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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그룹 며느리 사망 비보 그후

CJ 그룹 맏며느리가 세상을 등졌다. 지난 11월 4일 현지 시각으로 오전 3시쯤 미국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 있는 자택에서 이래나 씨가 숨졌다는 비보가 한국으로 날아들었다.

On December 1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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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 “병상에 있는 나에게 위안을 준 아이…”
결혼한 지 이제 7개월을 넘긴 신혼이었다. 미국의 명문 예일 대학교 캘훈 칼리지에 입학해 CJ 그룹의 며느리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 약속됐지만 이래나 씨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래나 씨는 1995년 11월 28일 그룹 코리아나 멤버였던 이용규 씨와 이화여대 출신 주세량 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이래나 씨의 프레지(온라인 프레젠테이션 플랫폼)에 따르면 세례명 카트리나에서 이름을 따와 ‘래나’라고 불렸으며 ‘사과 향이 나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한때 클라라 사촌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래나 씨의 큰삼촌이 그룹 코리아나의 또 다른 멤버 이승규 씨며 그 딸이 클라라다.

리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유학길에 올랐던 이래나 씨는 시카고 키스 스쿨(Keith School)을 거쳐 스위스 레잔 아메리칸 스쿨(Leysin Ameriacn School)로 향했다. 하지만 이 학교를 다 마치지 않은 채 지난 2010년 돌연 귀국한 뒤 지구촌기독외국인고등학교(GCFS)로 적을 옮긴다. 스위스에서 절친했던 친구 2명이 낙상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충격에 휩싸여 귀국을 결정했다고 알려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래나 씨를 이끌어준 건 펜싱이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로러스 펜싱 클럽에서 펜싱을 접한 뒤 고등학교 때 서울시장배 동호인 펜싱 대회 1위와 미국 주니어 대회에서 31위를 차지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미국 명문대에서는 성적뿐만 아니라 교외 활동도 중요해 펜싱은 이래나 씨를 돋보이게 하는 운동이었다.

2014년 1월 3일 이용규 씨 부부와 이래나 씨는 KBS2 <여유만만>에 출연해 미국 아이비리그 예일 대학교 합격 소식을 전했다. 방송에서 이래나 씨는 사촌 언니인 클라라의 영향으로 연예인을 꿈꾸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커서 공부를 택했다고 말했다.

2014년 9월부터 대학 생활을 시작한 이래나 씨는 대학생이 된 지 일 년 반 만인 지난 4월 9일 이재현 CJ 그룹 회장의 장남 이선호(26세) 씨와 비공개 혼례를 올렸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만나 2년간 교제했다. 당시 결혼식은 여느 재벌가와 달리 소박해 많은 이의 귀감이 됐다. 결혼식은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CJ 인재원 식당에서 열렸는데, 인재원에는 따로 웨딩홀이 마련돼 있어 CJ 그룹 직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양가 부모님의 결혼 축하문이 전부였던 결혼식은 10여 명만 참석해 이들의 앞길을 축복했다. 당시 이재현 회장은 신장이식 수술 부작용으로 건강이 악화돼 참석하지 못했으나 누구보다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던 이래나 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사인을 놓고 여러 의견이 뒤섞였다. 이래나 씨의 죽음을 담당한 뉴헤이븐 지역 경찰은 “범죄와 관련 없는 사망은 사인을 말해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으며 CJ 그룹 관계자 역시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보통 미국 경찰 당국은 자연사나 병사, 극단적 선택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 않는다. 당시 사고 현장에는 고인의 남편인 이선호 씨(CJ제일제당 과장)와 부모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이래나 씨의 사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이래나 씨 부부는 연애부터 결혼까지 양가의 특별한 반대 없이 자연스레 진행됐고, 오히려 이 회장 측이 결혼을 서두른 것으로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고, 기업에 악재가 겹쳐 있던 터라 “내 병세가 어찌 될지 모르니 너라도 빨리 가정을 꾸려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회장은 평소 고인을 딸처럼 여겼다. CJ 그룹 관계자는 “병상에 있는 시아버지를 뵈러 올 때마다 나이에 걸맞은 소박한 선물을 준비해 왔는데, 그 모습을 이 회장이 무척 대견스러워했다”고 전했다. 비보를 듣자마자 시어머니가 다음 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을 만큼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다.  


지난 11월 11일 국내에서 있었던 이래나 씨의 장례는 이 회장과 이 회장의 장남이자 고인의 남편인 이선호 씨, 고인의 가족 등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용하게 치러졌다. 이 회장은 “곱고 반듯한 아이였다. 근심과 편견을 모두 훌훌 털고 편히 가길 바란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이후 본지에 심경을 전해온 이 회장은 “맑은 아이였다. 그 아이를 보내면서 생애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 선호와 깊이 사랑해 결혼했고, 병상에 있는 나에게 많은 위안을 줬다”며 비통한 심경을 전했다.

래나는 햇살 같았습니다
국내 상황과 달리 예일대의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미국 현지 한인 학생 등에 따르면 이래나 씨의 휴학 이유가 신경쇠약 등의 문제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날도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신경쇠약의 원인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래나 씨가 다녔던 예일대 생활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자기와의 싸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씨가 학교를 다니며 남긴 수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 역시 이를 뒷받침하듯 시간과 자기 관리, 경쟁의 치열함이 대부분이다. 예일대 1학년을 마친 이 씨는 2015년 휴학을 결정한 뒤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2018년 예정된 졸업은 2019년으로 유예됐다. 이 씨는 복학을 앞둔 상황이었다.

이래나 씨 사망을 기점으로 예일대 재학생 상당수가 예일대를 포함한 아이비리그 소속 명문대의 어려운 휴학과 복학 절차를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다. 최근 예일대를 비롯해 MIT에서도 MIT 부속 정신과 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던 휴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휴학 중 사망은 미국 명문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후문이다. 예일대의 한 재학생은 “입학하면 쏟아지는 과제와 압박에 우울증이나 정신적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지만 학교를 다니면서는 제대로 된 정신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휴학 제도는 한국과 달리 까다로운 편이다. 휴학과 복학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중퇴로 처리한 뒤 재입학으로 보는 게 맞는다는 시각이다. 다수의 재학생은 “휴학한다는 말만 꺼내도 경쟁과 압박을 버틸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게 아이비리그의 현실”이라고 말할 정도다. 휴학을 신청하면 이듬해 다시 입학 신청을 해야 하고, 면접 등 까다로운 절차가 뒤따른다. 불합격 가능성도 높다.

한 재학생은 “정신과에서 정신병 확진을 받아야만 가능하고 그 외 낮은 수준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휴학이 어렵다. 예일대에서 버티는 자체가 큰 스트레스다. 이따금 지칠 때 어떻게든 휴학해 마음의 안정을 좀 찾더라도 복학 승인을 받으려면 ‘휴학 기간 중 어떤 생산적인 활동을 했느냐’는 식의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복학하면 왜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의무적으로 재적응 기간을 가져야 하니 결국 동급생과는 3학기나 멀어지게 된다”며 학교 측의 개혁을 촉구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낙후된 정신 건강 프로그램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예일대의 정신 건강 기관은 늘 사람들로 꽉 차 제대로 된 상담이 어려운 상태라고 알려졌다. 하버드 대학교나 MIT, 코넬 대학교 등 아이비리그 아시아 학생들의 자살률은 미국의 평균보다 2배 이상 높은 상태다. 이래나 씨의 사인이 앞서 사망한 학생들과 같다고 볼 순 없다. 이래나 씨의 경우 ‘결혼’이라는 이슈가 있었기에 휴학과 복학 이유를 증빙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쇠약으로 병원을 출입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어떤 이유로든지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일대 여자 펜싱팀은 이래나 씨에게 다음과 같은 추모 글을 남겼다. “래나는 햇살 같았습니다. 어디를 가든 즐거움을 흩뿌리고 다녔죠. 밝았던 모습을 표현할 단어가 마땅치 않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CREDIT INFO

취재
하은정 기자, 최훈민(<일요신문> 기자)
사진
서울문화사 DB
2016년 12월호

2016년 12월호

취재
하은정 기자, 최훈민(<일요신문> 기자)
사진
서울문화사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