사용하고 디자인은 우리가 했다는 걸 밝히기만 했다면 동대문에서 잘 나가는 브랜드 중 하나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얘기지만 사기놀음에 속아 넘어간 사모님들은 묵직한 돈다발을 뿌릴 줄만 알았지 물건을 보는 눈은 전혀 없었던 거다. ‘김기사’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감식안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게 그들에게 자숙의 시간을 갖게 했다.
모든 소비에는 고민이 따라야 한다. 숙고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왜 내가 이 제품을 사려 했고, 어떤 결과로 다가올지 예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어울리고 좋고 나쁨을 분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헐떡이는 통장 잔고를 가지고 할부로 투자할 사람은 없을 거다. 싼 제품 중에도 좋은 제품이 많은데 말이다. 여자를 포장하고 있는 외모만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패션 제품들도 마찬가지다. 브랜드만 보고 사버린 토트백을 지금은 잘 들고 다니지 않는다. 우스운 건, 그 가방을 가지고 다닐 땐 차를 타고 나갈 때다. 도대체 너무 무거워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이미 그 가방이 무겁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게를 감수하고 사든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반쪽짜리 눈을 가진 내가 범한 뼈저린 실수였다.
어릴 땐 깡마른 여자를 원했다. 육중한 내 몸과는 반대로 마른 여자에게 끌렸다. 육욕을 좀 아는 내 친구는 뼈만 있는 여자와 섹스를 하면 뼈 소리가 난다고 한다(이건 확실히 과장이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부딪힐 때마다 아프고, 만져도 뼈가 느껴져 섬뜩할 때가 있다고 했다. 별 매력 없다며 내 환상의 수정을 강권했다. 내 이상형의 몸매를 지닌 여자와 관계 해본 적은 없다. 환상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지만 간접 경험인 포르노를 보면 알 것 같기도 하다. 포르노에 나오는 스타급 배우 중 거식증에 걸린 올슨 쌍둥이 같은 여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자는 섹스를 할 때 자기 몸무게의 3배를 견뎌낸다고는 하지만 내가 누르면 죽을지도 모르고,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다. 나랑 같이 걸으면 그녀는 더 말라 보이고, 난 더 뚱뚱해 보인다는 것도 문제일 테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걸릴 것이 너무 많다. 결혼한 내가 환상을 깨보겠다며 나설 수도 없고,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소비도 그렇게 고뇌의 순간 끝에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얻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이젠 존 롭의 구두, 브레게의 시계,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수트 같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눈에는 들어오지만 욕정을 품지는 않는다. 더 싼 가격의 브랜드 중에서도 만족스러운 제품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오라도 굉장하다. 능력만 된다면 고가의 제품을 사도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지나친 소비는 절대 안 된다. 감식안을 키우시라. 그것만이 패션의 지위가 급상승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현재적 삶에서 살아남을 길이다. 물건을 볼 때는 감성을, 구매 결정을 할 땐 이성을 존중하면 감식안의 맹아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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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peration 크로노 스위스, 던힐
Photography 정재환
model 박만서
ILLUSTRATION 장재훈
Editor 성범수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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