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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⑨

도스토옙스키의 여인들

On February 06, 20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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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스크 역.

옴스크 역.

 

수용소에서 성경책을 도난당하기도

성경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도스토옙스키 관련 박물관에는 어디에나 오래된 당시의 성경책이 비치되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토볼스크에서 폰비지나로부터 받은 성경책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죽기 직전 아들에게 주었다.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도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당시 도스토옙스키에게 준 것과 똑같은, 182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판된 『신약성서』가 전시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아들 페쟈에게 준 그 성경은 모스크바 레닌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서 유형길에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로부터 지폐가 숨겨진 성경책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당시는 모든 출판물이 당국의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제반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감옥에 들어올 때 나는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왔다. 몰수될 위험 때문에 수중에는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숨겨 두었다. 즉, 감옥에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복음서의 표지에 몇 루블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속에 돈을 붙여 두었던 그 책은 내가 토볼스크에 있을 때, 감옥에서 10여 년의 형기를 보내며 같은 고통을 당하고,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오래전부터 형제로 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시베리아에는 '불행한 사람들'을 형제처럼 보살펴주고, 마치 친자식인 양 아무런 사심 없이 성스러울 정도로 그들을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기 일생의 사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언제나 그치지 않고 있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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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스크 시와 이르티시강.

옴스크 시와 이르티시강.


도스토옙스키는 수용소에 있을 때 성경책을 늘 베개 밑에 보관했다. 그 성경을 가지고 문맹의 젊은 죄수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수용소에서 성경책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이야기도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죄수들은 대개가 서로의 물건을 무던히도 훔쳐댔다. 거의 대부분의 죄수에게는 관급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자물쇠 달린 상자가 용인되고 있었는데, 이 상자라고 해서 안전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곳에 얼마나 재주 좋은 도둑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진심으로 충실했던(과장 없이 말하는 것이다) 한 죄수는 감옥 속에서 소유가 허락된 유일한 책인 성서를 내게서 훔쳐가 버렸다. 그는 바로 그날, 참회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그것을 그토록 오래 찾는 것이 가련해 보여 스스로 내게 자백을 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

수용소에서 허락된 유일한 책일 뿐만 아니라 최후의 비상금이 감춰져 있는 성경책을 도난당했으니 얼마나 난감하고 속이 상했겠는가. 도스토옙스키가 도난당한 성경책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 그 성경책을 훔친 자가 자신이 도둑질했음을 스스로 밝히고 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도스토옙스키와 가깝게 지내던 자였다. 그런 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 유형수들의 수용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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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도스토옙스키에게 동전을 주는 소녀. X. 카라진 1890년작. 우_ 도스토옙스키에게 동전을 주는 소녀. V. 도모가츠키 1956년작.

좌_도스토옙스키에게 동전을 주는 소녀. X. 카라진 1890년작. 우_ 도스토옙스키에게 동전을 주는 소녀. V. 도모가츠키 1956년작.

 

도스토옙스키, 어린 소녀의 적선을 받다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는 많은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 나오는 다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 두 장 걸려 있다.

"내가 감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나는 오전 작업을 마치고 호송병과 함께 혼자서 감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천사처럼 고운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한 어린 소녀가 자기 어머니와 함께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 모녀를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병사의 아내였던 과부였다. 젊은 병사였던 그 여자의 남편은 재판 계류 중 한 병원의 죄수 병동에서 죽었는데, 바로 그때 나도 그곳에 환자로 누워 있었다. 그 아내와 딸은 남편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러 와서는 두 사람 다 서럽게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보자 어린 소녀는 얼굴을 붉혔고,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인가를 소곤거리자 어머니는 멈춰 서서 보따리 속에 있는 4분의 1짜리 코페이카를 찾아내 소녀에게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내 뒤를 부리나케 쫓아와서는 "불행한 아저씨, 그리스도를 위해 한 푼 받으세요"라고, 내 앞으로 달려와 동전을 내 손에 쥐어주며 외쳤다. 내가 코페이카를 받자, 소녀는 무척이나 흡족해하며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이 코페이카 동전을 오래도록 소중히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의 집의 기록』)

두 장의 그림 중 사람이 크게 보이는 그림은 1956년에, 강변에서 여러 사람 중에 섞여서 소녀의 동전을 받는 그림은 이보다 오래전인 1890년에 그려진 것이다. 두 장의 그림 모두 도스토옙스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 책의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책에는 호송병과 둘이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그림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모습, 즉 어린아이의 적선을 받는 불쌍한 유형수의 모습이다. 유형수 도스토옙스키의 당시 모습은 이처럼 비참했다.

박물관에는 유형수들이 입던 옷들도 전시되어 있다. 유형수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여름옷에는 등에 검은색의 커다란 둥근 무늬가 찍혀 있고, 겨울 외투에는 등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모양의 흰색 천이 붙어 있다. 투박하고 허름한 겨울 외투는 3년에 한 번 새것으로 지급되었다고 한다. 모두 유리 안에 들어 있어서 빛이 반사되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사형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사형수용 모자 달린 흰 가운도 몇 벌 걸려 있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독서 모임에서 차르를 비판하는 내용의 비평가 벨린스키의 편지를 읽은 죄로 사형장까지 갔다가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사형수들은 처형당하기 직전 그런 흰색 가운을 입었던 모양이다. 죽으면 수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9세기 조선 중엽 철종 때 전함 팔라다호를 타고 우리나라 거문도에 왔던 러시아의 소설가 곤차로프(1812~1891)는 후일 그의 여행기 『전함 팔라다』(1858)에서 조선 사람이 입고 있는 흰옷을 수의 같다고 했다. 곤차로프는 "조선 사람들이 모두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맨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조선 사람이 흰빛을 신성하게 여기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백의민족임을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 때 흰옷은 항일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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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지하 특별 전시실 입구. 우_지하 전시실 내부.

좌_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의 지하 특별 전시실 입구. 우_지하 전시실 내부.

 

박물관의 지하 특별 전시실

네 번째 전시실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결혼한 첫 부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애인이었던 폴리나 수슬로바,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류보피, 페쟈 등 두 자녀, 형 미하일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태형이나 중노동을 피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마음 좋게 생긴 요새 사령관 알렉세이 데 그라베(1793~1864)의 사진도 이 전시실 앞쪽에 걸려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유럽 체재 중 들렀던 도시의 상징적인 건물들의 그림 또는 사진도 있고, 『죽음의 집의 기록』 『죄와 벌』 『백치』 등 작품의 초판본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 초판본이 진본인지 사본인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본 후에 다섯 번째 전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하 특별 전시실로 갔다. 이 전시실은 두 번째 전시실 바닥을 들어 올린 후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에 가기 전부터 박물관에 지하 특별 전시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곳이 내가 무심코 지나 온 두 번째 전시실 바닥 아래에 있는 줄은 몰랐다. 미리 이야기하지 않으면 평범한 바닥 아래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다.

나이 든 여직원이 바닥의 일부처럼 보이는 두 개의 작은 문을 열어젖히니 가파른 사다리가 나왔다. 안내를 하던 크세니아 양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의 공기가 으스스하다는 듯이 어깨를 감싸며 몸을 떠는 체를 했다. 내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전시물들이 기분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공간은 크지 않았다. 두 평 정도 될까? 이미 세 번째 전시실에서 보았던 막대 족쇄가 이곳에 두 개나 있었다. 그리고 쇠창살을 만들어 지하 벽에 붙여놓았다. 감옥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장식이다. 그리고 이마와 뺨에 낙인이 찍힌 죄수들의 사진 등 유형수들을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있었는데 보기에 섬했다. 그래서 지하 전시실에 따로 전시해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특별한 방문객들에게만 공개하는 곳이라고 크세니아 양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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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옴스크 거리

비 오는 옴스크 거리

 

시베리아에서 만난 금발의 미인, 첫 부인 마리야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 네 번째 전시실에 첫 번째 부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두 번째 부인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애인이었던 폴리나 수슬로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했는데, 도스토옙스키의 평전과 기타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은 다섯 명이다. 앞의 세 사람 외에 이름이 무척이나 긴 '안나 바실리예브나 코르빈-크루코프스카야'와 '마르따 브라운(파니니)'이라는 두 여인이 있다. 정식 결혼을 한 부인들 외에 전시실에 수슬로바의 사진을 걸어놓은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인생과 작품에 수슬로바가 끼진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첫 부인 마리야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수슬로바와 몇 달간 몰래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였으나 헤아리기 어려운 복잡하고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수슬로바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유부녀였던 마리야 이사예바를 만난 것은 그가 옴스크 수용소에서 4년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옴스크에서 동남쪽으로 700km가량 떨어진 세미팔라틴스크에서 사병으로 강제 군 복무를 할 때인 1854년이었다. 그는 1854년 2월 15일 출옥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과거 20대 초에 공병 학교를 나온 후 이미 장교로 복무했었지만 이번엔 사병으로 3월 2일 세미팔라틴스크 주둔 제7대대에 배속되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곳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사예프라는 하급 세무 관리 부부를 알게 되었다. 이사예프의 부인이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다.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를 알게 된 후 그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회에서 격리된 4년간의 기나긴 수용소 생활 후 갑자기 찾아온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리야도 도스토옙스키에게 관심을 보였다. 술주정뱅이 남편만 보다가 비록 유형수 출신이긴 해도 도시 출신의 소설가가 주변에 나타나자 그녀도 감정의 동요를 보였던 것이다.

사랑의 중재자 브랑겔 남작

도스토옙스키가 마리야에게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무렵인 1854년 11월 세미팔라틴스크에 젊은 귀족 브랑겔(알렉산드르 이고르비치 브랑겔, 1833~1915) 남작이 지방 검사로 부임했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독자였던 20대 초반의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보다 12살이나 아래였다. 그는 세미팔라틴스크 지방 검사로 임명될 때 이 지역에 과거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을 썼던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군 복무 중임을 알았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던 브랑겔 남작은 임지로 출발하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형 미하일을 만났고, 미하일로부터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낼 책과 여러 가지 물건을 받았다. 그것을 전달해주기 위해 부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다. 브랑겔은 후일 그의 회고록에서 도스토옙스키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내 방으로 들어온 도스토옙스키는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그는 쫑긋 세운 빨간 깃과 빨간 견장이 달린 병사용 외투를 입고 있었다. 병적이고 창백하며 시무룩한 표정의 얼굴은 주근깨로 덮여 있고, 밝은 금발은 짧게 깎여 있었다. 키는 보통 사람보다는 컸다. 잿빛의 푸른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습이 흡사 내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도스토예프스키1』, 콘스탄틴 모츨스키 지음, 김현택 옮김, 책세상, 2001)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의 키가 보통 사람보다는 컸다고 했는데, 도스토옙스키를 만났던 프랑스 작가 보귀에 등 다른 이들이 쓴 기록에는 대체로 조그만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두 번째 부인은 회고록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중키라고 썼다. 중간 정도의 키에 마른 상태라면 작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브랑겔 남작은 도스토옙스키와 가깝게 지냈다. 브랑겔이 사무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병영에서 일과를 마친 도스토옙스키가 집에 먼저 와 있을 때도 많았다. 브랑겔 남작은 자연스럽게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 사이의 일에 대해 알게 되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스토옙스키를 돕는다. 결국 그는 도스토엡스키의 첫 결혼에 혁혁한 공헌을 하게 된다. 후일 브랑겔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마리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는 서른 살이 넘은 여인이었다. 보통 키에 몹시 가냘프고 정열적이며 명랑한 성격의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고, 훌륭한 교양과 탐구하는 태도를 갖추었으며, 친절할 뿐 아니라 유달리 생기발랄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었다."


 

1 1850년대의 세미팔라틴스크. 2 1858년 강제 군 복무 끝 무렵의 도스토옙스키. 3 첫 부인 마리야 이사예바. 4 브랑겔 남작.



유부녀와의 불같은 사랑

마리야의 아버지는 이민 온 프랑스인의 아들이었다. 아스트라한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고도 하고 검역소의 소장으로 근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알렉산드르 이사예프라는 세미팔라틴스크 세관의 하급 관리와 결혼했다. 이사예프는 거의 알코올중독자에 가까웠으며 가정은 빈곤에 시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후일 두고두고 도스토옙스키를 힘들게 한 아들 파벨이 있었다. 당시엔 7~8세 정도였다.

1855년 봄, 이사예프가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동쪽으로 600km나 떨어진 쿠즈네츠크로 전근을 가게 되자, 그녀와 헤어지게 된 도스토옙스키는 엉엉 울었다고 브랑겔 남작은 회고했다. 마리야는 체념한 듯했다고 한다.

그해 5월, 브랑겔 남작은 이사예프 가족이 쿠즈네츠크로 떠날 때 송별 파티를 주선했다. 실은 도스토옙스키와 마리야를 만나도록 하기 위한 자리였다. 마차는 밤에 출발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브랑겔 남작은 이사예프의 가족을 마차로 수 킬로미터나 따라가며 배웅했다. 남작은 술에 취해 잠든 이사예프를 자기의 마차에 태웠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마차에 마리야와 함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가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이별을 고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둠 속에 멀어져가는 이사예프 가족의 마차를 말없이 쳐다보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마리야가 떠난 그날 밤 도스토옙스키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 후에도 그는 초조하게 파이프 담배만 빨아대고 음식도 잘 먹지 않아 체중도 줄어들었다. 브랑겔 남작은 마리야가 떠나간 후 낙담하여 유령처럼 변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두 사람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도스토옙스키는 세미팔라틴스크와 쿠즈네츠크 중간에 있는 드미예프에서 마리야와 만나기로 하고 브랑겔 남작과 함께 출발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의 병이 중해 갈 수 없다고 도스토옙스키에게 전갈을 보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세미팔라틴스크까지 300km를 28시간 만에 마차로 달려 돌아왔다. 도스토옙스키는 간질 발작으로 병세가 심각하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몰래 떠났다 돌아왔는데, 부대 내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사예프의 병이 중한 것은 사실이었다. 술로 인해 얻은 병이었다. 이사예프는 쿠즈네츠크로 간 지 몇 달 안 된 그해 1855년 8월 사망했다. 마리야는 남편의 장례를 위해 돈을 빌려야 할 처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브랑겔에게 마리야에게 돈을 좀 보내주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사예프가 병으로 죽자 도스토옙스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리야에게 청혼했으나 정작 결혼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미망인이 된 마리야가 자신의 청혼을 곧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않았다. 유형수 출신의 가난한 군인을 희망 있는 남편감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과부가 된 마리야 주변에는 중매쟁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1856년 봄쯤 마리야는 "관직에 근무하며 조건 좋은 연상의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지"를 묻는 편지를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냈다. '나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편지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같은 편지를 받은 후 1856년 3월 브랑겔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 주님, 이토록 끔찍하고 오싹한 감정을 뭇 사람에게 내리지 마소서. 사랑의 기쁨은 위대합니다. 하지만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 또한 대단합니다. (…) 나는 그녀에게 절망으로 가득 찬 끔찍한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보냈습니다. 불쌍한 나의 천사! 그렇지 않아도 아픈 그녀에게 고통을 더해 주다니! 편지로 그녀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당신을 잃느니 차라리 죽겠노라고 썼습니다. 협박과 애정 그리고 비열한 변명만 늘어놓았지요. (…) 그녀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합니다. 내 나이쯤 되면 사랑은 변덕이 아닙니다. 내 사랑은 2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열 달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 내 사랑은 오히려 강해졌습니다. 만약 나의 천사를 잃는다면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실성하거나 아니면 이르티시강에 뛰어들 것입니다."

험난했던 결혼 과정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필자의 책 『시베리아 문학 기행』을 기증하고 바이네르만 관장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2017년 10월 5일).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필자의 책 『시베리아 문학 기행』을 기증하고 바이네르만 관장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2017년 10월 5일).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필자의 책 『시베리아 문학 기행』을 기증하고 바이네르만 관장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2017년 10월 5일).

관직에 있다는 조건 좋은 연상의 남자 외에도 더 신경이 쓰이는 20대 젊은 경쟁자가 있었다. 베르구노프라는 젊은 톰스크 출신의 교사였다. 그는 당시 24세에 불과했다. 이사예프 가족이 쿠즈네츠크에 간 후 사귀게 되었는데, 마리야는 이 젊은 교사가 마음씨가 좋고 동정심이 많으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도스토옙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써 보내 그를 또 긴장시켰다.

1856년 초여름, 초조해진 도스토옙스키는 가까운 바르나울까지 갈 수 있는 출장 허가를 얻어, 몰래 쿠즈네츠크로 마리야를 만나러 갔다. 발각되면 처벌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는 쿠즈네츠크에서 마리야를 만났고, 이틀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세미팔라틴스크로 돌아온 도스토옙스키는 마리야의 마음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고 브랑겔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브랑겔 남작은 185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젊은 베르구노프보다 무언가 낫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마리야가 미망인에게 지급되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한 데 대해서, 브랑겔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 보조금을 빨리 보내주도록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돈을 기다리지 못해서 그만 결혼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오싹하다"라는, 마리야가 베르구노프와 재혼할까봐 초조해하는 심정이 그가 당시 브랑겔 남작에게 보낸 편지에 담겨 있다.

그래도 다행히 운은 좋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한 해 전인 1855년 가을,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승진된 데 이어 결혼 문제로 애를 태우던 그해 1856년 10월에는 장교 대우로 승진되었다. 조건이 한결 좋아지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인 덕에 도스토옙스키는 마침내 1857년 2월 6일 쿠즈네츠크에서 마리야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여곡절 끝의 승리였다. (다음 호에 계속)

<우먼센스>에서는 2018년 2월 16일부터 23일까지 7박8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겨울 바이칼 탐방 여행'을 비롯해 코카서스 3국 여행, 크림반도 여행,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실시되는 '러시아 문학 기행' 등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찾아보는 고품격 여행을 연중 실시한다. 여행은 바이칼BK투어(주)(02-1661-3585)가 주관하며 3월부터 매달 마지막 화요일 오후 3시에 여행 설명회 또는 여행 인문 강좌를 실시할 예정이다. 장소는 용산 서울문화사 별관 강당, 러시아 여행 프로그램은 <우먼센스> 2018년 2월호 92, 94쪽 참조.
[투어] 생생한 역사의 현장, 크림반도 8일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2월호

이달의 목차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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