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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다리 수영왕’ 세진이 어머니 양정숙,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3가지 인생 메시지

세상에 나올 때부터 한쪽 팔과 두 다리가 불안정한 ‘선천성 무형성 장애’를 갖고 태어난 세진이. 방송을 통해 ‘로봇다리’라는 별칭을 얻으며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그가 이번 입시에서 성균관대 수시전형에 합격했다. 세상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는 세진이와 어머니 양정숙씨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On October 10, 2013

날 때부터 두 다리와 한 손이 불편한 김세진(16세). 선천성 무형성 장애아로 남들이 ‘로봇다리’라고 부르는 의족을 하고 생활하지만, 그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난 수영선수다. 당시 희귀한 장애를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어머니 양정숙(45세)씨에게 공개 입양된 이야기는 이미 방송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4년여 전 MBC 휴먼다큐 <사랑>을 통해 수영선수로서 몰라보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그가 최근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 수시전형에 최연소 입학, 첫 장애인 선수 입학 기록을 세우게 됐다. 세상의 모진 시선과 편견을 이겨낸 그들의 희망 메시지를 들으러 화성 자택으로 향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너무나 밝은 얼굴로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세진이와 싱글맘으로서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어머니의 모습은 감동과 눈물 그 자체였다.

간절함의 결과, 성균관대 최연소 입학

“너무 대견해요. 세상의 편견에 상처받고 부당한 대우에 눈물로 지새운 날이 많았는데, 한꺼번에 다 보상받은 기분이에요. 무엇보다 우리 세진이가 스스로 원하는 삶을 찾아서 기뻐요.”
만 열다섯 나이에 대학생이 된 세진군은 입학을 앞두고 하루하루가 벅차고 떨린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2012년 런던올림픽에 장애인 국가 수영 대표로 출전하는 게 목표라고 말해온 세진이. 그런 그가 올림픽 출전을 포기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올림픽 무대만을 꿈꿔왔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택했어요.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학생이자 수영선수여서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야 하는데, 해외 시합이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못 봤어요. 그러면 0점이 나오는 거죠. 체육 실기시험 때도 축구 드리블을 봐서 0점을 받고요. 당시 사정과 신체 조건상으로 볼 때 제가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었고, 그럼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돌아가겠지만 검정고시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하게 된 거예요.”

사실 세진이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원하는 것이 분명하고 목표가 뚜렷해지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반드시 해내곤 했다. 그렇게 세진이는 밤낮 안 가리며 공부하고 독서실에도 가고, 학원 가고 수영까지 하면서 버텼다. 그 결과 1년 만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평균 90점 이상의 성적으로 이수했다. 영어와 수학은 만점을 받았다.
“지금까지 세진이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어요. 단,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지게 했어요. 이도저도 아니게 공부할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고민하게 했어요. 그랬더니 스스로 학원을 끊고 독서실에 다니고 시간을 분배해가며 공부하더군요.”
수영만 하던 세진이가 공부를 하기엔 여간 어렵지 않았을 터. 세진이는 ‘간절함’이 자신을 공부에 올인하게 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토록 좋아하는 수영을 통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번에 입학한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 학부에서는 스포츠마케팅과 스포츠심리학은 물론 지도자 양성과 맞춤형 교육과정 등이 가능하다. “제 꿈은 IOC 위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스포츠마케팅과 스포츠심리학 쪽을 공부해서 앞으로 저처럼 힘든 환경에서 꿈을 펼치지 못한 친구들의 꿈을 키워주고 싶어요. 열정만 있다면 장애는 문제되지 않으니까요.”

세진이도 처음부터 수영을 좋아한 건 아니다. 가뜩이나 짧은 다리는 수영장 물을 더 깊게 느끼게 만들었다. 이제 세진이는 수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물속에서라면…

가슴으로 낳은 아들, 눈물로 키우다

잘 알려졌다시피, 세진이는 양정숙씨가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다. 5살 때부터 한의사이던 아버지 손을 잡고 봉사활동을 다닌 그녀는 보육시설에서 생후 5개월 된 세진이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찌릿한 감정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던 아이가 그녀를 보고는 방긋방긋 웃었고, 다른 사람 손에 들리면 목청 터져라 울던 아이가 그녀가 안으면 울음을 뚝 그쳤다. 집에 와서도 그녀는 세상이 떠나갈 듯 울어대던 아이의 눈망울이 눈에 밟혔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매주 아기를 보러 갔고, 1년 뒤 어렵고 복잡한 절차를 극복하고 공개입양을 했다. 세진이를 입양하면서 그동안 평탄치 않던 결혼생활도 정리했다. 양정숙씨와 딸 은아씨, 그리고 세진이 이렇게 세 사람이 한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싱글맘으로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한다는 게 일반인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는 사회적으로 장애인 앵벌이가 한창 문제가 됐을 때였다. 전과 조회 등 적정 수준을 넘는 취조를 받았다. 참다못한 그녀는 한 시사 프로그램에 이 같은 이야기를 제보했고, 6개월간 싸워온 입적 문제는 그 방송이 나간 후 단 몇 시간 만에 해결됐다. 아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세상의 편견에 가로막혔던, 씁쓸한 사건이다.
이후에도 세진이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세상의 모진 시선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세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은 혀를 차며 ‘이 아이는 평생 걸을 수 없다’ ‘엄마가 돈이 많으면 한번 걸어보게 하라’는 식의 말만 했다. 눈물을 훔치며 병원에서 나온 그녀는 바로 신발 가게에 가서 세진이의 신발을 샀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우리 세진이, 엄마가 꼭, 반드시 걷게 해줄 거야….’

몇 군데 병원에서 차갑게 거절당한 뒤 그녀는 전국에 있는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세진이가 걸을 수 있는 방법도 찾았다. 원래 세진이의 오른쪽 무릎 부분에는 발 모양의 살덩이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발가락이 한 개 달린 그 발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웠지만 의족을 신으려면 그것을 떼어내야 했다. 뭉쳐 있던 한쪽 손을 가르는 수술도 받았다. 요구르트 병이라도 혼자서 집을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든 수술의 연속이었다. 세진이는 수술할 때면 늘 “자고 올게요, 엄마”라고 말했다. 자고 나면 다 끝난다는 간호사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4시간 동안 한참을 울고 나면 수술은 끝이 났다. 이후 4차례에 걸쳐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는 수술을 받은 후, 결국 세진이는 ‘로봇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편견에 맞서는 건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세진이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치원에서는 30번 넘게 퇴짜를 맞았고, 초등학교도 5번이나 전학을 했다. 등교 거부에 왕따, 망치로 세진이의 다리를 때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집에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쳤지만 세상 밖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세진이는 매일 밤 울면서 ‘착한 아이가 될 테니 다리가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제 어릴 적 꿈은 사람이 되는 거였어요. ‘팔다리 없는 애가 어떻게 사냐’ ‘언제 사람 되냐’는 이야기를 항상 듣다 보니, 저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 ‘난 왜 태어났을까’ ‘왜 남들처럼 두 다리로 걷지 못하고 뛰지 못할까’ 하면서 자책하곤 했어요. 당시엔 몸도 마음도 너무나 많이 아팠던 것 같아요….”

세진이가 학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많은 힘이 된 사람은 바로 누나 김은아(24세)씨였다. 누가 세진이를 괴롭힌다는 말을 들으면 세진이 손을 잡고 그 아이 집으로 달려가 따졌고, 세진이와 함께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기도 했다. 집안에 아빠가 없다보니 동생을 자신이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일찍 철이 든 은아씨는 엄마가 일하러 가면 세진이를 포대기에 업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세진이에게 누나는 ‘제2의 엄마’다.

“다른 아이들이 한글을 배울 때 저는 엄마에게 한글은 물론 다양한 욕도 배웠어요.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차피 들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런 나쁜 말에 빨리 익숙해지는 게 편하니까요. 그래서 누나와 역할극을 많이 했어요. 누나가 ‘너 장애인이지? 너 다리가 왜 그래? 네 다리 로봇이지?’ 하면 제가 ‘응. 난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이 태어났어. 그래서 의족을 끼고 걸어야 해’라고 대답하는 거죠. 실제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처받지 않도록 단련한 거예요. 저희 엄마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네 귀에 약을 바르면 그 어떤 말을 들어도 너에게 약이 될 것이고, 네 마음과 네 귀에 독을 바르면 그 어떤 이야기도 독이 될 것’이라고. 뭐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세진이.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 양정숙씨는 믿는다. 이러한 과정을통해 사람들이 세진이를 특별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조금 아픈 사람으로 봐줄 거라고. 그렇게만 된다면 세진이의 아픈 상처도 결국엔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이다.

재활 치료로 시작한 수영, 꿈이 되다

수영은 세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인생의 목표다. 재활치료 때문에 시작한 수영이 이제는 세진이의 꿈이 된 것이다. 세진이는 물속에서는 자유로워지는 모습에 행복함을 느낀다. 물속에서만큼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박태환 선수보다 멋진 수영선수가 되어 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을 꼭 이루겠노라 다짐한다.
“전 물에 떠 있을 때가 가장 자유로워요. 제가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꿈을 꿔요. 적어도 물속에서는…”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작 세진이가 마음 놓고 수영을 할 수 있는 수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다 한 번 들어간 수영장에서도 세진이를 그냥 봐주지 않았다. 재수 없다는 말로 시작해 피부병이 있는 게 아니냐며 환불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괴물이라며 비명 지르는 사람까지, 사람들의 편견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연히 팬티 한 장만 걸치고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수영이 좋을 리 없었다. 수영장의 물도 무서웠다. 들어가면 한없이 물속 깊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왼팔과 오른팔 길이가 달라 물속에서 균형 잡기가 어려워 수영하다가 뒤집어지기 일쑤였고, 가뜩이나 짧은 다리는 물속을 더 깊고 공포스럽게 느끼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물 위에 몸이 둥둥 뜨면서 가벼워짐을 느꼈다. 물에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에 뜰 수 있다면 물속에서는 의족을 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세진이는 물속이 편안해졌다. 평화로운 엄마 품처럼 세진이는 물속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 번씩 팔을 저을 때마다 물보라가 튀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꼭 자신이 돌고래가 된 것 같았다.

“수영을 하기 전에는 엄마 손에 이끌려 안 해본 게 없어요. 스키, 스포츠댄스, 볼링, 자전거 타기, 심지어 마라톤 대회에도 나가봤어요. 그땐 뭐가 뭔지 잘 몰랐어요. 여러 사람들의 응원과 엄마의 격려, 그리고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긴 했지만 자유로운 게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죠. 그런데 수영을 하면서 자유를 느꼈어요. 드디어 제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거죠. 그때부터 수영에 올인했어요.”
세진이는 매일 6시간씩 수영 연습을 한다. 독한 엄마의 주문과 훈련 방식에 토를 달지 않는다. 그녀는 세진이에게 늘 말한다. “부족한 것에 나를 맞추지 말고,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맞춰가라”고 말이다. 세진이가 수영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스타가 되거나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신처럼 장애가 있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서다. 꿈이 있다면 그것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IOC 위원은 물론이고, 재활의학과 교수가 되어 다리가 불편한 아이들을 걷게 해주고,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보육원의 이사장이 되고 싶다. 세진이는 그렇게 조금씩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1 수영장에서 의족을 빼고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세진이.
2 여섯 살 때 병원에서 첫 수술을 받기 전. 세진이는 더 예뻐질 거라고 믿었기에 수술이 무섭지 않았다.
3 네 살 때 첫 의족을 신고 간신히 일어선 세진이. 이때부터 피나는 연습과 고통 끝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4 2008년 12월 호주 스쿨림픽 대회. 이날 세진이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의족을 드러내는 게 어색해서 늘 긴 바지만 입는 세진이에게 “가린다고 장애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양정숙씨. “너에겐 장애가 있지만 장점도 있다. 그 장점만 바라보고 가면 된다”라며 강하고 현명하게 키운 덕분에 세진이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진이가 웃는 이유, 가족

세진이가 지금 모습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옆에서 이끌어주는 어머니 양정숙씨가 있었다. 그녀에게도 체조선수로 활약하던 학창 시절, 불의의 사고로 4년 정도 휠체어 신세를 졌던 경험이 있다. 당시 죽어야겠다는 마음까지 품었을 정도로 바닥까지 추락했지만, 힘겨운 치료를 받으며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재활에 성공했다. 그녀가 누구보다 세진이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는 까닭이다.
“세진이가 자라면서 ‘사랑으로만 키워 휠체어를 태울 것이냐’ ‘의족을 신겨 세상에 설 수 있도록 할 것이냐’ 중에 선택을 해야 했어요. 제 경우, 휠체어에서 벗어나 두 다리로 일어선 후에는 세상의 공기가 달라졌어요. 세진이에게도 그 느낌을 전해주고 싶어 전 후자를 택했고, 그만큼의 고통과 노력 끝에 지금의 세진이가 있게 된 거죠.”

물론 의족이 있다고 무조건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kg짜리 쌀 포대를 끼고 걷는 것과 같을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또한 걷는 것만큼 넘어지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집에 매트를 깔아놓고 의족을 끼우고 서 있는 세진이를 일부러 넘어뜨리는 과정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죽을 만큼 아파서 울고불고했지만, 이제는 잘 넘어지는 방법과 넘어져도 안 다치는 방법을 터득했다. 6개월간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연습한 결과였다.
“그제야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네가 걷는 건 나중 문제다. 걷다가 혹시나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걸을 줄 알아야 네가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다’고 말이죠. 제가 이렇게 걷는것이 세계적인 학회에 보고될 정도로 성공적인 케이스라고 들었는데,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걷지 못할 거예요.”

의족을 드러내는 게 어색해서 늘 긴 바지만 입는 세진이에게 “가린다고 장애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양정숙씨. “너에겐 장애가 있지만 장점도 있다. 그 장점만 바라보고 가면 된다”라며 강하고 현명하게 키운 덕분에 세진이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진이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불행하지 않은 이유다.
양정숙씨는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전형적인 어머니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세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엄마의 약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녀는 현재 갑상선암 투병 중이다.

“우연히 건강검진을 하러 갔더니 갑상선암이라고 하더군요. 위치가 안 좋아서 빨리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다음 달에 세진이가 중요한 시합이 있어 수술을 받지 못했죠. 위치가 워낙 안 좋아 한 달 반 정도 말을 못 했어요. 항암 치료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아직 못 가고 있어요. 세진이와 시간이 안 맞아서.”
세진이는 그런 엄마를 볼 때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세진이가 바늘에만 찔려도 벌벌 떨면서 정작 자신이 아픈 건 나 몰라라 하니 말이다. 세진이는 “앞으로 엄마 아픈 동안에는 내가 잔소리를 좀 해야겠다”며 “15년 동안 하루도 편히 쉰 적이 없는 엄마가 이제는 좀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영선수 김세진 소원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IOC 위원이 되는 거지만, 아들 김세진 소원은 엄마가 건강하게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는 거예요. 이제는 엄마가 아프면 아프다고 숨기지 않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아픔을 나누라고 있는 게 가족이잖아요. 엄마가 제게 그러했듯이, 이제는 제가 엄마를 지켜드릴 거예요.”

그녀는 “쪼끄매서 걷지도 못하던 놈이 어른 노릇을 하네”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이미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이젠 엄마보다 제가 훨씬 커요. 다리 짧다고 무시하지 마세요!”라며 농을 던지는 세진이. 모자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듯했다.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입양한 걸 후회했을 때, 혹은 세진이의 앞날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는 없었느냐고. 그녀의 답은 분명하고 단호했다.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제가 세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이미 많은 부분을 버린 상태였어요. 그중 하나가 여자의 삶을 포기한 거였죠. 간혹 주변 사람들이 재혼 생각 없느냐고 물으시는데, 전혀 없어요. 저는 세진이를 품에 안으면서 엄마로서의 삶을 택했어요. 그리고 그 책임감 하나로 이제껏 살아왔고요.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이고, 그게 저의 행복이에요.”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울지언정, 여자로서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양정숙씨. 그녀에겐 예전부터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계획 하나가 있다. 바로 세진이의 생모를 찾아주는 일이다. 그간 간간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세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생모라며 찾아온 사람만 수백 명. 하지만 친자 확인 결과 모두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 세상에 세진이를 있게 해준 사람이잖아요. 세진이를 통해 제가 얼마나 인생을 많이 배웠으며 기쁨을 얻었는지 몰라요. 이미 저는 자식에게서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은 거 같아요. 앞으로 또 받는 게 있다면 그건 ‘덤’이에요. 그 덤을 생모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세진이와 양정숙씨의 이야기에 코끝이 매웠다. 너무나 씩씩하고 밝은, 그래서 때로 그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수영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세진이를 이렇게 기특하게도 속 깊은 아이로 만들었을까. 무서우리만큼 차가운 세상과의 만남에도 세진이는 마음으로는 흔들릴지언정 밝은 미소와 따뜻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저는 조금 다를 뿐이에요. 우리 몸을 이루는 수백만 가지 중 두 다리와 손 하나, 딱 세 가지가 불편할 뿐인걸요. 이것 말고는 일반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보통 아이예요. 저에게 없는 이 세 가지만 보지 마시고, 저에게 있는 무수한 장점을 봐주세요. 저에겐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이 있고 꿈이 있고 희망이 있어요. 저로 인해 이 세상 모든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차가운 현실을 따뜻한 사랑과 인내와 의지로 이겨낸 이들에게서 진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CREDIT INFO

취재
정은혜
사진
이상윤,양정숙
2013년 03월호

2013년 03월호

취재
정은혜
사진
이상윤,양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