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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언니 오빠들

현진영 go 진영 go

춤을 굉장히 잘 추는 열여섯 살의 앳된 소년이 있었다. 온 국민이 그 소년의 권투 춤을 따라 한 시절도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마흔이 훌쩍 넘은 소년은 여전히 큰 후드 티와 한껏 내린 청바지를 입었다.

On February 03, 2015


요즘 일명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열풍’으로 거리마다 90년대 노래가 흘러 나와요. 사실 그 시대 하면 현진영을 빼놓고 얘기하긴 어려워요. 그 시절은 대단했죠. 저도 한 가닥 했고요.(웃음)

많은 분들이 잘 모르는데, SM(SM엔터테인먼트) ‘1호 연습생’이라고 들었어요. 처음 회사에 들어간 게 1987년 무렵이었어요. 연습생으로 스카우트돼 굉장히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받았죠. 요즘도 SM 하면 ‘빡세다’고 하잖아요. 그때는 더 어마어마했어요. 이수만 선생님이 직접 모든 걸 관리했으니까요. 트레이닝 내내 이수만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지붕을 올리는데 기둥을 대리석으로 만드는 것과 이쑤시개로 만드는 것 중 어떤 게 더 오래가겠냐?”였어요. 기초공사를 제대로 받은 SM의 1호 연습생이었죠.

이수만 대표와의 관계가 각별했을 것 같아요. 저에겐 은인이죠. 본인이 키운 1호 가수라 애정이 남다르셨던 것 같아요. 트레이닝뿐만 아니라 식사 예절부터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곁에서 지도하셨거든요. 전 춤을 잘 춰서 뽑혔는데, 선생님께선 “춤도 춤이지만 네 목소리에는 동양인들이 가지기 힘든 쇳소리가 있어. 이를 잘 다듬으면 지금의 원석이 나중엔 반드시 보석이 될 거다”라고 하셨죠.

제가 지금까지 힙합 장르를 버리지 않고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저만의 장르를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 덕이 커요. “대중이 좋아하는 걸 급급히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잘해 대중이 따라오게 만들어라.”,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 말은 저의 신조이기도 해요. 그런 기준을 잡아주신 분이니 저에겐 음악적으로나 인생에서나 은인이죠. 중간에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릴 때도 저를 버리지 않은 분이셨고요. 실패는 과정이지만 포기하면 끝이라는 그분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저 자신에게 옳은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함께 오디션장에 있었던 친구, 함께 먹고 자고 했던 동료가 지금은 가요계의 큰 별과 아이콘이 되었어요. 그때는 예상조차 못 했어요. 함께 춤을 춘 백댄서고 친구들이니까요. ‘현진영과 와와’ 시절 와와 친구들로는 성재(듀스)와 션(지누션), 클론이 있었죠. 특히 클론은 가수를 할 줄 몰랐어요. 그 당시 군대를 갔기도 했고. 이현도나 성재는 와와에 있으면서 도움도 많이 줬고, 그런 의미에서 듀스에 애정이 많죠. 션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제가 ‘두근 두근 쿵쿵’으로 활동할 즈음이었는데, 앨범 활동이 마무리되면 데뷔할 계획이었어요. 근데 제가 그 시점에 형이 돼서 사고를 단단히 친 거잖아요.

션은 곧 자기 이름의 음반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하루아침에 완전히 공중에 뜬 거죠. 갈 데가 어디 있었겠어요. 감옥을 갔다 나와 집에 왔는데 빈집에 션의 LP가 한쪽에 쌓여 있는 거예요. 당시 DJ를 했었거든요. 무거우니까 미처 못 가지고 간 거죠. 지금도 그게 마음에 남아 있어요. 지금이야 션이 잘돼서 너무 좋지만 그때 생각이 가끔 나요.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면 션은 웃고 말죠. 그리고 성재. 내가 사고를 안 쳤으면 그 친구들(듀스) 데뷔하는 모습도 지켜봐주고,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혼자 미안해하며 삽니다.

아쉬운 시기가 많아요. ‘그때 그런 일만 없었더라도’ 같은 생각도 하나요? 현재의 내 모습으로 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나 그때 힘들었지’ 이런 생각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그저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과정이죠.

 


활동하던 시기에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대상이 있었나요? 제가 처음 데뷔했을 땐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 등이 가요계 대세였고 ‘흐린 기억 속의 그대’가 나올 당시엔 서태지가 휩쓸고 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그분들과 저를 함께 놓고 라이벌이라 하는데, 저는 영광이죠. 정말 좋은 시대에 함께 음악을 했던 파트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고를 달렸던 분들이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라이벌’의 개념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달라요. 라이벌이 곧 동반자예요. 우스갯소리로 지금의 엑소 같은 친구들도 제 라이벌이에요. 힙합이라는 장르를 함께 하고 가요계를 같이 짊어지고 갈 사람들이니까. 서로가 잘해야 자극도 받고 다 같이 발전하죠. ‘슬픈 마네킹’ ‘야한 여자’ 할 때 혼자 고군분투하느라 엄청 힘들었거든요. 뭐든 ‘하는 사람이 많아야 봐주기도 하고 발전도 있구나’라는 걸 그때 느꼈어요. 그런 면에서 라이벌은 굉장히 고마운 존재죠.

가수 이탁과의 활동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알려진 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음반은 잘됐어요. 당시 40만 장 넘게 판매됐다고 들었거든요. 물론 제가 또 사고를 치는 바람에 돈을 한 푼도 못 받긴 했지만요.(웃음) 방송과 행사 등 활동도 많이 했어요. 갱스터 힙합이라는 장르가 워낙에 생소할 시기였죠. 가사에 실제 깡패들이 쓰는 용어도 많이 넣었고, 감옥 얘기도 썼어요. 그때 제 삶도 음악 장르처럼 갔던 것 같아요. 철없던 시절이라 그 음악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앨범 타이틀곡이 ‘Stop drug, Stop ADIS’인데 마약하지 말라고 하면서 또 마약으로 갔잖아요. 여기가 미국이라고 생각했죠. 저도 참.

호시절이 언제라고 생각해요? 처음 1위를 했을 때죠.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2주 만에 1위를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게 바뀌어 있었어요. 그 전에 고생한 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요. 그 당시의 1위는 지금의 1위와는 비교 대상이 못 돼요. 스탠스도 스케일도. 그땐 음반이 1백만 장 넘게 팔리던 시대였어요. 가수들을 부르는 곳이 많았죠. 행사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저 또한 그 시대를 제대로 누린 사람 중 하나고요.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요? 빅뱅의 지디와 블락비의 지코, 이런 친구들과 한번 해보고 싶어요. 어쨌든 아이돌 음악계에서 본인들이 직접 곡을 쓰고 프로듀싱하는 능력을 갖춘 친구들이잖아요. 나름대로 개성도 있고 대중적인 인기도 있고….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아니면 재즈 음악 쪽의 거장 어르신. 제가 지금 하는 재즈힙합 장르도 결국은 재즈거든요. 그쪽에선 1세대 음악가로 존경받고 계시는 이판근 선생님과 작업 해보고 싶은 생각도 감히 가지고 있어요.

지금 하는 장르는 그 시절의 음악과 차이가 있나요? ‘슬픈 마네킹’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가지고 나올 때도 모험이었어요. 과연 한국에서 이런 음악(힙합)이 될까 싶었는데, 방향을 틀지 않고 꾸준히 하니까 되더라고요. 지금 제가 하는 재즈힙합 장르 역시 그때와 똑같아요. 재즈힙합은 재즈와 힙합의 접목이 아니에요. 원초적으로 따지면 재즈의 스윙에서 파생된 힙합인 거죠. 결론은 재즈예요. 재즈 안의 스윙 같은 장르인 거죠. 저는 이것을 공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꾸준히 말이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전성기 시절 ‘흐린 기억 속의 그대’처럼 대중이 재즈힙합을 알아봐줄 때가 올 거라 믿어요. 제가 더 잘해야죠. 같은 장르에서 뛰어난 누군가가 나와도 좋겠고.

롤 모델이라든가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 있을까요? 아버지요. 저는 아버지가 재즈계에서 그렇게 거장인지 몰랐어요. ‘소리쳐봐’ 할 때 알았다니까요. 돌아가신 후죠. 집에 항상 흐르던 음악이 재즈였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어요. 국내 최초로 미8군에서 연주하는 재즈 밴드를 만드신 분이에요. 선산 팔아 밴드 월급 줘가며 공연하고 또 흥을 즐기며 일생을 사셨죠. 인생을 살면 살수록 좋은 스승과 좋은 백그라운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어느 정도 그런 무기를 가졌다 생각하고요.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직도 풀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요. ‘무엇 때문에’를 곱씹지만 아직까지도 모르겠어요. 내 나이 오십이 넘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죠. 패기 어린 스물에 몰랐던 것을 지금 받아들였듯이 말예요.

CREDIT INFO

취재
박지현
사진
최항석
장소제공
프 츠커피컴퍼니
2015년 02월호

2015년 02월호

취재
박지현
사진
최항석
장소제공
프 츠커피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