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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에 뭐해

On February 10, 2017 0

아무렇지 않게 혼자 지내면 되지.

 


2월 14일은 초콜릿에 환장하는 사람들의 명절이다. 전국의 모든 초콜릿이 창고를 뛰쳐나오고, 쇼콜라티에와 제빵사는 재능을 불사른다. 그 덕분에 평소에는 못 보던 한정판 초콜릿도 세상에 탄생한다. 물론 서대문구 가임기 여성인 내가 만혼과 저출산이 만연하는 이 시점에, 대국민 로맨틱 이벤트인 밸런타인데이에 이러고 있는 건 좀 가혹하다.

레스토랑에는 커플을 겨냥한 비싼 메뉴만 단독으로 나오고, 숙박업소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날에 혼자 <주간 아이돌>을 보며 초콜릿이나 먹다니…. 내가 너무 과대망상을 한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올해 그 비싸다는 달걀 한 판을 달성,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전국구 솔로다. 그리고 이미 과잉·포화 상태인 사회의 총 연애 질량에 나까지 굳이 끼고 싶지 않다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지 오래다.

사는 게 힘들어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N포 세대의 생존 방식인데, 연애 질량이 어째서 과잉이냐고? 연애 압박과 오지랖, 기승전 연애 몰이 때문에 이만저만 피해를 본 게 아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밸런타인데이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날의 바람직한 풍경과 적합한 역할이 존재한다. 이 풍경과 역할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연애 규범의 축약본인데, 이것을 어기면 일단 소외당하기 쉽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줄 사람이 없거나 혼자 집에 있거나 동성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게 어쩐지 웃픈 경험이 되는 식이다.

날카로운 첫 밸런타인데이의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남자아이를 연애 대상으로 의식하는 나이에 접어들면서 밸런타인데이와 초콜릿은 개인의 매력을 수치화해서 보너스 수치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마침 동화의 세계를 벗어나 청소년 소설이나 드라마의 세계로 이동한 시기였고, 그 세계에서도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는 중요한 소재였다. 로맨스나 선물 교환은 더 이상 어른만의 일이 아니게 됐으니까.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넘어가던 해의 밸런타인데이, 나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남자 친구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애가 내 첫사랑이라기보다는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주는 것이 연애의 사회적 문법에 충실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의리를 붙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그린 라이트가 되어버리는.

그 이후로 10여 번의 밸런타인데이를 지나치면서 내가 느낀 위화감은 점점 더 심해졌다. 밸런타인데이를 그냥 기념일 정도로 소비하는 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이 기념일에 어울리는 연인들은 명백하게 이성애자이고, 법적 연령상 20세가 넘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연애는 그런 사람들만 하나. 바꿔 말하면, 그런 사람들만 ‘연인’인가.

조직 구성원 모두에게 초콜릿을 돌리는 센스는 왜 여성에게만 요구되고, 밸런타인데이의 트렌드를 제시하는 것은 어째서 미디어의 몫인지 의혹은 늘어나기만 한다. 이제 단순히 밸런타인데이에 연애 상태를 유지하고, 초콜릿을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부하지 않은 선물을 위해 머리를 굴리고, 검색에 검색을 반복하다 보면 운명처럼 초콜릿보다 훨씬 비싼 추천 선물 품목에 도달한다.

연인들이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딱 그 정도지,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는 연인을 멍석말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연애 중이 아니라고 비참해하거나, 혼자인 누군가를 연민하거나 조롱하지 말라는 거다. 그렇다면 이제 그 범위를 개인의 영역으로 줄여보자. 누군가에게는 아주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날이 밸런타인데이 외에도 차고 넘친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도, 그러니까 아예 초콜릿과도 무관한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엄연히 누군가의 2월 14일이라는 사실. 잊지 말자. 밸런타인데이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날이 사라지거나, 그날의 당신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군가가 당신이라면, 움츠러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아무렇지 않게 혼자 지내면 되지.

Credit Info

WORDS
LEE JIN SONG (<계간홀로> 발행인)
ILLUSTRATION
KIM EUN HYE

2017년 02월호

이달의 목차
WORDS
LEE JIN SONG (<계간홀로> 발행인)
ILLUSTRATION
KIM EUN 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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