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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 ‘기장의 기장’ 이일호 팀장

KTX 개통을 앞두고 프랑스에 파견 가서 처음으로 고속철도를 배워 온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 이일호 팀장은 39년 철도 인생에서 27년을 고속철도에 바쳤다.

UpdatedOn March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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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에서 출발한 속도계가 올라갔다. 100, 200, 마침내 시속 300킬로미터. 이일호 기관사가 운행하는 테제베(TGV)가 꿈의 속도를 찍었다. 심장이 열차처럼 빨리 뛰었다. 비좁은 기관실에 동승한 시험 교관이 그의 표정부터 손발의 움직임, 자세까지 뜯어보고 있을 터였다. 절로 허리를 곧추세우게 되었다. ‘배운 대로, 하던 대로’만 생각했다. 긴장 속에 두 시간여 시험 주행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커다란 기차가 정확한 제동으로 제자리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한국 최초의 고속열차 기관사, 곧 KTX 기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철도청에서 이일호 팀장의 이름을 새겨 선물한 KTX 기관실 열쇠.

프랑스 철도청에서 이일호 팀장의 이름을 새겨 선물한 KTX 기관실 열쇠.

프랑스 철도청에서 이일호 팀장의 이름을 새겨 선물한 KTX 기관실 열쇠.

개통 이전 기장 제복 모자와 프랑스 파견 당시 교육 자료.

개통 이전 기장 제복 모자와 프랑스 파견 당시 교육 자료.

개통 이전 기장 제복 모자와 프랑스 파견 당시 교육 자료.

이쯤 되면 철도가 운명

한국철도공사 서울본부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 이일호 팀장은 한국이 고속철도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에 파견한 기관사 교관이다. 열차를 운행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한데, 고속철도가 처음인 한국엔 당연히 자격증 소지자가 없었다. 당시 가장 빠른 열차인 새마을호와 비교해도 무려 두 배나 차이 나는 속도. 기계도, 운행 방식도 완전히 다른 열차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해 한국 기관사에게 전수할 ‘선발대’가 필요했다. “전체 기관사 중 여덟 명을 뽑았거든요. 기관사 경력 5년 이상,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조건이었어요.”

KTX 개통일은 2004년 4월 1일이지만 교관 요원을 뽑은 건 1997년이다. 고속철도 운행은 언론이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이라 이름 붙일 만큼 대형 프로젝트였고, 준비도 일찌감치 시작했다. “제가 그해 딱 경력 5년 차였어요. 평상시 언어에 관심이 많아 토익 점수도 있었고, 영어 관련 자격증도 하나 따 놓은 참이었거든요. 이 정도면 운명이라 해도 될까요?”

운명이라는 말이 맞겠다. 철도와 그의 첫 만남도 그랬다. 충북 청원군 출신의 그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다가 친구가 가져온 철도청 지원 서류를 얼떨결에 접수해 합격했다. “전혀 예상 못 했어요. 집집마다 전화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 마을 방송으로 구판장에 와서 전화 받으라고 했거든요. 함께 시험 본 친구가 ‘게시판에 붙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고 너만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스무 살에 철도에 발을 디뎠습니다.”

1985년 입사하고 1992년 정식 기관사로 발령받았다. 할머니 손 잡고 서울 친척집에 기차 타고 다니던 소년이 기차를 모는 청년이 되었다. 수많은 승객을 태워 이동하는 기차는 언제나 경이로운 존재였다. 기차라는 기계를 알아가는 시간이 즐거웠다. 승객 한 분 한 분이 고맙고, 기관실에서 바라보이는 창밖 풍경은 다정했다. 기차가 마냥 좋았다. 

KTX 개통 이전 제복을 입고 시승과 시험 운행을 하던 모습.

KTX 개통 이전 제복을 입고 시승과 시험 운행을 하던 모습.

KTX 개통 이전 제복을 입고 시승과 시험 운행을 하던 모습.

매일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업무 수첩.

매일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업무 수첩.

매일매일 꼼꼼하게 기록한 업무 수첩.

프랑스 파견 교육 현장.

프랑스 파견 교육 현장.

프랑스 파견 교육 현장.

한국에 고속철도가 정착하기까지

그런 이일호 팀장에게 고속철도 출범은 새로운 기대와 설렘으로 다가왔다. 시속 300킬로미터 속도가 철도 역사를, 대한민국의 일상을 바꿀 것이었다. “낯선 열차를 외국어로 공부하기란 당연히 어렵겠지만, 철도 선진국의 고속철도를 직접 보고 가장 먼저 익힐 기회잖아요.” 1997년 교관에 선발되어 영어와 프랑스어 교육을 받는 등 준비를 거쳐 2001년, 드디어 프랑스에 가서 테제베와 마주한다. 4개월 동안 고속열차를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 테제베 기장 자격증도 프랑스 기장과 동일한 조건하에 시험을 치르고 취득했다. 서른여섯, 최연소 교관이자 기장이었다.

“수업 방식이 한국과 달랐어요. 이론 강의를 듣고 나서는 거의 모든 시간이 면담이었거든요. 통에 번호를 적은 종이를 넣고 학생이 뽑아서 그 번호에 해당하는 문제의 답을 5분간 설명하게 했어요. 어떤 문제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완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답변이 가능했죠. 정말 긴장을 늦출 틈이 없었어요.” 그 흔적이 두툼한 공책 여러 권에 남았다. 교관이 칠판에 쓴 프랑스어를 필기하고, 따라 그린 그림도 빼곡하다. “여기서 내가 배운 내용을 한국의 기관사 선후배에게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런 절박함과 책임감이 있었어요.” 마찰열로 뜨거워진 차축처럼 이일호 교관 요원의 하루도 치열했다.
한국에 돌아와 KTX 정식 개통까지 약 2년 반이 주어졌다. 이 시기의 그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는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다. 기장 교육, KTX 시험 운행과 시승 행사, KTX 매뉴얼 운전 부문 집필. “KTX 개통 때 46편성이었거든요. 운전을 맡을 기장을 훈련하고, 46편성에 달하는 KTX의 안정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 주행을 각각 20만 킬로미터 이상 해야 했어요. 매뉴얼도 시급했죠. KTX가 테제베를 기반으로 한 열차라, 영어 매뉴얼에다 원본인 프랑스어 매뉴얼을 요청해 둘을 대조하면서 번역 작업을 했습니다.”

프랑스와 똑같이 기장 교육은 여덟 명씩 소수 정예로 진행하고, 기관실에 동승해 운전 과정을 참관하며 가르쳤다. “고장 대응이 관건이었어요. 멈춘 상태에서 난 고장과 운행하는 동안 발생한 고장으로 분류해 시뮬레이터 교육을 하고, 현장에 나가 일부러 기차를 고장 내어 대응하는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이론, 적성, 실무를 모두 일정 등급 이상으로 통과한 기관사만 KTX 기장 자격증을 받아요.”

길이 388미터, 무게 401톤의 열차는 900명 넘는 승객을 태우고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린다.
KTX의 ‘스펙’은 새삼 놀랍다. 거대한 기계와 수많은 승객이 기장의 책임하에 있기에
전 과정이 엄격하고 철저해야 했다.

길이 388미터, 무게 401톤의 열차는 900명 넘는 승객을 태우고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린다. 지금은 일상이 된 KTX의 ‘스펙’은 새삼 놀랍다. 거대한 기계와 수많은 승객이 기장의 책임하에 놓이기에 전 과정이 엄격하고 철저해야 했다.

“2013년에 한국 철도 역사상 최초로 300만 킬로미터 무사고 운전 기록을 세운 박병덕 기장님을 비롯해 교육받으시는 분이 대부분 선배님이었어요. 교관 중에 제가 제일 어렸으니까요. 그럼에도 다들 겸손하게, 집중해서 임하셨지요.” 열차를 향한 애정, 승객에 대한 책임감,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마인드 훈련. 기장으로서 자세를 같이 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개통을 앞두고는 사령(관제실)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국의 KTX 운행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사람이 필요해서다. 2004년 4월 1일 KTX가 출발해 300킬로미터 속도를 낸 순간, 무사히 달려 종착역에 도착한 순간은 이일호 팀장에게 뿌듯함이란 단어로 영원히 저장되었다. 열차와 선로에 적응하는 초기엔 아무래도 돌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열차가 고장 났다고 무전이 오면 함께 상황을 파악했죠. 어느 부분을 어떻게 살펴야 하는지, 운행은 계속할 수 있는지, 아예 멈추고 차량기지로 보내야 하는지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전국의 열차가 정상 가동해요.” 나중엔 기술지원팀에 합류해 같은 역할을 하고 지식을 전수했다. 기장으로서 운전대를 직접 잡진 않았어도, 그가 운행한 거리는 어느 기장보다 길다.

승객의 안전이 인생 목표인 사람

그사이 이일호 팀장은 ‘새 열차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강릉선 개통 때는 KTX-이음 시험 주행부터 기장 훈련까지 실시했고, 얼마 전에는 1년 반에 걸쳐 EMU-320 시험 주행을 완료하고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에 복귀했다. “최고 시속 320킬로미터를 내는 EMU-320 열차를 5월 경부선에 투입할 예정입니다. KTX보다 친환경적인 동력 분산식 열차죠. 모든 열차가 다르니 배움도, 가르치는 일도 끝이 없네요.” 39년 철도 인생에서 27년을 고속철도에 바쳤다. 승객의 안전한 이동이 인생 목표인 사람이 있다. 그 덕분에, 그런 수많은 철도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안전하게 기차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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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현정
photographer 신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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