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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맘 X파일

150만원 주면 트로피 하나 타줍니다

“넌 공부만 해, 엄마가 스펙 만들어줄게.” 스펙으로 대학 가는 시대, 내 아이의 화려한 스펙을 위해서라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강남맘들의 속살.

On October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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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부’의 노예 ‘스펙 대행 학원’ 판치는 강남

“와~ 지옥에서 해방이다!” 초등학교 3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학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뱉은 혼잣말이다. 여름방학이라도 별다를 바 없이 빼곡한 사교육 스케줄을 내달리고 있는 강남 아이들은 내일이면 또다시 그 ‘지옥’에 입성해야 하지만 학원을 마친 뒤 갖는 짧은 휴식이 달콤하기 짝이 없다.

여름방학을 맞아 오히려 특강이다, 캠프다 하며 아이들 땀 냄새로 가득한 대치동 학원가. 자기 얼굴만 한 빵 덩어리를 학원 복도에서 뜯어 먹으며 점심을 해결하는 아이들도 있고, 부모가 준 용돈으로 학원 건물 아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강의를 듣는 아이도 많다. 교통 체증의 원흉으로 찍히면서도 평일이든 주말이든 자식을 픽업하기 위해 도로 갓길을 점거하고 늘어선 자가용 승용차들. 입시 정책이 어떻게 바뀌든지 간에 강남 학원가의 불은 꺼진 적이 없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하다. 부모의 자식을 위한 학업 서포트 끝은 어디까지일까?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때까지 투자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아이가 원하는 걸 하게 둘 거라는 부모 무리가 있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고, 할 놈은 어떻게든 할 테니 묵묵히 지켜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학생부 종합 전형 시대’, 이른바 ‘학종 시대’가 도래하면서 부모의 치맛바람, 바짓바람은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광기 어린 채 펄럭이고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이 부모들을 자식 공부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시종일관 서성거리게 만들고 있을까? 원인은 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다.

학교생활기록부, 줄여서 생기부에는 학생의 성적은 물론이고 수상 실적, 봉사활동 시간, 인성, 독서 기록 활동 등이 아주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대학 입시가 수시 전형 중심으로 가는 현 상황에서 사실상 ‘입시의 중요한 요체’로 생기부만 잘 만들어도 좋은 대학 간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일선 교사까지 나서서 생기부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생기부에 한 줄이라도 좋은 말이 들어간다면, 한 가지라도 남과 다른 스펙이 들어간다면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벼들고 있어 오죽하면 요즘은 ‘생기부스터’라는 말도 있다. ‘생기부’와 추진 로켓을 의미하는 ‘부스터’를 합친 말로 아이건 학부모건 생기부에 기록된다면 앞뒤 안 보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걸 비꼬는 말이다.
 

돈만 주면 ‘자소설’ 대신 써드려요, 전교 회장 만들어드릴게요

애초에 생기부는 사교육을 근절하고 공교육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도입됐다. 사교육의 꽃이라 불리는 각종 교외 대회 수상 실적을 단 한 줄도 기록하지 못하게 하는 등 철저히 교내 활동 내역에 가중치를 두면서 학생의 현재보다는 발전 가능성, 결과보다는 과정, 스펙보다는 스토리를 더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히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는 정성 평가이다 보니, 스토리가 생기면 생기부에 기록되는 게 아니라, 생기부를 의식한, 생기부를 위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기저기서 기상천외한 꼼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꼼수를 주도하는 게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강남의 컨설팅 전문 학원들이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을 둔 도곡동의 학부모 최씨는 “앞으로는 생기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해 막막한 마음에 입소문난 학원 몇 군데를 가보았다. 누가 들어도 혹할 만한 청사진을 제공하며 아이의 고교 동아리, 소논문, 독서 활동 등을 3년 동안 세밀하게 관리해준다고 하더라”며 “가기 전엔 ‘뭐 별거 있겠어?’ 했는데 상담만 하고도 마음을 빼앗겼다. 부모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입시 정보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고, 아이는 학교 성적에만 올인하면 되니 수강생 입장에서 정말 편하다”라고 말했다.

입시 컨설팅 학원들의 평균 비용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액인 곳이 태반이다. 원장과 1회 상담 비용으로 1백만원은 기본이고, 1년에 3천만~5천만원짜리 프로그램, 즉 3년에 1억이 훨씬 웃도는 비용을 지불해야 나름 신경 쓴 컨설팅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대학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전문가의 도움이 드러나지 않게 물 흐르듯 자연스레 생기부를 꾸며주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는 하늘을 찌른다.

고등학교 1학년 딸을 둔 대치동의 김씨는 “‘자소서’라는 말은 이제 없다. ‘자소설’이다. 딸아이가 세 번 정도 소논문 과외를 받았다. 말이 좋아 지도이지 대필을 해주더라. 이번에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평균 스펙을 보니, 교내 상이 48개, 동아리 5개, 독서 35권이더라. 3년간 교내에서 48개 상을 받으려면 한 달에 한 개 이상 상을 받아야 한다. 학원들은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덜 빼앗기면서 상도 받고 봉사활동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전문가들이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발 빠른 강남맘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아이들 스펙 만들어주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리더십을 키웠다는 항목을 부각시키기 위해 전교 회장과 반장 선거에 아이들이 몰리고 유명 스피치 학원엔 ‘전교 회장 선거반’이 따로 구성돼 있다. 테이블 마술까지 돈을 받고 가르치며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표를 많이 얻을 수 있는지를 일러준다. 전교 회장 선거반은 시간당 7만~15만원 선이며, 초등학교 전교 회장 선거를 위한 맞춤 어깨띠와 각종 대회 피켓 제작 업체에도 주문이 밀리고 있는 상황.

봉사활동은 또 어떤가? 생전 봉사에는 관심 없던 부유한 사모님들이 아이 스펙을 위해서라면 유기견 모임에 나가 개들과 놀아주고, 구청 행사 등에 아이를 밀어 넣는다. 이게 다 학원에서 코치해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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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 없는 마더 파워 괴물을 만드는 어른들

스펙 대행 학원들이 어느 정도로 성행 중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름난 학원에 직접 문의를 해보았다. “중학생 아이를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게 하고 싶다”고 하니 학원 관계자는 대뜸 “어느 정도의 상을 타고 싶은지” 물었다.

“대상까진 아니어도 우수상 정도”를 원한다고 하니, 아이의 영어 실력은 묻지도 않고 시간당 15만원을 달란다. 2개월에 1백50만원 이상을 주면 무슨 상이든 하나 타게 해주겠다고 장담했다. 대기 중인 학생도 많으니 선입금을 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어진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학원 관계자는 “생기부에 외부 상이 등록되지는 않지만 자소서나 자기 특기란에 녹여 쓸 수는 있잖아요. 저희한텐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수상한 수백, 수천 가지의 원고가 있어요. 저희 노하우로 영어 한마디 못하는 아이들도 상을 탈 수 있게 만들어드려요. 저 멀리 광주, 대구에서도 오는 아이들이 있으니 서두르세요.”

학원에서 흔히 하는 말이 “녹여서 쓸 수 있다”는 건데, 이것도 사실 맞네, 틀리네 말이 많다. 녹여서도 절대 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어떻게 하든지 어필은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두둑한 스펙을 쌓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것.

학원 말로는 수학 실력이 월등한 데 반해, 영어 스펙이 전무한 아이들한테는 그쪽으로 단기간에 수상 실적을 만들어주고, 영어는 잘하는데 수학이 부족한 아이들한테는 또 반대로 수학 관련 대회에 나가 무슨 수를 쓰든 결과물을 얻게 만들어준단다. 즉 스펙 만들기에 최적화된 ‘미다스의 손’이 자신들이라는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조력자(부모, 사교육) 없이 학생의 능력, 노력만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사교육 없이 하나하나 자신의 스펙을 땀 흘려 쌓아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건 당연하다. 교육 불평등을 넘어 엄청난 불합리함이다.

강남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성행 중인 영재원 관련 사설 업체들도 마찬가지다. ‘교육청 영재’니, ‘대학 부속 영재’니 하면서 수학과 과학 과목에 잔뜩 거품을 만들어놓고 하루라도 늦으면 그만큼 들어가기 힘들다고 부추긴다. 개인적으로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사기에 혼선을 주는, 사교육의 꽃이라 불리는 국가 부설 영재원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고액을 투자했으니, 뭐라도 만들어야 하는 부모들은 컨설팅 학원에서 일러준 방향대로 생기부를 써달라고 담임을 찾아가 직접 써온 종이를 내밀기도 하고, 생기부를 잘 써주는 교사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한다.

학생과 학부모뿐 아니라 교사들의 생기부 관련 잡음도 적지 않게 들려온다. 최근엔 대구의 한 사립 고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맡은 동아리 학생 30여 명의 생기부를 조작해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는가 하면, 생기부를 빌미로 학생을 성추행한 교사가 발각되기도 했다. 학생부 종합 전형 시대, 괴물로 둔갑한 생기부 앞에 학원들만 웃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궁금하다. 잘 만든 스펙을 갖고 대학에 들어간 아이들은 대학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그때 또 엄마 카드가 출동해야 한다면 미리 잘 생각해볼 일이다. 취직, 결혼, 자녀 양육…. 살면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게 스펙이다. 대입에 찌든 아이들이 입시의 발판으로 만들어낸 스펙에서는 맛도 보기 전에 조미료 냄새가 과하게 난다.
 

CREDIT INFO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백지희(프리랜서)
2016년 09월호

2016년 09월호

기획
하은정 기자
취재
백지희(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