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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를 그리는 소녀 디자이너 나가타 모에

On March 25, 2015 0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인생이 보인다’고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나가타 모에가 꼭 그렇다. 아름다운 작품만큼 순수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씨를 지닌 모에와 나눈 따뜻한 시간.


‘국민학교’ 시대를 경험했던 30~40대라면 어릴 적 동화책, 엽서, 피아노책 등에서 한 번은 봤을 법한 컬러풀한 일러스트. 불법 경로를 의미하는 ‘해적판’으로 국내에 들어와 온갖 인쇄물에 널리 사용됐던 꽃과 요정이 등장하는 이 그림들은 모두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거장 나가타 모에(66세)의 그림이다. 이처럼 작품으로는 너무나도 익숙한 나가타 모에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최근 그녀는 국내 동화작가 안젤라 송(송현경)과 손을 잡고 <코코의 숲>(깡떼상스)을 펴냈다. 한국의 작가가 글을 쓰고 일본의 나가타 모에가 그림을 그린 최초의 한일 합작 동화책이 탄생한 것이다.

서울 시내 중심가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나 모에는 5~6명의 일행과 함께였다. 하지만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서 그녀의 순수한 작품 세계가 그대로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에 항상 등장하는 요정마저 연상됐다. 올해 나이가 66세라는 말에 깜짝 놀라며 “소녀 같다”고 칭찬하자 “이런 그림을 매일 그리면 소녀가 될 수밖에 없어요”라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나가타 모에는 일본 효고 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 년 내내 각양각색의 꽃이 피는 그곳에서 모에는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이름 모를 꽃과 나무를 벗 삼아 자랐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 환경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0년 가까운 화가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항상 꽃과 요정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예요. 멋지게 꾸며 준비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지만 결국 답은 ‘좋아하니까’였어요. 어려서부터 자연을 가까이하며 살았고, 꽃봉오리 안에는 작은 요정이 자고 있다고 믿었거든요. 동화책 속의 도깨비, 요괴들도 제 친구였고요. 그리고 지금도 그런 판타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상상 속의 꿈같은 이야기를 그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모에는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일러스트레이터나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교본으로 삼고 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모에>라는 일러스트 잡지도 발간된다. 원래 다른 이름이었지만 공모를 통해 ‘모에’로 변경됐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40년째 왕성히 활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으로 그녀 이름이 일러스트레이터의 대명사처럼 불리기 때문이란다. 또 그녀는 단순히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뛰어넘어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택배 송장, 신용카드, 통장 등 일본인의 일상생활에도 모에의 그림이 흔히 쓰일 정도로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그림을 그리진 않았다.

 


“미술을 전공하긴 했지만 처음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어요. 작업 과정에서 일러스트를 맡기는데 제가 생각했던 그림이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그리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완전히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업하게 됐어요. 그게 벌써 40년 전 이야기네요.(웃음)” 겸손하게 이야기하지만 모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덴마크, 프랑스, 대만 등 해외에서도 전시 요청이 쇄도할 만큼 특유의 색채감이나 작품성을 좋아하는 열혈 팬이 많다. 또 교토에는 1년 365일 모에의 그림만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으며, 다른 도시에서도 늘 전시가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높은 인기와 명성을 자랑하는 화가답게 모에는 하루하루 바쁜 스케줄을 소화한다. 모에를 위해 일하는 인력만 무려 9명. 매일 전시, 강연, 작품 활동 등 스케줄이 넘쳐나며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에 작가로서 여러 신문에 글을 연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 와중에도 모에는 작품 하나하나를 허투루 그리지 않는다. 작품에 들어가는 사람이나 꽃 등은 자신만의 상상이 아닌, 철저한 사전 이미지 작업을 통해 그림으로 나타낸다. 이번 <코코의 숲>의 주인공 코코도 주변의 또래 여자아이를 모델로 해 그림 속 의상을 입혀 촬영한 뒤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렸다. 코코가 입은 보라색 의상도 모에가 직접 만들었다. “이런 동화책 그림을 그릴 때는 글을 먼저 읽고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요. <코코의 숲>은 책을 읽는 순간 그림이 머릿속에 다 그려졌죠. 그리고 평소 알고 지내던 꼬마 아이에게 제가 만든 옷을 입히고, 제가 상상했던 장면의 느낌으로 사진을 찍어서 그림으로 옮겼어요. 포즈 같은 것은 먼저 스케치 작업을 하고요. 제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요정의 손동작이나 몸짓 같은 것이 섬세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어림잡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늘 사실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그리죠. 꽃이나 나무도 마찬가지고요. 산책을 하다가도 새로운 나무나 꽃을 만나면 항상 작품을 위해 사진으로 남겨요.” 책 속의 그림과 함께 사전 이미지 작업을 위해 촬영한 사진을 비교해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사진 속 소녀는 코코 그 자체이며, 책 속 코코는 소녀를 꼭 빼닮았다. 말로 설명을 듣기에도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물었다. “이러한 과정을 매번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작품에 진정성을 담기 위해서는 사소한 부분도 소홀히 할 수 없어요. 또한 실재가 바탕이 되지 않은 판타지는 진정한 판타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정확하게 실재를 세우고, 그 뒤에 판타지를 그려내죠. 그렇기 때문에 보는 분들은 제 그림에서 리얼리티와 판타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요. 리얼리티를 좋아하는 사람,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그 덕분이고요. 제 작품의 흡인력은 거기서 나오는 것 같아요.”

 

화려한 색채감과 풍부한 상상력이 특징인 나가타 모에의 작품.

 

 

모에의 작품이 환상적인 이유는 형형색색의 화려한 컬러감 덕분이기도 하다. 완벽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색채감각은 그림이 마치 현실인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선명하고 다채롭다. 작품에 사용하는 재료도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는 컬러 잉크가 밝고 화려해서 주로 사용했어요. 제 작품은 대부분 인쇄용으로 사용되는데 인쇄했을 때 컬러 잉크가 색도 잘 나오거든요. 다만 컬러 잉크는 흰색이 따로 없어서 흰색 부분은 남겨놓고 그려야 해서 작업이 까다롭다는 어려움이 있었죠. 변색이 빨리 되고 보존이 쉽지 않아 전시용으로 부적합하다는 단점도 있었고요. 그래서 외국에서 전시를 할 때는 실크에 염료로 그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변색은 없는 대신 인쇄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잉크처럼 묽게 나오는 아크릴물감을 사용해요. 예전에는 잉크보다 색상 종류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제는 종류도 다양해졌고 잘 변색되지 않아서 거의 아크릴물감을 사용하고 있어요.”

모에의 작품에는 꽃과 나무 등 현실의 것들도 포함되지만 날개 달린 숲 속의 요정 등 상상 속의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요정들은 하나같이 해맑은 미소와 순수한 얼굴을 갖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과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모에의 그림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를 넘어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덕분일 것이다.
“제가 그리는 판타지의 세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나 도피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고 능동적이며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아름다움과 삶의 진정한 의미, 공존의 메시지를 전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죠. 더욱이 현대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그림을 보는 짧은 순간만이라도 평안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게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자 바람이에요.”

올해로 66세인 나가타 모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거쳤음에도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렇듯 순수하고 판타지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상력의 원천으로 모에는 ‘책과 사람’을 꼽았다. 성장기 아이들의 상상력과 감성 지수를 높이는 데에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두 번, 세 번 강조했다. “현실 속에 없는 것들을 상상해내려면 책을 읽어야 해요. 책을 읽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그려보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책을 통해 내 인생 외에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어 상상력이나 창의력 향상에도 크게 도움이 돼요. 어려서는 책을 많이 읽고 조금 더 크면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해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만나면 생각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제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영감을 얻을 때가 많고요. 결국 사람과 책이 가장 중요해요.”

인터뷰를 마칠 무렵, 한국에 같이 온 모에의 남편이 함께 자리했다. 역시 화가로 활동하는 남편은 백발이 성성한 나이지만 소녀 같은 아내만큼이나 소년 같은 순수한 눈망울을 지닌 사람이었다.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질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모든 열정은 가족과 친구에게서 나온다”는 모에의 말뜻이 무엇인지 짐작됐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그녀의 순수한 그림은 그녀의 인생, 그리고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인생이 보인다’고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나가타 모에가 꼭 그렇다. 아름다운 작품만큼 순수한 미소와 친절한 마음씨를 지닌 모에와 나눈 따뜻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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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이현경
사진
박원민

201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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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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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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