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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고픈 날

뜨끈하고 맵싸한 국물이면 게임 끝.

On December 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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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친구와 술을 마시던 날. 호기롭게 소주 한 병을 주문해 입에 술잔을 댄 순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체 어른들은 이걸 왜 맛있다고 돈을 주고 사먹나 싶을 정도로 알코올 향과 맛이 강렬했다. 소주에 호되게 데인 뒤, 무조건 맥주만 마셨다. 세월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독실한 소주파로 바뀌어 있었다. 자고로 술이란 몸과 마음이 힘들 때 가장 맛있는 법이다. 끔찍하던 소주 맛이 달게 느껴지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들이 겹겹이 쌓인 걸까. 새삼스레 되짚어보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떠오르는 일이 없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더니, 역시 옛말 틀린 게 없구나 싶다.

어쩌면 소주가 좋아진 계기는 힘든 순간들이 아닌, 맛깔나는 안주 덕분일 수도 있겠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직후에 뜨끈한 국물 한 숟갈을 먹으면 속이 시원하게 풀린다. 다행히 주변에 맥주파보다 소주파 친구가 많아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무조건 국물 요리를 고르곤 한다. 어묵탕, 김치찌개, 전골 등 수많은 국물 요리 중에서도 한동안 빠졌던 메뉴가 있으니, 바로 나가사키짬뽕이다. 중식당에서 흔히 접하는 빨간 짬뽕과는 달리 하얀색 국물이 특징인 짬뽕이다. 해물이 많아 시원하고 매운맛이 적당히 느껴져 칼칼한 그 맛이 최고다. 그렇다고 담백하기만 하면 술안주로는 탈락인데, 나가사키짬뽕은 구수하면서도 감칠맛까지 느껴져 자꾸만 손이 가고 술이 절로 들어간다. 또 자극적인 맛이 덜해 매운 술안주를 먹었을 때보다 위장도 편안하다. 그 전까지는 무조건 고춧가루 팍팍 넣은 매운 국물이 최고인 줄 알았건만. 이태원 골목 어디쯤 자리한 이자카야에서 나가사키짬뽕을 맛본 후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한때 매주 주말, 술을 함께 마시던 친구와 만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가사키짬뽕을 주문했다. 심지어 서로 어느 술집을 갈지 논의하다 블로그로 미리 메뉴를 살펴보고 나가사키짬뽕을 파는 곳이 아니면 그 식당은 제외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독하던 나가사키짬뽕를 향한 사랑도 사그라드는 때가 있으니, 바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날이다. 그때는 주꾸미볶음을 먹는다. 즐거운 술자리는 나가사키짬뽕, 힘든 날에는 주꾸미볶음을 찾는 식이다. 국물 없이도 소주를 거침없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메뉴다. 사실 낙지볶음이나 오징어볶음도 괜찮다. 주꾸미볶음은 망원동의 소문난양푼이주꾸미가 내 마음속 원픽이다. 프랜차이즈와 달리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게 매운맛이 일품이다. 지금은 망원동의 반대편으로 이사를 떠난 탓에 방문한 지 수년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그 맛이 그립다. 오징어볶음은 역시 논현동의 팔당닭발이 최고다. 상호명은 닭발집이지만 오징어볶음이 기가 막힌 집이다. 혀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자극적인 양념주꾸미를 먹으며 알딸딸해질 즈음, 어느새 힘들었던 감정도 사르르 풀어진다. 아마 누군가 나를 화나게 해도 주꾸미볶음과 소주 한 병 같이 먹는다면 다 용서할 수 있으리라. 마무리로 볶음밥까지 잊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2022년 12월호

2022년 12월호

에디터
하은정
사진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