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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옥의 시간

On August 02, 2017 0

가까이서 본 배종옥은 단단해 보였다. 혹여 흔들리더라도 부러지지 않고 금방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뿌리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50대의 배종옥은 그랬다.

 

베이지 컬러 벨벳 민소매 톱 돌체앤가바나.

 

배종옥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우리는 그렇게 배종옥에게 빠져들었다.

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나요? 일일 드라마 <이름 없는 여자>에 출연 중이에요. 재벌가에 입성한 여자 역할을 맡았는데 캐릭터가 워낙 센 데다 제 분량이 극의 80%다 보니 체력에 한계를 느껴요. 그래서 드라마 촬영 중에는 일부러라도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는데 이번 화보 촬영은 재미있을 것 같아 덜컥 하겠다고 했어요. 편한 옷을 좋아하는데 과감한 옷을 입어야 하는 화보 촬영은 색다르거든요. 평소 제게 과감한 옷을 입히지 못하던 스타일리스트가 신이 나죠.

20대 못지않은 몸매를 보고 놀랐어요. 연기를 오래, 잘하기 위해선 체력이 기본이 돼야 하는데 나이 먹을수록 체력에 한계를 느끼면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나태해 보이는 것도 싫고요. 4년 전 허리가 아프면서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했는데 잔 근육이 생기고, 라인이 잡히면서 몸매가 탄탄해졌어요. 탄력 없이 나이든 여자는 되기 싫거든요. 요즘엔 바빠서 EMS(전기파를 이용한 운동법)만 해요.

인위적인 느낌이 없는 자연스러운 얼굴이 보기 좋아요. 나이 든 내 모습을 사랑하려고 해요. 내 나이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수술이나 시술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어요. 요즘엔 지인이 가르쳐준 레몬과 꿀, 밀가루를 섞어 만든 천연 레몬팩으로 피부를 관리하는데 웬만한 피부과 시술보다 효과가 좋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작업한 사진도 최대한 내 본연의 얼굴을 살려주세요.

‘센’ 이미지가 있어요. 본인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떤가요?(배종옥은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오래 함께 일한 스타일리스트에게 자기 성격이 어떠냐고 물어본 후에야 답을 했다.)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털털하고 쿨하대요. 맞으면 맞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라 센 언니 이미지가 생긴 것 같은데, 평소에는 까칠하지 않아요.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유순해지네요. 요즘엔 내 생각이 다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점점 더 부드러운 여배우가 될 거라 믿어요.
 

 

레드 컬러 드레스 에스카다, 스틸레토 힐 이로스타일.

 

평소의 배종옥은 어떤 모습인가요? 잠자는 거 좋아해요. 잠을 못 자는 상황이 제겐 가장 큰 스트레스라 여유 시간이 주어지면 무조건 자고 보는 편이죠. 한때는 잠을 많이 잘 수 없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했을 정도였어요. 그래도 특별한 일이 없을 땐 아침 7시 30분에는 일어나는 편이에요. 그 밖에는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매체에 영화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 의무적으로 보는 것도 있지만 내 직업이 배우니까 챙겨 보려 하죠. 최근엔 <옥자>를 봤는데,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봉준호 감독이 괜히 찬사를 받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어요. 또 친한 지인들과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엔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빠서 통 마시질 못했네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의외의 면이 있다면 뭘까요? 내 방이 핑크색으로 꾸며졌었다는 걸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약 7년 동안을 핑크색으로 도배된 방에서 지내다가 최근 화이트 벽지로 바꿨죠. 변화를 주고 싶었거든요. 이번 드라마가 끝나면 이사를 갈 거예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은데 그러려면 움직이기 쉽게 확 줄여야 하니까 집부터 단출하게 정리하려고요. 50대는 좀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아! 제가 운전을 잘한다는 것도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최근에 렉카 신도 대역 없이 할 정도로 운전을 잘해요. ‘배 기사’라는 별명도 있는걸요.

곧 개봉하는 영화 <환절기>와 <아리동>에도 출연했죠? 보통 배우들은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하면 드라마 출연은 잘 안 하던데, 배종옥 씨는 영화와 드라마 사이에서 강약 조절을 잘하는 것 같아요. 배우는 작품을 따지지 않고 아무거나 다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좋든, 싫든 이것저것 다 하면서 그 안에서 배우는 게 배우죠. 저도 젊었을 땐 작품을 골랐는데 50살이 넘어가니 ‘사람들이 나를 예쁘다고 말해줄 시간도 얼마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하는 작품도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철없이 지내던 40대에는 선생님들이 쉬지 않고 연기하는 걸 보면서 ‘나는 저 나이가 되면 좀 쉬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분들이 왜 그렇게 연기를 좇았는지 이해가 돼요. 늙어가는 나를 받아들이고, 욕심을 내려놓고 더 많은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연기 롤모델이나 좋아하는 감독이 있나요? 대학교 시절부터 메릴 스트립을 좋아했어요. 그녀도 사실 좋은 작품에만 출연했던 건 아니거든요. 독특한 캐릭터도 많이 맡았고, 혹평도 많았어요. 그녀의 행보를 보면서 ‘배우가 좋은 작품에만 출연할 순 없다. 그 안에서 많이 배우고, 잘못된 걸 깨달으면서 진짜 배우가 되는 거다’라는 걸 느꼈죠. 감독님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해보지 못했네요. 아무래도 배우다 보니까 배우들에게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유난히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어요. 노 작가와 배종옥은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젊었을 때 노 작가와 작품을 많이 했고, 그러면서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알게 되다 보니 서로가 편했던 것 같아요. 작가는 굳이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 작품을 잘 이해하고 표현하는 배우를 좋아하기 마련이거든요. 노 작가에게 저는 그런 존재겠죠. 아마 다음 작품도 같이 하게 될 것 같아요.

배종옥 씨는 노희경 작가의 작품만 잘 이해하는 건 아니죠. 모든 작품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어떤 작품이든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어봐요.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연구하죠. 작품과 캐릭터에 깊게 빠져드는 편이에요. 간혹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럴 땐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 나를 설득시켜요. 작품과 캐릭터가 이해되지 않은 상태로 연기할 순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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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네이비 컬러 드레스 에스카다. 우_베이지 컬러 니트 톱 돌체앤가바나, 팬츠 질샌더.

 

뼛속까지 배우네요. 배종옥에게 배우란 어떤 의미인가요? 젊었을 때 이 질문을 받았더라면 똑 부러지게 대답했을 거예요. 나이 먹을수록 배우의 의미가 뭔지 더 헷갈리고, 어려워요. 분명한 건 배우와 연예인은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배우가 될 건지, 연예인이 될 건지 노선을 빨리 정하라고 조언해요. 유명해지는 것,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것에 매료될 수 있는데 그 환호성은 굉장히 짧다는 걸 알려주죠. 갈대 같은 대중의 마음을 좇아가다 보면 상처받기 마련이거든요.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으면 인기를 좇지 않는 마음가짐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요? 당연히 ‘연기 잘하는 좋은 배우’죠. 인간 배종옥 이전에 배우로 평가받는 게 좋아요. 열심히 연기하고 간 배우라는 평가를 받는 게 최종 목표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배우로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는 거예요. 아줌마이면서 아줌마 같지 않은 분위기랄까요. ‘배종옥만 할 수 있어!’ 하는 저만의 색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기도 더욱 쉽겠죠. 물론 색깔이 뚜렷한 게 백 프로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색깔이 없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여배우의 삶은 화려할 것 같다는 막연한 동경심이 있죠. 여배우의 삶에 만족하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좋아요. 젊었을 땐 너무 관심 받는 게 불편해 이 직업을 싫어했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역시 힘들었어요. 상처받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친구들은 내가 배우를 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대요. 연기도 못하고, 성격도 조용하니까 ‘쟤는 뭐가 될까?’ 싶었다더라고요. 그렇게 숫기 없던 제가 배우가 된 건 ‘운명’이에요. 지금은 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를 계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게 감사하고 행복해요.

배우에 대한 생각을 전환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1989년에 출연한 드라마 <왕룽일가>가 결정적이었죠. 한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신선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던 첫 작품이었거든요. 그 전엔 작품과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만 연기해서 ‘연기의 맛’을 몰랐었는데 그 작품을 통해 ‘배우, 되게 재미있다’ 하고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다음으로 영화 <젊은 날의 초상>에 출연했는데, 역시 그 작품 속 인물도 입체적이었어요. 연달아 즐거운 작품을 하니까 ‘나는 배우를 해야 하는구나’ 하고 마음을 굳혔죠.

예능 출연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요. <룸메이트>에도 출연했었고, 얼마 전에는 <복면가왕>에도 나갔죠. 예능에 출연하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에요. 근데 요즘엔 다양한 배우가 예능에 나오니까 저라도 안 나와야겠다 싶어요. 무엇보다 저는 연기하는 게 좋아요. 예능에 출연할 때마다 느끼는 게 ‘아, 나는 결국 연기를 해야 하는구나’였어요. 연기하면서 예능까지 하느라 내 집중력이 분산되는 게 싫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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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_화이트 컬러 슈트 에스카다, 링 디블리스. 우_네이비 컬러 점프 슈트 에스카다, 스틸레토 힐 이로스타일.

 

콤플렉스도 있나요? 화면에 넙죽하게 나오는 얼굴이 가장 큰 콤플렉스예요. 때에 따라, 장면에 따라 날렵하게 나와야 할 때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아요.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연기를 못 할 뻔한 적도 있었죠. 지금은 저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지만 여배우에게 적당한 목소리가 아니라고 감독님들한테 엄청 혼났거든요.

주관이 뚜렷한 것 같아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한길을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어려서부터 남을 의식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자아가 강한 편이라 ‘나는 나, 너는 너’ 마인드였죠.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씨의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관심 없어요. 그들의 사랑에 제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제 인생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요.

‘어떻게 늙어야 할까’에 대한 부분도 자기만의 생각이 있겠죠? 누가 봐도 멋있게 늙고 싶어요. 랄프 로렌에서 일하다가 프랑스 파리로 가 캐시미어 가게를 하는 ‘린다 로딘’이라는 할머니가 있어요. 청청 패션을 즐겨 입고,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된 패션 피플인데 그분이 제 워너비 할머니예요. 그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 파리에 가려고도 했을 정도로 팬이에요. 그분처럼 젊게 사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패션도 딱 제 스타일이에요. 린다 로딘처럼 멋있게 살려면 무엇보다 몸매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겠죠?

린다 로딘보다 더 멋있는 할머니가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나이를 먹어도 배우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대사를 외울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최근 노인들이 유치원이나 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생겼더라고요. 원래 제 꿈이 ‘동화책 읽어주는 할머니’였는데 그 소식이 반가웠어요. 저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할머니 무릎에서 잠드는 게 일이었던 우리와는 다르게 요즘 아이들에겐 그런 정서가 없잖아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게 결국 우리나라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늘 ‘내가 가진 재능으로 사회에 기부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고민하고 생각했어요. 배우로 살면서 배운 능력 중 하나는 책을 잘 읽어주는 방법이죠. 나중에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할머니로 살면 딱인 거예요. 나의 재능이 사회에 잘 쓰일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뿌듯하지 않나요?

올해가 벌써 절반이 흘렀어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출연 중인 드라마가 9월에 끝나요. 두어 달 정도 쉬면서 이사도 하고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리고 연말엔 작품을 또 하게 될 것 같아요. 연기해야죠. 배우니까.

배종옥은 늙는다는 것에 초연했다. 예쁜 여자보다 아름다운 배우를 꿈꿨다. 이미 충분한데도 말이다.  

가까이서 본 배종옥은 단단해 보였다. 혹여 흔들리더라도 부러지지 않고 금방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뿌리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50대의 배종옥은 그랬다.

Credit Info

에디터
하은정
인터뷰
이예지
사진
목나정
스타일리스트
전금실, 강지연
헤어
권영은
메이크업
주정하(더세컨)

2017년 08월호

이달의 목차
에디터
하은정
인터뷰
이예지
사진
목나정
스타일리스트
전금실, 강지연
헤어
권영은
메이크업
주정하(더세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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