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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남은자의 힐링법

엄마가 보고 싶은 딸은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문자를 전송하지만 엄마는 답이 없습니다. 자체 최고 시청률 24.1%를 기록한 SBS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한 장면, 돌아가신 엄마의 휴대폰으로 전송한 딸의 문자는 ‘엄마’ 한 번 부르고 힘내어 일어섰던, 그녀의 ‘힐링’ 의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생각만으로 마음 짠해지는 부모님과의 사별. 그분들을 떠나보낸 후, 심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어덜트 힐링’을 준비하세요.

On October 16, 2013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 8회 장면 중 사별한 엄마의 휴대폰으로 매일 문자를 보내는 딸.


part 1 부모의 죽음, 당신은 어땠나요?

*지난 8월 6일부터 16일까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20~50대 여성 총 513명을 대상으로 이지데이(www.ezday.co.kr) 리서치 코너에서 설문조사한 결과입니다.


Q.어머니(혹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은?


Q.어머니(혹은 아버지)가 떠난 후 가장 후회되는 일은?


죄인인 ‘자식’은 웁니다

“나는 엄마를 미워합니다. 엄마도 외할머니를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울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0여 년간 수발하던 중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야 했던 시인 신달자가 저서 <엄마와 딸>에 고백한 내용이다. 서로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아프게 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 부모는 늘 받아주는 ‘약자’, 자식은 상처를 주는 ‘죄인’이 된다. 그런 불공평한 부등호 공식에서 약자의 죽음은 죄인의 인생에 큰 아픔이자 상처로 남는다. 이지데이 리서치 코너에서 ‘부모의 죽음’과 관련한 설문조사 결과, 가장 후회되는 일이 ‘부모님 마음에 상처를 준 불효’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다. “말씀하실 때 귀 기울여 대답하지 못한 점이 죄송해요” “결혼 실패로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 것이 가장 후회됩니다” 등 ‘죄인’인 자신의 불효를 고해성사하는 듯한 답변이 많았다. 그 뒤를 이어 전화와 방문 등을 자주 하지 못했던 일,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못한 것, 등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후회되는 일로 꼽았다. 또한 돌아가신 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으로 화장할 때(혹은 시신 안치할 때), 유품 정리할 때가 상위를 점한 것을 보니 ‘이별한 바로 그 당시’를 잘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분노와 슬픔, 아픔의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섞이는 이 상태를 ‘정신적 외상’이라고 하는데, 특히 부모의 죽음 후 그 자식들이 많이 느끼는 고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 다음 장부터 소개되는 힐링 의식으로 이 시기를 잘 극복하고 새로운 행복을 맞이하기를!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아빠·엄마가 환하게 웃으실 수 있을 테니까.


part 2 남은 유족의 슬픔, 내면의 치유가 필요하다

인문학자 캐릴 맥브라이드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면 내면의 치유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부모와의 사별 후 찾아오는 심리적 고통은 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더 큰 병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기에 더 위험한, 부모와의 사별 후 힐링 액션.

1 슬픔과 분노, 마땅히 겪어야 할 감정
심리학자 J. 윌리엄 워든은 한 인간이 죽음을 애도하는 원리와 유족이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단계를 제시한다. 유족들은 가족의 상실로 인한 충격 후 여러 가지 감정적·인지적·신체적 충격을 겪는다. 감정적으로는 슬픔, 분노, 죄책감과 자기 비난, 불안, 외로움, 무력감, 그리움이 나타나고, 신체적으로는 위가 텅 빈 느낌, 가슴과 목의 답답함, 소리에 대한 과민 반응, 숨 막힘, 에너지 부족을 겪는다. 또 인지적으로는 불신, 혼란, 환각 현상 등이 나타난다. ‘슬픔’은 유족이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감정이다. 보통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 감정이 드러나지만, 어떤 이들은 폭력이나 음주 등의 행위를 통해 슬픔을 차단하려 한다. 하지만 마땅히 겪어야 할 슬픔을 허용하지 않는 행동으로 오히려 복잡한 애도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또 하나, 유족들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감정 중 하나인 ‘분노’는 두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데, 첫째는 사람이 죽음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며, 둘째는 가까운 사람을 잃은 뒤 일어나는 일종의 퇴행적인 경험(어릴 적 길에서 엄마를 잃었을 때 느꼈던 공포와 원망)에서 온다. 이 분노는 스스로 적절하게 인정해야 이겨낼 수 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많을수록 정서적·인지적으로 죽음에 대한 수용 태도가 성숙해지며, 친밀한 가족과 함께 부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심한 두려움이 경감됩니다.”라고 신라대 사회복지학과 최선화 교수는 말한다.

2 사별의 슬픔은 표현하는 것
예로부터 상례(喪禮)에서는 사별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했다. <논어(論語)>의 제19편 ‘자장(子張)’에서는 “상례는 슬픔을 극진히 할 뿐”이라고 했으며, 제3편인 팔일(八佾)에서는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볼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슬픔의 표출을 당연시했다. <예기(禮記)>에서도 “상에서 그 자신의 슬픔을 본다”라며 인간이 상을 당했을 때 슬픈 감정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이별을 느끼는 4단계 과정, 무감각-그리움-혼란과 절망-재조정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 볼비는 사별 및 상실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4단계로 설명한다. 무감각-그리움-혼란과 절망-재조정의 단계가 그것. 먼저 ‘무감각의 단계’는 갑작스러운 사별을 당했을 때 몇 시간(길게는 몇 주일) 동안 멍하고 어리둥절한 상태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두 번째 ‘그리움의 단계’는 좌절과 분노, 죄의식, 격렬한 슬픔 등의 감정으로 방황하는 시간이다. 심할 경우 식욕 감퇴, 불면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혼란과 절망의 단계’로 넘어가면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극단적인 피로감으로 잠을 많이 자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재조정 단계’는 점차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하는 시점이다. 슬픈 감정의 굴곡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4 배우자 사별 후 노인 20% 이상 우울증, 자식들이 노력해야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20% 이상이 사별 후 우울증을 앓는다고 한다. 노인 5명 중 1명이 자신도 모르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노인 우울증은 배우자와의 사별, 경제적 손실, 좌절 등 ‘상실’이라는 감정 때문이며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심각한 경우 자살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 심리 전문가들의 설명.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부모를 위한 자식들의 따뜻한 배려와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tip 유족들을 위한 힐링 서비스

    1 웃음테라피, 효원힐링센터
    유족들을 위한 ‘유머와 웃음 힐링 프로그램’이 눈에 띈다. 유머테라피, 웃음테라피, 눈물테라피로 나뉜 프로그램으로 전문 강사가 참석자들에게 웃음을 주면서 건강하게 사는 법을 알려준다. 일상 속에서 웃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웃음으로 얼마나 건강해질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더불어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알려주는 ‘힐다잉’ 프로그램도 접할 수 있다.
    문의_www.hwhealing.com

    2 검사부터 상담까지, 유비코가족상담센터
    연세대학교 가양종합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가족상담센터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가족 관계 등 각종 문제에서 일어나는 불안한 심리를 치유하고 삶의 미술치료 또는 놀이치료로 치유받을 수 있다.
    문의_www.yonseigayang.or.kr


part 3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이별, 그리고 아름다운 극복 스토리

“얘, 영정사진 하고 집문서 저기 넣어놓았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도 귀담아 듣지 않고 어느 서랍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고 꺼내 보지도 않았다. 죽음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치밀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돌아가신 날 새벽 어머니가 영정사진이라고 따로 해놓은 사진을 찾아내지 못하고 작업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의 사진을 그대로 떼어 가슴에 안고 나왔다. 따뜻한 봄볕을 쬐고 있는 듯한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표정이었고 그 따뜻함이 스미면 미움도 아픔도 고통도 녹을 것 같았다.

-박완서 문학앨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中


소설가 박완서의 딸, 엄마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다
수필가 호원숙씨

고즈넉한 아치울 마을,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짓고 살았다는 노란 집 앞에 도착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이자 수필가 호원숙씨(59세)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돌아가신 뒤의 심경에 대해 묻는다는 것이 생채기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아닐는지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벨을 눌렀다. “어서 오세요. 마음에 드는 슬리퍼로 신으시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고 박완서 작가의 딸 호원숙씨는 어머니를 닮은 환한 미소로 손님을 맞았다. 그녀는 생전에 책으로 다 내지 못한 어머니의 원고를 추려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산문집을 출간했다. 호원숙씨는 어머니 이름으로 발간되는 책의 편집위원이 되어 서문을 쓰기도 하고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말을 자신의 책에 실으며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딸이 준비한, 엄마의 온기 담은 전시회
작년 5월엔 박완서 작가의 1주기를 맞아 영인문학관에서 <엄마의 말뚝>이라는 유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딸들에게 꼭 맞는 원피스를 지어주던 재봉틀, 생전에 자주 입던 옷, 작은 돋보기가 달린 휴대폰부터 글을 쓰다 원고지에 급하게 남긴 쪽지까지 고인의 생활이 그대로 묻은 물건들이다. 유품 중에는 유독 쪽지가 많은데, 연재소설을 쓰다 급히 외출하면서 원고지에 써내려간 쪽지는 작품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문체가 그대로 살아 있어 하나하나 읽는 재미가 있다. 엄마가 외출한 동안 동생들과 끓여 먹으라고 수제비 뜨는 방법을 남긴 메모, ‘케이크를 똑같이 다섯 조각으로 나누어놓았으니 싸우지 말고 먹어라’ ‘할머니 큰 소리 안 내게 말 잘 듣고 연탄불 꺼트리지 말아라’ 등 따뜻한 마음과 세심함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호원숙씨는 쪽지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늘 손을 가만두지 못하셨어요. 재봉틀로 옷을 지어주시고 식구들 먹는 요리에도 정성을 기울이셨죠. 어머니가 젊은 시절엔 집에서도 한복을 입고 계셨는데 부엌을 들락날락하느라 한복 치마에 스치듯 밴 음식 냄새가 아직도 생생해요.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그립죠.”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쓸 때면 그때마다 꼭 한 번씩 울게 된다는 호원숙씨는 애잔하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았다.

맏딸의 뒤늦은 고백
어머니가 작가가 되고 문학의 어머니로 불리게 되면서 딸 호원숙씨는 내심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운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담낭암 투병 기간이 어쩌면 애틋한 모녀만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호원숙씨는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자 그동안 내비치지 못했던 속마음을 후련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늘 어머니가 어려웠고 속마음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내보이는 동생들이 부러웠어요.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내가 작가로서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지만 나는 내 능력껏 했고 어머니 때문에 못한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어요.”

엄마의 뜻대로
호원숙씨가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한 것은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부터였다. 어머니가 보내온 문자메시지를 가끔씩 열어보고 어머니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만지작거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다 서너 달이 지나서야 어머니 명의의 휴대폰을 해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호원숙씨의 휴대폰에 저장된 어머니의 번호는 이제 다른 사람의 번호가 되었다.
“우리 집이 문학관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네가 이 집에서 살아라. 너의 집으로 살아라”라는 어머니의 뜻대로 호원숙씨는 어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유독 잔인했던 8월이 오면 6·25 전쟁 후 힘든 기억, 사고로 하나뿐인 아들을 떠나보낸 아픈 기억에 늘 힘들어하셨는데, ‘이제 안식을 취하시니 지내기 수월하시겠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가 살뜰히 돌보던 정원을 관리하는 것도 호원숙씨의 몫이 되었다. 어머니가 무릎을 꿇어가며 애지중지 가꾼 정원은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태어난 손녀의 뜰이 되었다.
“손녀가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어요. 집에 놀러오면 어머니 사진을 가리키며 노(老)할머니라고 아는 체를 하지요. 그 아이 보여주려고 어린이날 즈음 피는 튤립도 심고 넘어지지 말라고 잔디도 더 자주 깎아요. 과거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대신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주는 거지요. 어머니가 생전에 ‘사랑했던 것밖에는 남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상사화가 만개한 여름, 어머니의 정원을 그대로 간직한 노란 집에서 딸이 어머니의 모습으로 글을 쓴다. 제목은 어머니와 딸의 소중한 공간, ‘노란 집’이다.

1 호원숙씨가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상사화를 보살피고 있다. 꽃이 필 때 잎은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상사화라 불리는 이 꽃은 박완서 작가의 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라고 있다.
2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즐겨 입던 옷과 집을 비우며 남긴 쪽지. 호원숙씨는 어머니의 작은 유품도 훼손되지 않도록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3 1979년 보문동 집 마당에서 박완서 작가와 네 딸의 모습. 이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도심 한옥 마당에 잔디를 심고 각종 꽃을 키웠다.
4 박완서 작가 타계 후 출간된 유작과 그녀의 문학을 기리는 문인들의 추모 도서. 호원숙씨는 책이 발간될 때마다 어머니 침대에 올려둔다.

  • advice 어머니 돌아가신 후

    1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유품 남기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이 당장 힘들다고 애써 잊거나 흔적을 없앨 필요는 없다. 호원숙씨는 어머니가 자주 입던 옷, 재봉틀 등 어머니의 사랑과 생활이 녹아 있는 물건을 보관했다가 어머니가 그리울 때 꺼내어 본다. 비싸고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도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 있는 낡은 물건은 추억을 되살려주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또한 엄마의 부재를 달래는 위로의 오브제이기도 하다.

    2 ‘있을 때 잘해’ 남은 가족과 후회 없이 사랑하기
    호원숙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데 감정을 모두 소모하지 말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쏟아 부으라고 조언한다. ‘사랑했던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유언처럼 기억되기 때문이다. 호원숙씨는 어머니를 꼭 닮은 손녀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울어야 삽니다’
방송인 김혜영씨

“늘 옆에 있을 것 같았던 ‘공기 같은’ 엄마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 속에 손을 허우적거려보지만 ‘엄마, 엄마, 엄마’는 잡히지 않아요.” MBC 라디오 <싱글벙글쇼>의 ‘해피 바이러스’ 진행자 김혜영씨(52세)는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할 만큼 여전히 눈물겹다. 2011년 10월, 그녀의 어머니는 예고 없이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 “당뇨가 있던 엄마는 치매 환자인 아버지를 일거수일투족 살피며 거둬야 했어요. 그러니 제때 식사도 할 수 없고, 병원조차 제대로 챙겨 다닐 수 없었겠죠. 그것이 화근이 된 것 같아요. 사실 우리 남매들은 환자인 아버지를 걱정하고 챙기는 마음이 컸지 엄마가 느꼈을 마음의 병은 보지 못했어요. 매일 목욕시키고 식사 챙기는 일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머릿속을 채운 건 그동안 짜증 내고 화풀이했던 순간, 인상 찌푸리며 함부로 내뱉은 말, 약속을 어긴 기억뿐이더란다. 자식으로서 한 게 뭔지 원망스러울 만큼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들이 팔십 넘어서는 삶의 에너지를 얻는 게 ‘자식 자랑’이라잖아요. 근데 저는 엄마가 그러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한번은 택시를 같이 탔는데, 엄마가 기사님께 ‘오늘 귀한 손님 태웠습니더’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 엄마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하지 말라고 인상 찌푸리며 화를 냈어요. 요즘 택시만 타면 그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파요.”
길 가다가 엄마와 닮은 사람을 보면 아닌 줄 알면서도 따라갔다가 실망 끝에 대성통곡을 하고, 꿈속에서 만난 엄마가 보고 싶어 ‘꺼이꺼이’ 토할 정도로 울기도 했다. 울고 나면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 말 그대로 ‘울어야 삽니다’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남매들이 모여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면서 추억에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힐링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기부할 수 있는 유품은 기관에 보내고 대부분은 불에 태웠지만 어머니가 손수 만든 삼베 모시옷들은 그분의 혼 같아서 자매가 나눠서 소장하기로 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가장 크게 느낀 건 아버지라는 큰 나무가 선사하는 그늘의 감사함이에요. 나중에 남매가 둘러앉아 ‘우리는 아버지한테 잘했잖아. 그러니 후회 없잖아’라고 회상하도록 아버지한테 잘하려고 노력해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소소한 일상을 같이 일구어가는 가족의 소중함을 사무치게 알려주었다.

김혜영씨는 방송국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떠난 캠핑 여행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버지의 부재, 가족의 기적을 보다
주부 유소정씨

유소정(44세)씨는 얼마 전, 아버지의 10주년 추도 미사 예배를 드렸다. 담도암으로 1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 2003년 8월 14일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며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 손을 마주 잡고 따뜻한 위로를 나누었다. 10년 전 예고 없이 닥친 아버지의 부재는 유소정씨 가족의 삶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아버지는 늘 다정한 분이셨어요. 엄마만큼 살갑게, 친하게 지내진 않아도 아버지는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응원해줄 것 같은 든든한 존재였죠. 생전 잔소리 한 번 안 하시고 우리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조건 적극 지원해주셨어요.”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으며 가정을 꾸려가는 하나하나의 과정마다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담도암 선고를 받았다. 평소 등산이나 조깅 등 운동을 즐기던 건강한 분이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암 선고를 받은 뒤 일주일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부재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정신을 차린 뒤 가족들과 모여 아버지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집에서 ‘식이요법’을 하며 편하게 모셨는데, 의사가 선고한 3개월의 기간은 넘겼지만 결국 아버지는 1년간의 투병 생활 후 세상을 떠나셨다.
“암 선고 후 1년 동안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아요. 까다로운 암 식이요법을 챙기는 엄마가 오히려 더 안타까웠지요. 매일 임신한 사람처럼 뭐가 먹고 싶으니 해달라고 했다가 싫어졌다고 안 드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고요.”
아버지 임종 후 원망과 후회, 미안함 등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 사업의 여파로 집에 빚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금 당장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벽이 더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홀로 남은 어머니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알기에 그녀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채무 관계 정리, 상속 포기 등의 절차를 밟아 경제적 위기를 해결해야 했고, 엄마의 마음을 챙기는 데 여력을 다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가족에게 너무 다른 현실을 가져다주었지만 한편으론 아버지가 그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을 그 답답한 심정을 떠올리며 마음이 짠해지더라고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유소정씨의 가족은 많이 성숙했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것도 가족,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것도 가족이라는 것,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진실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건 빚도, 슬픔도 아닌 가족의 기적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가족들과 모여 아버지가 남기고 간 추억을 행복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그 가족이라는 힘 덕분이다.

  • advice 아버지 돌아가신 후

    1 ‘혼자 되신’ 엄마의 빈틈을 채워라
    홀로 살아가야 할 세월에 대한 어머니의 상실감은 생각보다 꽤 크다. 유소정씨의 어머니는 은행 업무나 등본 떼는 일 등 대부분의 바깥세상 일을 아버지가 다 해주셨기 때문에 졸지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된 느낌이었단다. 세 딸이 각자 역할을 분담하여 어머니를 챙겼다.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는 유소정씨는 은행 업무부터 동사무소 일까지 차근차근 시작했다. 즉 아버지의 부재로 겪어야 하는 어머니의 부족한 삶의 부분을 자식들이 배려하며 잘 챙겨야 한다.

    2 가족 모임을 자주 가져라
    부모와의 사별 후 가장 힘이 되는 건 가족뿐이다. 유소정씨 가족도 아버지와의 사별 후 4남매가 모여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녔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식사 모임을 갖자는 약속도 정했다. 점점 횟수는 줄지라도 돌아가신 몇 개월 동안은 서로 힘이 돼주는 시간을 갖자.

헤어·메이크업_누오보(02-515-8123) 장소협조_루다파파스(02-547-3366)


엄마의 유품으로 따뜻함을 연주하다
플루티스트 나인애씨

“어머니가 자주 어지럽다고 하셔서 병원에 가보니 ‘뇌졸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만 해도 약 잘 먹고 치료만 잘하면 6개월 안에 나아진다고 했어요. 하지만 병은 악화되었고 그로부터 1년 후 뇌종양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나인애(51세)씨는 어머니를 떠올리면 수틀 앞에 앉아 ‘한 땀 한 땀’ 수놓던 그 작고 야무진 손부터 생각난다. 어머니의 솜씨 덕분에 나인애씨의 집은 늘 인기가 좋았고,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의 그 야무진 손재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딸은 자라서 플루트를 전공했고, 어머니 역시 그녀의 플루트 연주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결혼 후 분가해서 살던 나인애씨는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왔다. 마음 착한 남편도 장모를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했고 이후 가족의 힘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뇌에 물이 차 치매 증상이 왔다. 딸을 ‘언니’라 부르고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머릿속 지우개는 귀까지 어둡게 했고, 모녀는 스케치북으로 대화를 해야 했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없다” “있으면 말해. 해줄게” “돈 드니까 하지 마. 성가시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딸을 위하셨다.
장례식 땐 정신없더니 집에 오고 나서야 어머니의 부재가 사무치게 다가왔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 어머니 방문을 열어보았고, TV에 어머니 연세쯤 되는 노인이 나오면 왈칵 눈물을 쏟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매일 납골당을 찾아 엄마를 만나야 마음이 안정될 정도였는데, 매일 가던 것을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횟수를 줄이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리고 비로소 엄마의 유품을 하나둘 정리할 수 있었다. 3년 전에는 고이 간직해오던 엄마의 금시계를 처분해 고운 음색의 플루트를 하나 장만했다.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플루트 연주를 그만두었는데 생전에 그녀의 연주를 자랑스러워했던 엄마를 위해 다시 플루트를 잡고 싶었다. 엄마의 유품을 보태어 마련했으니 그분이 사주신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연주할 때마다 어머니를 느낀다. 지역 앙상블 활동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멋진 드레스를 입고 정기연주회 무대에도 오른다. 어머니의 유품이 깃든 플루트로 좋은 일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 독거노인 후원 자선음악회에 재능기부를 하고 복지관 어르신들 생신잔치에 축하 연주를 하기도 한다. 즐거운 잔칫날엔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셨던 ‘섬마을 선생님’과 ‘여자의 일생’을 연주한다. 그렇게 그녀는 늘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연주한다.

어머니의 낡은 시계는 나인애씨의 새 악기가 되어 좋은 뜻으로 연주되고 있다.

  • advice 어머니 돌아가신 후

    1 가족과 아픔 나누기
    자존심 세고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전형적인 맏딸 나인애씨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면서부터 조금씩 마음을 표현하고 힘들 땐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웠다.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꼼짝하지 못할 때면 남편에게 어머니 병원 좀 모셔다 드리라고 부탁했고 남편은 마음을 다해 도왔다. 남편은 지금도 나인애씨의 생일날 친정엄마 대신 미역국을 끓여주고 집에 어머니가 계시던 풍경을 추억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2 납골당(혹은 묘지) 앞에 방명록 만들기
    나인애씨는 엄마가 외로울까 봐 엄마의 납골당에 노트와 펜을 매달아 방명록을 만들었다. “언니, 나 오늘 생일인데 언니가 끓여준 미역국이 너무 먹고 싶어.” “할머니 저 이제 학교 들어가요.” 찾는 가족이 남기는 메시지는 그녀에게도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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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정신적 유산, 삶을 이길 희망을 얻다
소설가 김현경씨

“장례식 전 엄마의 몸을 씻겨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묶는 염습을 보는데, 다시는 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죠.”
7년 전, 고작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김현경씨(33세)는 아직도 엄마를 생각하면 애틋하고 마음이 짠하다. 살아생전에 소울메이트라 할 정도로 친했던 모녀는 그 어떤 친구보다 더 가까웠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엄마가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서울에 살던 그녀는 당장 엄마의 암 투병을 돕기 위해 대전으로 내려갔다. “병세가 악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어요. 시를 좋아하는 엄마는 시를 썼고, 그 옆에서 저는 간병 일기를 썼어요. 엄마는 병간호한다고 내려온 제가 대견하셨는지 자주 ‘너에게 평생 받을 효도를 한 번에 다 받고 간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제가 더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1년 반의 투병 끝에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내드리고 다시 서울로 상경한 김현경씨. 그때가 미치도록 외롭고 쓸쓸했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고백한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지는 날에는 항상 꿈속에 엄마가 나타났다. “하루는 꿈속에 나타난 엄마에게 물었어요. 엄마가 죽었다는 거 꿈속이라도 다 알고 있는데 왜 자꾸 나타나느냐고. 그랬더니 엄마가 ‘네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져서 ‘난 괜찮으니 이제는 가도 된다’고 하며 엄마를 등 떠밀어 보냈어요.”
죽어서까지 딸이 걱정스러워 꿈속에 오신 엄마를 위해 다시 행복한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 첫 번째 일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떠올라 울었던 일, 예전에 엄마와 함께 나눈 추억 등 편지의 소재는 무궁무진했고 ‘From 딸’이라는 화룡점정을 찍고 나면 하루가 잘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마음도 단단해졌고 바빠지면서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굳이 편지로 써서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마음속 엄마를 느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번은 동생과 떡국을 끓여 먹는데 이상하게 떡국이 너무 맛없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날 밤 엄마가 동생 꿈에 나타나 떡국에는 마늘을 넣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시더라고요.” 꿈속에 나타난 엄마의 이야기도 이제 맘 편히 웃으며 꺼내는 그녀. 엄마의 죽음으로 경험한 감정과 일들이 자양분이 되어 소설가로서 한층 진지하고 진심이 담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엄마는 딸 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에게 또 다른 큰 가르침을 남기고 간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6년째 되던 해, 엄마 생일에 쓴 편지. 김현경씨 스스로도 위안이 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advice 어머니 돌아가신 후

    1 아버지를 이해하라
    김현경씨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뭐든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하자며 부족함 없이 경제적 지원을 하셨다. 하지만 장례식에서조차 아빠의 모습은 무뚝뚝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취해 돌아오셔서 크게 소리 내여 우시는 아버지를 봤다. 엄마의 죽음을 속으로만 삼키던 아버지가 안쓰러워 김현경씨도 같이 울었다.

    2 말 대신 마음으로 고백한 편지
    아픔은 감추기보다 드러낼 때 더 빠르게 치유된다. 입 밖으로 내뱉는 대화가 쉽지 않다면 혼자 글을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김현경씨는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고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엄마에게 하는 약속, 엄마를 위한 시 등 형식은 자유다.


엄마 떠난 후, 남편의 위로로 일어서다
주부 남혜숙씨

“어느 날 엄마가 폐암이래요. 그런데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갑작스럽게 20일 만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남혜숙씨(42세)는 처음엔 이 모든 것을 부정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손을 붙잡고 같이 걷던 엄마가 세상에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2006년 7월, 세상을 떠난 엄마.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맏딸인 그녀는 큰 충격에 빠진 동생을 매일 지켜봐야 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우울증까지 온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라 여겼다. 정작 자신의 슬픔은 외면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슬픔은 참을수록 배가 되고, 피할수록 더 큰 산으로 돌아오는 법. 동생들을 챙기고 돌아오면 그녀는 그제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때 가장 힘이 되어준 건 사랑하는 남편이다. 친정 식구들을 챙기느라 소홀했던 육아와 집안일도 남편이 대신했고, 특히 할머니 손에서 자라 충격이 컸을 아들에게도 남편이 매일 “괜찮다, 할머니 좋은 곳으로 가신 거다”라며 위로해주었다. 또한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그녀가 혼자 울고 싶을 때는 모르는 척, 슬쩍 방을 나가는 등 남편의 세심한 배려로 남혜숙씨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남혜숙씨는 엄마의 흔적을 간직하고 싶었다. 의상실을 운영하던 엄마가 손수 만든 옷, 구두, 액세서리, 향수 등 엄마의 체취가 담긴 물건을 자신의 옷장에 보관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곳곳에 놓인 유품을 보며 추억을 되살리기도 하고, 자신이 착용하고 나가기도 한다. “엄마가 자주 사용하던 액세서리를 하는 날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거든요. 엄마가 곁에서 지켜본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행운의 아이템이죠. 작년 말 ‘35세 이상 진정한 미인을 뽑는’ <우먼센스> K-QUEEN 콘테스트에도 엄마가 신던 구두를 신고 출전했어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났어요.”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글썽해지던 그때를 지나 이제는 엄마와 자주 갔던 추억의 장소에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온다. 서울에 사시던 엄마는 가끔씩 바람을 쐬러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 코스가 그대로 이제 남편과 아이, 동생들과의 여행길이 되었다. 가족의 관심과 노력, 엄마는 언제나 함께 있다는 믿음으로 다시 삶의 힘을 얻고 있는 남혜숙씨. 엄마의 길을 따라 걷고 싶었던 딸은 엄마의 업을 물려받아 광화문에서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엄마의 한때를 떠올리며 엄마의 물건 속에서, 엄마의 직업 속에서 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K-Queen 콘테스트에 신고 나간 엄마의 남색 구두. 엄마가 즐겨 사용했던 향수와 머리핀도 간직하고 있다.

  • advice 어머니 돌아가신 후

    1 죽음과 관련된 책 읽기
    남혜숙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죽음과 관련된 책을 보며 오히려 심리적 안정을 얻었다. 남편이 권해준 방법으로, 일시적인 도피가 아닌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2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의 유품 공유
    엄마가 돌아가신 후 결국 가장 가까이 남아 있는 건 유품뿐이다. 어머니를 추억할 만한 무언가를 곁에 두는 것이 좋은데, 특히 엄마와 딸이 함께 만들었거나 완성한 추억의 물품이 가장 애틋하다. 남혜숙씨는 의상실을 운영했던 어머니가 물려주신 옷과 구두, 액세서리를 가지고 있다.

part 4 더 늦기 전에, 후회 없는 임종 준비하기

부모와 이별을 겪게 될 사람들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을 정리했다. 무엇보다 시간 날 때마다 부모를 찾아뵙는 것이 최고이고, 인간적으로 친숙해지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물어봐야 할 것’을 정리하는 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이별법이라고 한다. 네이버 대표 카페 ‘레몬테라스’에서 주부들의 리얼한 사연도 받았다.

영화 <친정엄마> 중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와 이 사실을 받아들인 딸이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셀카’를 찍는 장면.

손 편지 쓰기
누구나 한 번쯤은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를 받거나 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혹은 이웃에게 정성을 다해 마음을 전하는 일은 소소하지만 황홀한 기적이리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는 상실감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 후배는 ‘너무 화가 났었다’고 한다. “언니, 인생은 부모를 잃은 자와 아닌 자, 둘로 나뉘는 것 같아. 부모 잃은 슬픔은 아직 잃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꿈에 차들을 다 부수고 다녔다니까.”- <엄마 살아 계실 때 함께 할 것들>(신현림 지음, 흐름출판) 중에서.

누울 자리 살피기
홀로 계신 친정엄마는 딸만 둘이라 특히 명절 때 많이 외로워하시고 돌아가신 다음에 장례나 제사에 대해 불안해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 딸들이 사는 수도권 쪽의 경치 좋은 수목장을 사서 모시고 갔는데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오래 산다고 하는데, 수목장도 미리 준비해서 친정엄마가 오래오래 행복한 생활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ID 하늘나리2

아이로 돌아가 여행 가기
흔한 이야기지만 부모님과 여행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더 슬펐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가는 여행은 부모님이 손주들 봐주시는 여행이지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긴 힘들더라고요. 남편과 아이 빼고 결혼 전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여행하면서 좋은 추억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 ID acutting74

부모님과 셀카 찍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 사진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끼리는 셀카도 찍고 아이 사진은 출산 전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찍기 바쁘지만 부모님에겐 그렇지 않잖아요. 돌아가시고 보니 그 흔한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별로 없다는 게 정말 슬펐어요. 그래서 요즘은 엄마와 사진을 많이 찍어요. - ID 엘모씨

유언, 기록으로 남기기
돌아가시기 전에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으면 꼭 기록해두거나 휴대폰으로 녹음을 해두세요. 아버지가 유언을 하실 때 슬픔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듣지 못한 게 한이 됩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마지막 말씀을 되새기고 나중에 아이에게도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홍인혜


"어머니가 얼마 전 외국으로 장기파견 나가는 오빠를 공항까지 배웅하고 오셨는데 30년 만에 오빠를 안아보신 것 같다고 하네요. 참 좋았다며 두고두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부모님 계실 때 따뜻하게 자주 안아드리세요.-ID 허거참"

가까운 친구, 친지들 연락처 알아두기
아버지 주변 지인분들 전화번호를 알고 계시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주변 분들께 알려야 하는데 친구분들과 친척들의 연락처를 몰라 애먹었어요. 어느 분까지 연락을 드려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저처럼 어머니가 안 계신 상황이라면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해요. - 이정현

장수 기원의 의미, 수의 선물하기
엄마가 돌아가신 후 수의를 마련해놓으신 걸 알았어요. 제가 챙겼어야 하는데 자식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 준비해놓으셨더라고요. 윤달에 부모님께 수의를 선물하는 것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의미라네요. 미리 알았더라면 저도 준비해놓을 걸 하고 후회했답니다. - ID 서나맘

부모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해드리면 좋은 것. ‘구나구나 대화법’이에요. 엄마가 하고 싶던 많은 이야기를 편하게 들어드리지 못해 너무 아쉽고 화냈던 일이 죄송스러워요. 엄마가 속 얘기할 때 “그랬구나, 우리 엄마 속상했겠구나” “그랬구나, 우리 엄마 피곤하셨겠구나” 하고 들어야 해요. 이해하려 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주는 대화를 해보세요. - ID 띵구리

CREDIT INFO

기획
김은혜,이윤정
사진
이호영
2013년 09월호

2013년 09월호

기획
김은혜,이윤정
사진
이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