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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영애 마지막 인터뷰

배우 김영애가 지난 4월 9일 췌장암으로 끝내 세상과 작별했다. 향년 66세. 다섯 차례에 걸친, 고인과의 마지막 인터뷰

On May 04, 2017

“우리 인생은 유한한 거잖아요? 그래서 정리 좀 하고 가려고요. 나 좀 만나러 와줘요.”
배우 김영애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게 작년 9월이다. 이미 KBS 2TV 50부작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방송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이때만 해도 목소리는 ‘쌩쌩’했다. 몸도 마음도 아직은 멀쩡한 상태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건강이 악화됐다. 속절없이 몸 상태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 약속을 세 차례 미루더니 한 달 후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화가 왔다.
김영애 씨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는 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병원에서 진행됐다. 상태가 좋을 때는 2시간 넘게 이야기를 풀어냈고, 안 좋아지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뭔가 정리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 인터뷰는 내가 죽거든 내보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지난 4월 9일 결국 세상과 이별했다. 5년간의 긴 투병도 끝났다.
“죽음을 앞두고 아까운 건 없어요. 그런데 연기는 좀 아깝긴 해요. 이만한 배우 키워내려면 40~50년은 걸리는 거니까. 그것 말고는 미련도, 아까운 것도 없어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배우의 목소리는 편안했고, 차분했다. 살도 점점 내려 마지막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그의 표정에 회한은 어리지 않았다. 표정 역시 온화했고 눈빛도 투명했다. 

“이 세상에 감사하다는 말을 꼭…”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영애 씨는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MBC 공채 탤런트 3기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상업학교 나와서 대입 재수한다고 서울 친척집에 왔는데… 옛날엔 예쁘장하면 배우 하라고 많이들 그랬어요. 친척 언니가 MBC 탤런트 시험 원서를 사 가지고 와서는 나보고 지원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운 좋게 덜컥 됐어요.”
그는 “그때는 탤런트 시험에 붙으면 방송사에서 월급을 줬다. 월급을 준다고 하니 배우를 했지, 배우가 뭔지 제대로 알았으면 좀 생각을 해봤을 것 같다”며 웃었다.
“최소한 이름이라도 예명으로 바꿨을 거 아니에요. 그럼 이혼을 해도 숨길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순진했죠.”(웃음)
그는 공채로 뽑힌 지 2년 만인 1973년 일일극 <민비>의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굉장히 빨리 주인공이 된 거였어요. 획기적이었죠. 당시 너무 긴장해서 정동 MBC 정문 앞에서 쓰러지기도 했어요. 그렇게 어렵게 찍은 <민비>로 김영애라는 배우가 만들어졌죠.”
이후 <강남가족> <수선화> 등에 출연했고 <야상곡>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는 “<야상곡>을 통해 연기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 돌아봤다.
“처음에는 뭘 몰랐고, 25~26세가 돼서야 연기에 재미가 들기 시작했어요. ‘이거 참 재밌다’ ‘이거 해야겠다’ 하다 보니 내가 배우 안 했으면 뭘 하며 살았을까 싶더라고요. 배우로 살 수 있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자신의 ‘인생작’으로는 드라마 <형제의 강> <파도> <황진이>를 꼽았다.
“시대극 <형제의 강>이 1996년 작품인데, 내가 도회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미스 캐스팅이란 소리가 나왔어요. 나한테는 연기의 폭을 넓힌 작품입니다. 어머니상을 구축한 작품이고요. 작품도 좋았고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1999년 <파도>는 멜로가 있는 엄마의 이야기라 재미있었고요.”
특히 2006년 방송된 KBS 2TV 24부작 <황진이>를 자랑스러워했다.
“요즘 <황진이>의 윤선주 작가가 일주일에 한 번씩 병문안을 와서 날 즐겁게 해주고 가요. 윤 작가랑 이야기하면서 이번에 <황진이>를 다시 봤는데 주옥같은 대사와 예쁜 그림, 뛰어난 연출 솜씨가 새록새록 생각났어요.
그 당시에는 못 보고 넘어갔던 게 다 보이더라고요. 처음 대본 받았을 때 내가 이걸 어찌 해낼까, 어찌 제대로 해낼까 무서워했던 기억이 나요. 10년 전 작품인데도 지금도 외국인에게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해 보여주고 싶을 만큼 빼어난 작품입니다. 지금 봐도 하나도 안 이상하고 자랑스러운 작품이에요.”
하지원이 주연을 맡은 <황진이>에서 그는 ‘임백무’ 역을 연기했다. 천출이지만 조선 최고의 춤꾼이라 불리는, 송도 관아의 행수 기녀였다. ‘황진이’를 키워내는 엄하고 독한 스승이자, 춤에 대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인물이다.
“‘임백무’를 연기할 때 진짜 너무 무서웠어요. 제대로 연기를 못 해낼까 봐. 난 항상 작가들이 힘들게 쓴 대본을 제대로 연기로 표현해내지 못할 때 미안하고 송구해요. 배우는 이미 한 번 만들어진 것에 옷을 입히는 역할이에요. 그런데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배우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운 좋게 좋은 배역 만나서 명예를 얻는 거잖아요. 배우가 그리 잘났나? 아니에요. 좋은 배우, 좋은 역할은 모두가 같이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 늘 겸손해야 해요.”
그는 깔끔한 성격이었다. 맺고 끊는 것도 확실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런 그가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 도중 병원에 입원했으니 몸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는 작년 10월 말부터 지난 2월 초까지 4개월간 병원에서 외출증을 끊어가며 녹화 현장을 찾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 드라마 안 했으면 난 벌써 나를 놓았을 거예요. 연기하려고 억지로 먹고 버텼어요. 다만 내 상태가 나빠진 게 이미 촬영 시작하고 벌어진 일이라 너무 미안해요. 폐 안 끼치고 드라마를 무사히 마치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폐를 끼친 것에 그저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병원에서는 당장 연기를 그만두고 쉬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연기를 해야 하기에 좀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촬영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병원 신세를 지게 됐으니 이를 어째. 병원에서 분명히 몇 년의 시간이 더 있다고 했는데…. 모든 게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어쩌겠어요.”
그는 “그래도 드라마 할 때만 없던 정신이 차려진다”고 말했다.
“누구는 다 접고 시골 가서 공기 좋은 데에서 살라고 해요. 그런데 난 아니에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 없어요. 연기하지 않는 김영애라…, 처음 며칠은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이후는 상상할 수가 없어요. 연기 없이 무슨 의미로 살아요? 몸이 아픈데 대본이 외워지느냐고 묻는데, 연기할 때 대사 외우는 건 문제없어요. 분량이 많지는 않잖아요. 몸이 안 좋으면 차라리 정신이라도 흐려지는 게 좋지 않나 싶은 생각을 가끔 하는데 아직은 아니에요.”

“주어진 대로, 때가 되면 가야겠죠.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아프기 전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냥 꿈같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진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힘들지 않고 곱게 가고 싶네요.”


“다했다. 사랑도 원없이 했다”
원래도 ‘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그이지만, 암 투병을 하면서 그는 이를 악무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2012년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할 때 황달 증세가 있었어요. 열이 막 오르고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촬영에 지장을 줄까 봐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그러고는 드라마 끝나자마자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췌장암이었죠.”
보통 사람 같으면 병의 무게에 무너지기 십상일 때 그는 정반대로 연기 투혼을 더 불태웠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수술을 더 받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연기에 대한 간절함이 더욱 커졌다.
드라마 <내 사랑 나비부인> <메디컬 탑팀> <미녀의 탄생> <킬미 힐미> <마녀 보검> <닥터스>와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 <변호인> <우리는 형제입니다> <현기증> <카트> <허삼관>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 <인천상륙작전>이 그가 투병 중 출연한 작품이다.
“작년 영화 <판도라>를 보고 나서 <해를 품은 달> 김도훈 PD가 장문의 칭찬 편지를 보냈어요. 그 맛에 연기하는 거예요.(웃음) 난 내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연기할 때, 그게 좋아서 연기하는 거예요. 내가 배우인 게 너무 좋고 연기자인 게 좋고, 어떤 인물을 만들어낸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는 “대본에 뼈는 만들어져 있지만 거기에 연기로 옷을 입히고 색깔 입히는 게 너무 재밌다”며 “연기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둘 다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정말 감사할 게 많아요. 이 세상에 감사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받았어요. 고맙고 감사한 일뿐인데, 이 감사함을 갚지 못하고 가는 게 미안합니다. 21살에 배우가 돼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 감사하다는 것을, 지금껏 행동으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아서 꼭 이 기회에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 날 위해 기도하고 가슴 아파해주는 분이 너무 많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그는 “내가 가진 것보다 과분하게 많이 사랑받았다”고 강조했다.
“내가 별로 보잘것없잖아요. 평범하게 태어나 공부도 많이 못 했고, 모범적으로 살지도 못했고…. 단지 운이 좋아서 배우가 돼 과분하게 사랑받았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반가워하고 즐거워해주셨는데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에요. 배우는 드라마 속에 있을 때나 멋있고 근사한 거지 드라마 밖에서는 잘난 척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도 사랑받았으니 너무 감사하죠.”
그는 “누구나 다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은 하는데 그 열매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다. 또 전혀 열매를 못 따는 사람도 있다”면서 “환갑이 넘어 지금까지 연기하는 나는 운이 좋은 거다.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런 얼굴을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고백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한 작품도 많아요. 나 정말 일 많이 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연기하고 싶지 않아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런 연기 왜 하느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가 2001년 시작한 황토 화장품 사업은 누적 매출 1천5백억원을 돌파하는 등 번창 일로였다. 이 시기 그는 연기를 중단했고 주변에 크게 베풀었다.
“어느 해인가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어요. 사업해서 번 돈 중 4억을 기부해서였죠.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배우로서 얼굴이 알려진 덕이잖아요. 그러니 그냥 말 안 하고 가는 것보다는 세상에 인사하고 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2007년 한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 황토팩의 중금속 논란을 제기하면서 그의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공식 발표를 통해 ‘참토원’ 제품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일로 마음고생을 크게 한 그는 결국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는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편안해지니, 미운 사람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리 따지면 나도 살면서 정말 부끄러운 일 많이 했어요. 누구를 뭐라고 하거나 미워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은 어떤 미운 사람도 가슴에 남아 있지 않아요. 누굴 원망하는 건 결국 나를 괴롭히는 건데 그 시기를 그냥 나를 위해서 사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게 없다. 다했다”라고 말했다. “사랑도 원없이 했다”고 말했다.
“주어진 대로, 때가 되면 가야겠죠.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까. 내가 아프기 전에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냥 꿈같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진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죽고 사는 거야 아침에 눈을 뜨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잖아요. 힘들지 않고 곱게 가는 게 소원이에요.”
배우 김영애는 임종 때 미소를 지었다. 고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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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윤고은(연합뉴스 기자)
사진
스타넬리지엔터테인먼트
2017년 05월호

2017년 05월호

에디터
하은정
윤고은(연합뉴스 기자)
사진
스타넬리지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