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카카오 스토리 인스타그램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밴드 유튜브 페이스북

통합 검색

인기검색어

HOME > LIFESTYLE

LIFESTYLE

이정식의 러시아 문학 기행 ⑧

도스토옙스키의 이르티시강

옴스크 드라마 극장에서 ‘토볼스크 문’이 있는 이르티시 강가까지 멀지는 않았으나 가는 동안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토볼스크 문은 눈 내리는 이르티시 강변 언덕에 쓸쓸하게 서 있었다. 붉은색 지붕에 노랗고 하얀 벽을 가진 아담한 아치형 문이다.

On January 09, 2018

3 / 10
/upload/woman/article/201712/thumb/37139-275055-sample.jpg

이르티시 강변의 토볼스크 문.

이르티시 강변의 토볼스크 문.

 

눈 내리는 이르티시 강변에서

과거에는 문 좌우에 담장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문만 홀로 덜렁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 주변에는 오래된 벽돌 건물이 몇 채 서 있었다. 토볼스크 문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창고처럼 생긴 건물에 다가가니 건물의 쇠창살이 살벌하다. 굵은 쇠창살로도 모자라 창살 사이사이에 뾰족한 칼 모양의 작은 쇠들을 붙여놓았다. 죄수들이 머물던 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지옥문'으로 보였을 '토볼스크 문'

토볼스크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한 죄수들이 유형지인 옴스크로 가는 길에 경유하는 도시다. 옴스크와는 이르티시강으로 연결된다. 이르티시강은 알타이산맥에서 발원해 서시베리아를 남북으로 지나는 길이 4,248km의 긴 강이다.

죄수들은 토볼스크에서 배를 타고 옴스크로 올 때가 많았을 것이다. 뱃길이 이동 시간을 훨씬 단축시키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강변에 닿아 배에서 내려 언덕 뒤의 토볼스크 문을 지나 으스스한 쇠창살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이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마지막 도착지인 요새 안의 수용소로 가지 않았을까. 도스토옙스키도 이 문을 통해 수용소로 갔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혹한의 날씨 속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뚜껑 없는 마차를 타고 우랄산맥을 넘어와 토볼스크에 6일간 머물다가 옴스크로 왔다. 토볼스크에서 옴스크까지는 마차로 3일이 걸렸다. 성탄 바로 전날인 12월 2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옴스크에 도착한 것이 1월 11일이었다.

강물이 얼어붙는 1월이었으므로 죄수들을 실은 마차는 얼어붙은 평평한 강 위를 달렸을 것 같다. 울퉁불퉁한 육로로 가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수월했을 테니까. 지금은 하나의 구경거리요, 기념물로 남아 있지만 당시 죄수들 입장에서 보면 강변 위의 토볼스크 문이야말로 '지옥문'이었을 것이다. 토볼스크 문을 지나 언덕 끝으로 가니 강변의 모래사장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있었다. 눈은 더 거세졌다. 10월 초여서 아직 땅이 얼지 않아서인지 모래사장으로 내리는 눈은 쌓이지 않고 녹아버렸고, 인근의 나지막한 풀밭에 떨어진 눈만 파란 풀잎 위에 조금씩 쌓였다. 강폭은 넓지 않았다. 강 저편에 배가 한 척 지나가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급의 선박이었다. 강변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들이 있었고 갈매기도 몇 마리 날아다녔다.


 

1 눈 내리는 이르티시강 위로 배 한 척이 지나가고 있다. 2 토볼스크 문 옆 건물의 쇠창살. 
3 막대형 족쇄. 원통 모양의 것은 발목 보호용 가죽. 4 1862년에 발행된 『죽음의 집의 기록』.

 

'토볼스크 문'이 왜 옴스크에 있나?

왜 옴스크에 있는데 토볼스크 문이라고 하는지 잠시 설명해야겠다. 러시아는 땅이 커서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에서 제일 큰 기차역이 서울역이다. 그런데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기차역이 몇 군데 있는데 행선지별로 레닌그라드 역, 벨로루시 역, 야로슬라블 역 등 도착지의 이름을 붙인다.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그것이 더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옴스크에 토볼스크 문이 있는 것도 그렇게 이해하면 된다. 옴스크에 사는 사람이 토볼스크 문으로 가면 토볼스크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베리아의 중심 도시 이르쿠츠크에는 앙가라 강변에 모스크바 문이 우뚝 서 있다. 이 역시 모스크바 쪽으로 가는 문이라는 의미다. 모스크바 쪽에서 오는 사람도 강을 건너와 이 문을 통해 이르쿠츠크로 들어왔었다.

지금은 도로와 기차, 비행기가 발달하여 육지에서는 배를 이동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적지만, 19세기 말까지는 육로보다는 뱃길이 더 빨랐다. 토볼스크 문에서 수용소가 있는 요새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한다. '수용소'를 어떤 책에서는 '감방'으로도 번역하고 있는데, 당시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있던 곳은 감방이라고 하기보다는 수용소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도스토옙스키의 기록에 따르면 그곳은 방이 따로 있는 감방이 아니라 군대의 막사같이 나무로 만든 수용 시설이기 때문이다. 밤이면 밖에서 문이 잠겨 아침이 될 때까지 악취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잠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노동용 막대형 족쇄

다시 박물관 이야기로 돌아간다.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서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막대형 족쇄의 실물을 처음으로 봤다. 족쇄라면 흔히 발목과 발목 사이에 쇠사슬이 길게 연결된 형태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족쇄는 몇 번 보았다. 이르쿠츠크의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인 트루베츠코이의 집에도 있고, 사할린의 안톤 체호프 박물관에도 있었다.

그런데 옴스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서 실물로 처음 본 이 막대형 족쇄는 그것을 차고 노동을 하고 잠을 자며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노동하기에는 이것이 편했다고 한다.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 나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수용소에 들어온) 처음 3일 동안 나는 노역에 나가지 않았는데, 여독을 풀게 하기 위해 모든 신참자들은 이렇게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 나는 족쇄를 갈기 위하여 감옥 밖으로 나가야만 했는데, 내 족쇄는 정식의 것이 아니라 고리가 달려 죄수들이 '작은 소리'라고 부르는 겉에 차는 족쇄였다. 노역에 편리하도록 만든 정식 감옥 족쇄는 고리 사슬이 아니라 거의 손가락만 한 굵기의 철선 네 가닥을 서로 세 개의 고리로 연결시켜놓은 것으로, 그것들은 바지 밑에 차게 되어 있었다. 혁대는 중간의 고리에 매게 되어 있어서, 이번에는 그것을 루바쉬까(헐렁한 긴 소매의 러시아 남성용 전통 상의) 셔츠 위에 직접 입는 허리 혁대에 고정시켜야 했다. (『죽음의 집의 기록』, 44쪽,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여기에서는 막대형 족쇄의 철선이 '손가락 굵기'라고 했다. 실제 새끼손가락 굵기 정도 되었다. 옴스크 박물관에서 본 그러한 족쇄는 세 개였다. 어떤 것은 네모진 막대형이었고, 둥근 막대형도 있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으니 사람마다 족쇄의 길이도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무게는 4kg이라고 했다. 사슬로 연결된 족쇄는 대개 12kg 정도다. 보통 족쇄에 비하면 훨씬 가볍다. 그래서 일하기 편했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3 / 10
/upload/woman/article/201712/thumb/37139-275057-sample.jpg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이동 경로.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이동 경로.

 

데카브리스트 부인 두 사람의 초상화가 있는 이유

옴스크 박물관의 세 번째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익은 초상화가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부인인 폰비지나의 초상화다. 그리고 그 옆에 또 한 여인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데카브리스트 부인 안넨코바의 것이라고 적혀 있다. 안넨코바의 초상화는 내가 이르쿠츠크 등에서 11명의 데카브리스트 부인 초상화 속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다소 눈에 설었던 모양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1850년 1월 경유지 토볼스크에 도착했을 때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가 10루블짜리 지폐가 표지 아래 꿰매진 성경책을 준 것과, 그 자리에 다른 데카브리스트 부인이 같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함께 있던 사람이 안넨코바라는 사실은 옴스크 박물관의 초상화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것이 옴스크 박물관에 두 여인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이유였다.

옴스크에서 돌아온 직후 일본 작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가 1939년에 쓴 『도스토옙스키의 생활』을 접했다. 여기에는 도스토옙스키가 4년의 형기를 끝내고 나서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가 인용되어 있었다. 한겨울에 족쇄를 차고 시베리아 유형지로 갈 때의 이야기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1892~1982)가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1931)보다 더 길게 도스토옙스키의 편지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 뒤에 도스토옙스키가 토볼스크에서 만난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페테르부르크, 노브고로드, 야로슬라블, 기타 여러 지방의 황량한 토지를 지나왔어요. 눈에 들어온 것은 드문드문 떨어진 이름 모를 외진 마을뿐입니다. 그러나 휴일(*크리스마스 휴일 기간의 의미)이었던 덕분에 어디를 가더라도 먹고 마실 것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옷을 많이 입고 있었지만, 굉장한 추위였어요.

썰매 위에서 열 시간 이상 움직이지 않고 하루에 대여섯 개 역참을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형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겁니다. 추위로 제 심장까지 얼어붙어서 따뜻한 방에 들어갔는데도 몸이 훈훈해지지 않을 정도였어요. 페름은 영하 40℃나 됐던 밤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추천할 만한 것이 못 되네요. 유쾌한 일이 아니에요.

우랄산맥을 넘어갈 때는 참혹한 상황이었습니다. 눈보라로 말도 썰매도 눈에 파묻혔습니다. 한밤중이었는데 우리는 썰매에서 내려 눈 속에서 누군가 우리를 끌어내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럽 국경에 서서, 주위는 눈과 폭풍, 앞길은 시베리아와 우리들 미래의 미스터리, 뒤는 우리들 과거 일체. 정말 슬펐어요. 저는 울었습니다.

여행 기간 내내 어디를 가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구경했습니다. 역참마다 족쇄를 차고 있는데도 세 배나 비싼 돈을 지불했어요. 그러나, 쿠즈마 프로코히예비치가 우리들 비용의 절반을 부담했습니다. 굳이 지불하겠다면서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저희는 각자 15루블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1850년 1월 11일 토볼스크에 도착했습니다. 담당자에게 인계되고 신체검사를 받고, 갖고 있던 돈은 남김없이 뺏겼습니다. 저와 두로프 그리고 야스트르젬브스키는 별관 방으로 들어갔으나, 스베슈네프라는 동지는 다른 방으로 갔기 때문에 거의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어요.

토볼스크에서 보낸 6일간의 일들, 제가 받았던 인상을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만두겠습니다. 동정과 연민에 휩싸여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이렇게는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기존의 유형자들(유형자들이라고 해도 특히 그들의 부인들이었습니다만)은 마치 육친처럼 저희를 보살펴주었어요. 모두 25년간의 불행을 가만히 참아온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정말 잠시 만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음식과 옷을 받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침 필요한 옷조차 없이 왔기 때문에, 부인들의 정성 어린 옷을 굉장히 기쁘게 받았습니다. 드디어 출발하게 되었어요. 3일 후 옴스크에 도착했습니다.

이상은 1854년 2월 22일 옴스크에서 형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평범한 서술에는 도스토옙스키의 부드러운 마음씨가 참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이상한 경험을 이리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편지 글 중에, 유형자라는 것은 데카브리스트를 가리켰던 것인데, 당시 데카브리스트들은 이미 형기를 마쳤지만 여전히 경찰의 감시하에 시베리아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작가 일기>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 등이 면회했던 사람은, 무라비요프 부인, 안넨코프 부인과 그 딸, 폰비진 부인 등으로, 그가 감옥에서 탐독했던 성서는 그녀들의 선물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생활』, 고바야시 히데오, 잡지 <문학계> 1935년 1월호~1937년 3월호에 연재, 1939년 5월 창원사 단행본 발행, 상기 번역의 원문 출처 『고바야시 히데오 전집 제6권 도스토옙스키의 생활』은 신조사에서 발행한 2011년 판이며 이은선 번역)

도스토옙스키가 옴스크에서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을 만난 것은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실패로 끝난 지 25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났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네 살에 불과했다. 이 부인들은 나이로 볼 때 거의 어머니뻘이다. 세 사람의 부인 가운데 무라비요프 부인은 당초에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갔던 그 부인이 아닌 것 같다. 데카브리스트 부인 11명 가운데 한 사람인 무라비요프 부인, 알렉산드라 그리고리예브나 무라비요바(1804~1832)는 1827년 남편을 찾아 시베리아에 왔다가 5년 만인 1832년 공장 도시 페트롭스키 자보드에서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무라비요프 부인이라면 재혼한 부인이거나 또 다른 사람일 수 있다. 그래서 박물관에 두 사람의 사진만 걸어놓았는지 모르겠다.

3 / 10
/upload/woman/article/201712/thumb/37139-275058-sample.jpg

 

_옴스크 드라마 극장. _55세 때의 도스토옙스키(1876년).

3 / 10
/upload/woman/article/201712/thumb/37139-275059-sample.jpg

 

1 박물관에 걸려 있는 두 데카브리스트 부인의 초상화. 왼쪽은 폰비지나, 오른쪽은 안넨코바. 2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길에 데카브리스트 부인 폰비지나로부터 받았던 성경과 같은 연도에 나온 성경. 3 옴스크의 도스토옙스키 동상.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칭송

데카브리스트 부인'이란 1825년 12월 전체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기치로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귀족(*이들을 데카브리스트라고 하며 '12월 당원'으로도 번역한다)의 부인들 가운데 귀족 신분을 버리고 시베리아로 남편을 찾아가 평생 헌신한 여인들을 말한다.

이들 가운데 폰비지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자신들의 남편과 같은 정치범들이 토볼스크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약간의 먹을 것과 의복, 성경책을 챙겨 들고 나섰던 것인데 이 정치범 가운데 도스토옙스키가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길에 폰비지나 등 데카브리스트 부인들을 만난 지 23년 후 <작가 일기> 1873년 2월호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3 / 10
/upload/woman/article/201712/thumb/37139-275054-sample.jpg

시베리아 대평원의 자작나무 숲이 있는 가을 풍경.

시베리아 대평원의 자작나무 숲이 있는 가을 풍경.

 

위대한 수난자들

토볼스크에서 우리가 앞으로의 숙명을 기다리며 감옥의 호송 마당에 앉아 있을 때, 12월 당원의 부인들이 간수들을 설득해 결국 그의 아파트에서 우리와의 비밀 만남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의 남편을 따라 자원해서 시베리아로 온 이들 위대한 수난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영예도 재산도, 지인과 일가친척도 버리고 고귀한 윤리적 의미와 고도의 자유 의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그 긴 세월 25년 동안 죄수 남편들이 겪은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만남은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떠날 우리를 축복해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성호를 그어주고 감옥 안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복음서를 나눠주었다. 그 책은 유형 중 4년간 나의 베개 밑에 놓여 있었다. 나는 가끔 그것을 읽었고 남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한 죄수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 나는 모든 러시아 민중들이 우리를 또한 '수난자'로 부르고 있었던 것을 알았고, 이 호칭이 많은 사람 입에서 수없이 많이 불렸다는 것을 들었다. (…) 4년간의 유형은 긴 세월의 학교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확신을 가질 시간을 가졌다. (『작가의 일기』, 51쪽, 이길주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필자의 책 『시베리아 문학기행』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데카브리스트 부인 가운데 한 사람인 안넨코바는 황제에게 탄원하여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가담했다가 국사범이 되어 유형에 처해진 애인 이반 안넨코프를 시베리아 동쪽의 치타까지 찾아간 용감한 프랑스 여인이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프랑스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가 1840년에 『펜싱 마스터』라는 소설로 썼다. 이 스토리는 오페라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안넨코바는 프랑스인으로 처녀적 이름은 폴리나 게블이었다. 폴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거쳐 험난한 우랄산맥을 지나면서 눈사태, 늑대 등과 마주치며 끝없는 설원을 지나 마침내 시베리아 치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족쇄를 차고 중노동을 하던 안넨코프를 만나 1828년 4월, 치타의 정교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국은 결혼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만 신랑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두 사람은 그 후 유형지인 치타주의 공장 도시 페트롭스키 자보드에서 살다가 이르쿠츠크주로 이주해 벨스코예와 투린스크 등에서도 거주했다. 그 뒤 1841년부터 토볼스크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살 때 도스토옙스키 등 정치범들을 폰비지나와 함께 만난 것이다. 안넨코프 부부는 1856년 30년 만에 특사령이 내린 후 니즈니 노브고로드로 이주해 살았다. 알렉산드르 뒤마는 『펜싱 마스터』를 낸 후 18년 만인 1858년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방문했을 때 소설의 주인공 안넨코프 부부를 만났다. 알렉산드르 뒤마는 그 사실을 그의 기행문 『차르의 러시아에서의 모험』(1860)에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난 셋집을 개조해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도 폰비지나와 안넨코바의 초상화가 있다. 그중 폰비지나의 초상화는 나이 들어 살이 많이 찐 중년의 모습이다. 옴스크나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에 걸려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 (다음 호에 계속)

▶ <우먼센스>에서는 바이칼BK투어(주)와 함께 2018년 2월 16일부터 23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가는 얼음 왕국 바이칼 탐방 여행'을 진행한다. 문의 및 신청은 바이칼BK투어(주) 02-1661-3585, 관련 내용은 우먼센스 2018년 1월호 82,84쪽 참조. 

CREDIT INFO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
2018년 01월호

2018년 01월호

취재·사진
이정식(<우먼센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