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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잔디밭에 50명의 사람들이 모여 멍 때린 이유는?

멍 때리고 싶은 사람 모이세요

On November 11, 2014 0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서울광장에 모여 ‘멍 때리기 대회’를 열었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당당한 ‘멍 때리기 대회’.그런데 이들의 퍼포먼스는 생각보다 의미심장하다. 왜냐고? ‘멍 때리기’야말로 진정한 휴식이기 때문이다.

저감독 (영상 아티스트, 멍 때리기 대회 공동 진행자)
본인은 멍을 잘 때리나요?

전 아무 때나 잘 멍 때 려요. 제 가 정말 멍에 제대로 빠져 있을 때는 남이 저를 깨워줘야 정신을 차릴 정도예요. ‘딥멍’이라고 하죠.

자기소개서를 받았다면서요?
자기소개서에 본인은 너무 예쁘기 때문에 뽑아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고, 성별에 ‘고양이와 복숭아 사이’라고 쓴 친구도 있었어요.
저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250명이 지원했는데 마감 이후에도 계속 문의가 왔어요.

우승하면 뭘 주긴 하나요?
그냥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트로피 나부랭이를 줘요.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냥 경험을 해보고 싶은가 봐요. 일상이 무료하니까 이런 작은 일에서조차 재미를 느끼는 거 아닐까요?

웁쓰양(아티스트, 멍 때리기 대회 기획 및 공동 진행자)
본인은 멍을 잘 때리나요?

전 멍을 잘 못 때려요. 계속해서 뭔가를 생각하는 타입이거든요. 남들이 보기엔 멍 때리는 것처럼 보여도 전 계속 생각 중인 거죠.

안마 서비스도 있다면서요?
남자들한텐 훈녀가, 여자들한테 훈남이 안마를 해주고 음료도 가져다줬어요. 그런 굴곡을 겪으면서도 심박수를 유지해야 진정한 챔피언 인 거죠 .

이걸 하는 이유가 뭐예요?
참가자 입장에선 대회지만 저희 입장 에선 퍼포먼스예요. 서울광장, 평일 점심시간을 택한 이유도 바쁘게 돌아다니는 도시인과 멍 때리는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키고 싶었어요.


멍 때리기 대회를 연다고요?
이 대회를 주최한 사람들은 ‘전기호’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본명 밝히기를 꺼려한 이들은 감탄사 ‘웁쓰’를 붙인 ‘웁쓰양’과 조감독으로 불리는 게 싫어 ‘저감독’이라고 이름 지은 퍼포먼스 아티스트다. “요새 제 주변에 멍 때리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멍을 때린다는 건 뭔가를 생각하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렌더링을 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지만, 과부하가 걸려 블루 스크린이 뜨는 경우일 수도 있어요. 블루 스크린이 자꾸 뜬다면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는 의미예요. 뇌가 쉬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건데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어요.” 웁쓰양의 얘기다.

시작은 페이스북에 자세한 설명도 참가비나 대회 포상 내역도 안 적혀 있는 포스팅만 달랑 하나 올리면서였다. 이 포스팅이 한 매체에 기사화되면서 문의가 쇄도했다. 40명을 선착순으로 모집하겠다는 애초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25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가를 신청해, 어쩔 수 없이 50명으로 모집 인원을 늘리고 성비와 연령대를 맞추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받아 선별하는 과정도 거쳐야만 했다. 경종을 울리겠다는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10월 27일, 행사 당일에도 관심은 여전했다. 가을이지만 햇살이 무척이나 따가운 날씨인데도 9살짜리 초등학생부터 50대 아저씨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녀 50여 명이 서울광장 잔디밭에 모여 분홍색 요가 매트를 깔고 앉았다. 오후 1시쯤 수십 대의 카메라가 한 명 한 명을 주목하며 참가자의 면면을 촬영했고, 그 사이로 점심 식사를 마친 회사원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모여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기 위해 이곳에 모인 이들을 찍고 구경하느라 주변은 난리 법석이 됐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 ‘대회’다.

“적어도 대회라고 이름 붙이려면 사람들이 보기에 객관적인 지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어요. 환자로 등록을 해서 신경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죠. 인천에 있는 꽤나 큰 정신 병원이었는데, 뇌파를 측정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단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뇌파 측정기를 구해 보려고 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찾은 게 심박동 측정기예요. 10분마다 심박동을 측정해서 차이가 적게 나는 순으로 점수를 부여하고, 관중에게도 참가자들의 표정을 관찰해 ‘가장 적나라하게 멍 때린’ 사람에게 스티커를 붙이도록 해서 이 둘을 합산하기로 했죠.” 이날의 우승은 책 읽는 게 제일 좋은데 엄마가 자꾸 학원 가라고 해서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는 만 8세, 초등학교 2학년 김지명 양에게 돌아갔다.


  • 유머러스한 멍 때리기 우승 트로피.

멍도 이유 있게 때린답니다
“이런 대회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저도 참가 신청을 할 걸 그랬어요.” 관중으로 투표에 참여했던 27세의 대학생 채민영 씨는 이렇게 재밌는 행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반색을 표했다. 채민영 씨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취지를 단박에 이해하며 웃음 띤 얼굴로 발걸음을 멈췄다. ‘멍 때리기’에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이유는 너무 자명했다. 너도 나도 모두가 멍 때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대한민국이 극도의 피로 사회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 근로자의 2013년 평균 근무 시간은 총 2090시간. 하루 평균 10시간 30분에 달하는 시간이다. 한 방송사의 조사에 따르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직장인의 약 85%가 ‘번아웃 증후군’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일까지 내야 하는 품의서와 기안문, 그 사이에 잡힌 깨알 같은 미팅들. 이럴 때면 말 그대로 하얗게 ‘타버린’ 영혼을 추스르는 상태에서 직장인들은 습관적으로 멍을 때리게 된다.

“난 누구이며 여긴 어딘가 싶을 때가 많아요. 특히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거나 중요한 계약 건으로 미팅이 잡혀 있으면 나도 모르게 멍을 때리게 되더라고요.” 화재보험사에서 일하는 35세의 이나경 씨가 멍해지는 원인도 역시 업무 압박이다. 그러나 재밌는 건 ‘멍을 때리게 되는 원인’은 부정적 현실에 있지만, 멍 때리는 행위만큼은 대부분 긍정적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이나경 씨는 “하지만 멍을 때린다고 해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오히려 멍 때리는 시간에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취재를 위해 대회에 참가한 30세 신문기자 곽은영 씨도 평상시에 멍 때리는 시간을 따로 둔다고 했다.

“특히나 큰 기획을 앞두고 있을 때 멍 때리는 시간을 만들어요. 결과적으로 보면 멍 때리는 시간을 거치고 나야 결과물이 더 잘 나오는 것 같아요.” 이 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자주 멍을 때리는 아티스트 정웅 씨는 얼마 전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보다 멍 때릴 시간이 없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뭔가를 만드는 작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야 하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상대적으로 그럴 시간이 없더라고요. ‘멍 좀 때리자’라는 이 대회의 취지에 공감했어요.”

멍 좀 때리셔야 합니다
이날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은 멍 때리기를 즐기거나 혹은 일상의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뇌를 힐링하거나 창의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일부러 넋을 놓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얘기다. 재밌게도 이 ‘멍 때리기’는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미지의 영역이다. 과학적 용어로는 ‘무자극적 사고’에 빠진 상태를 일컫는데, 2000년대에 와서야 그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2001년 미국의 신경과학자 마커스 레이클 박사는 PET 촬영을 하다가 피험자가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 오히려 바빠지는 뇌의 특정 부위를 발견했다. 당연히 아무 생각 없는 무자극 상태라면 일손을 놓고 쉬어야 할 몇몇 부위가 열심히 일을 시작하며 포도당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뇌는자극에 반응한다’는 기존의 상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 결과에 대해 학계에서는 반발이 심했지만, 이후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의 발달에 따라 거부할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즉, 우리가 멍 때리기에 들어가면 뇌의 특정 부위가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 상태에서 이 뇌 부위들이 무슨 일을 하느냐인데, 지금까지 밝혀낸 이 ‘뇌 회로’의 가장 큰 역할은 두 가지다. ‘자아 성찰’과 ‘창의적 착상’. 무위의 도, 자아 성찰의 면벽 수련이 그냥 빈말이 아님을 뇌 과학이 증명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회에 참가한 몇몇 멍 때리기 선수의 발언은 더욱 흥미롭다. “멍 때린다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무의식에서 뭔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게 느껴져요. 그러다 정말 ‘팍’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죠.” 36세의 타투이스트 노지영 씨는 마치 인지과학에 대한 책이라도 읽은 듯 머릿속 일을 자세히 묘사했다. 24세의 이주한 씨도 “멍 때리는 순간에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돼요. 내가 누구인지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죠”라고 답했다.

1. 기사를 쓰기 위해 참가하긴 했지만 이쯤 되니까 개인적으로 우승 욕심도 나네요. _곽은영(30세, 기자)
2. 오늘의 콘셉트는 화가 겸 가정주부의 괴리예요. _정웅(36세, 아티스트)
3. WINNER 책 읽고 싶은데 자꾸 학원 가라고 해서 멍 때리게 됐어요. _김지영(9세, 학생)
4. 스케줄 빼준 매니저 형에게 고마워요. _이주한(24세, 배달원)
5. 회사에는 비밀로 하고 나왔어요. _이나경(35세, 직장인)
6. 드레스 업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_진수연(25세, 자영업)

멍 때리게 해주세요
현대사회에서는 자아 성찰과 창의력 고양의 시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32세의 안혜연 씨는
“이렇게 날씨 좋은 월요일 오후에 잔디밭에 앉아서 가만히 일광욕할 기회가 또 언제 있겠어요. 반차를 내고 나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이 소중한 기회에 그저 감사해할 따름이었다. 잠들었다는 이유로 두 번째 탈락자가 된 이주한 씨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배달 업무를 하고 있다. “한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가 업무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지금 다른 걸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인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이런 행사에 참여해서 너무 기뻐요.” 이들이 고마워하는 것은 사실 멍을 때릴 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줘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관용구가 되어버린 ‘빠르게 움직이는 현대사회’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날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고마움이 가장 크다.

34세의 병아리 감별사 장원성 씨는 “이런 대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어떤 취지의 행사인지 단박에 눈치챘어요. 멍 때리기야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모여서 대회까지 연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멍 때리기, 다시 말하면 느리게 사고하는 시간은 그동안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가 사이에서 명상과 무위 등의 이름으로 바꿔가며 강조되어 온 뇌 휴식의 수단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은 짓을 영원히 계속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기계가 없던 예전’이라니. 버트런드 러셀이 이 글을 쓴 때는 자동차도 증기로 가던 1935년이었는데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발언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나 GDP의 증가가 우리에게 게으름을 허락해 주지 않음을 의미하며,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공연 예술가인 24세의 ‘나나’(가명) 씨는 “스마트폰이 없을 때는 멍 때리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멍 때리는 시간을 만들려면 개개인이 뭔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TV, 인터넷, 스마트폰 등. 특히나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멍 때리는 시간을 자꾸 만들 필요가 있다. ‘나는 한가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된 요새야말로 내면에서 심오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의 행동들이란 한가한 시간 동안 내면에서 일어난 방대한 움직임의 마지막 잔향에 불과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의 시성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한 세기 전 남긴 말이다.


멍 때리기 전에 읽기 좋은 책
뇌의 배신 _앤드류 스마트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우리 뇌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신의 뇌 과학 이론으로 설명해 주고 사회학적 함의까지 알려주는 과학 인문 서적.

시간의 향기 _한병철
‘우리는 어떻게 쉴 것인가?’ 근무 시간은 물론이고 여가 시간도 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피로 사회’의 시민들에게 던지는 철학자의 현문을 만날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_버트런드 러셀
임금을 적게 받더라도 하루에 4시간씩 일하고 게으르게 사는 거야말로 인류를 번영의 길로 이끄는 방법이라고 이미 반세기 전에 설파한 노철학자의 지혜가 담겼다.

EDITOR : 박세회
PHOTO : 김영훈, 정주연

발행 : 2014년 42호

Credit Info

2014년 11월 02호

2014년 11월 02호(총권 42호)

이달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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