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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로 4차까지 도는 하드코어 애주가의 이야기.

혼자 술집 가는 여자

On April 17, 2014 0

고매한 바에서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게 아니다.이모님이 고등어 구워주는 술집에서 소주를 까고, 하룻밤에 4차까지술집 투어를 하는 30살 하드코어 애주녀의 이야기다.

▲ 글쓴이 배민정이 최근 즐겨가는 단골집은 별다른 이름이 없다. 그녀는 오늘도 자신만의 ‘술복’인 롱패딩 점퍼를 입고 그곳을 찾는다. 혼자 집에 돌아오는 새벽은 생각보다 쌀쌀 하니까.

봄바람이 불면 ‘술복’으로 갈아입고
한 해 중 혼자 술을 자주 마시게 되는 시기는 환절기다. 저녁 무렵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 나가면 창문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봄바람엔 사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마음이 이유 없이 싱숭생숭해지고, 얼른 한잔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초조함이 밀려온다. 나는 옷장을 열고 ‘술복’으로 정해진 점퍼를 찾아 입는다. 조깅할 때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수영할 때는 수영복을 입는 것처럼, 혼자 술을 마시러 나갈 때는 나만의 유니폼을 입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황토색 패딩 점퍼다. 마시다 보면 신이 나서 새벽까지 술집을 돌아다닐지 모르니, 나설 때는 항상 덥다 싶을 만큼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어야 한다. 건강은 중요하고, 추위에 떨며 돌아오는 길은 처량하다. 무엇보다 이 점퍼의 특별한 점은 흉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의류 수입업을 하는 친척에게서 어쩌다 받았기에 망정이지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샀을 옷이다. 언젠가 지인은 그 옷을 입은 나를 보고 ‘한 마리 바퀴벌레 같다’고 평했다.

밖에서 혼자 술 마시는 사람은, 특히 젊은 여자는 주위의 시선을 끈다. 취객의 추근거림을 받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중성적으로 보이는 것이 좋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 질끈 묶은 머리, 몸매를 가리는 두툼한 옷. 한술 더 떠서 아저씨 같아 보이면 더할 나위 없다. 젊은 여자도 충분히 아저씨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것은 포스의 문제다. 가끔 밖에서 혼자 술 마시길 망설이는 여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불쌍해 보일까 봐’, ‘청승맞아 보일까 봐’라는 이유가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우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언젠가 파전이나 오징어 데친 안주 같은 걸 파는 술집에서 20대 여자가 혼자 소주 마시는 모습을 봤는데, 솔직히 실연이라도 당했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폰 원피스, 고데로 세팅한 머리,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만지는 모습 등이 그런 인상을 받게 했다.

물론 이런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어엿한 아저씨다. 바퀴벌레 색 점퍼는 내가 찾은 하나의 방법이다. 이 옷을 입고 술집 의자 등받이에 팔을 척 걸치고 앉아 우물우물 노가리를 씹고 있으면 나 자신이 관록 있는 술꾼처럼 여겨진다. 스마트폰은 만지지 않는다. 이어폰도 끼지 않는다.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두고 술잔을 홀짝이다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 것 같다가도, 사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의 대화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멀어진다.

팬시한 ‘바’보단 간판도 없는 ‘술집’으로
나는 한 술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집에서 나설 때부터 마음속으로 정한 지점까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중간 중간 술집에 들르는 걸 선호한다. 요즘 내가 혼자 술을 마실 때 가장 자주 찾는 곳은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는 술집이다. 테이블 세 개로 꽉 차는 좁은 공간에 지금은 구경조차 힘든 구식 텔레비전이 ‘지직’거리는 화면으로 뉴스를 전한다. 그날그날 준비된 대로 꼬막이나 문어, 낙지 같은 해물을 접시 가득 내오는 곳인데 안주는 종류를 불문하고 1만원. 이 정도 양에 이 가격이면 얼마나 남을까 싶다. 나물이나 어묵볶음 등 몇 가지 밑반찬이 깔리고 국물도 한 그릇 상에 오른다. 기본적으로 이모님 음식 솜씨가 좋고, 허름한 가게 행색에 비해 입구에서 보이는 주방이 깨끗한 게 마음에 든다. 이 술집을 운영하는 이모님은 밤 10시가 지나면 대체로 취해 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술 마시기에 바빠서 오는 손님을 내쫓기도 한다. 이모님이 취한 정도에 따라 술값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몇 천원 더 부르면 그냥 드리고 만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면 이 술집의 주 고객층인 50대 남자들의 걸걸한 웃음 사이로 이모님의 콧소리가 들린다. 잔뜩 취한 남자가 이모님을 앞에 두고 두서없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자기 앞니가 흔들린다는 이야기가 백 번째 반복되려 하자 이모님은 냅다 노래를 시작한다.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는.” 나는 마음속으로 웃는다. 이모님 특유의 간드러지는 콧노래가 술맛을 돋운다.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심심하다 싶으면 사람들이 벽에 끼적인 낙서를 읽으면 된다. 이 술집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와 동시대 사람이 썼다 보기 힘든 고풍스러운 문장이 신기하다. ‘술 따르고 웃음 팔아도 가벼운 여자로 보지 마세요’,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더냐, XX년’.

50대 취객의 주정을 들으며
나는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선술집을 좋아한다. 저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컥벌컥 소주를 털어 넣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술 마시는 데 기합이 들어간다. 일상생활에선 친해질 일이 드문 내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술이 들어갈수록 수다스러워진다. 어떤 사람들은 술집 사장님을 붙잡고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끝없이 떠들어댄다. 사장님이 외면하면 허공에 대고서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반응을 보이면 이쪽을 붙잡고 늘어질지 몰라 듣지 않는 척하면서, 나는 항상 그런 술주정에 흥미롭게 귀를 기울인다. 내용은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의 가락을 따라가다 보면 살아가는 일의 흥과 고단함이 전염된다. 때때로 연륜 있는 술꾼의 주정은 이상한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얼굴이 검붉게 달아오른 50대 남자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시간은 금이지’ 같은 말은, 맨 정신인 사람이 인용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로 가슴에 떨어진다. 간혹 마음속으로 취객과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켠다. 말인지 판소리인지 모를 뻑적지근한 소음이 취흥을 더한다.

혼자 술을 마시는 이유
가끔 사람들이 왜 그리 혼자 술을 마시냐고 묻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많은데,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불러낼 친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매일 친구를 만날 수 있다 해도, 그때마다 친구와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얘깃거리가 많지 않다. 게다가 누구나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 것 아닌가. 어떤 때는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가 친한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편하다. ‘다찌’가 있는 이자카야는 혼자 술 마시기 어색한 사람도 비교적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좁은 다찌에 옹기종기 모여 술을 마시다 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어느덧 건배를 하고 안주를 나누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남녀노소를 떠나 술꾼끼리의 유대감이 다찌에 모인 이들을 하나로 만든다. 시각이 자정에 가까워지면 슬슬 장사를 마치려는 이자카야 사장님까지 술자리에 가세한다. 때에 따라 서비스 안주 세례가 쏟아지기도 한다.

보통 술집 사장님들은 혼자 술 마시는 여자에게 호의적이다. 사장님 눈에 들기 나름으로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얻어먹는 일도 왕왕 생긴다. 손님과 사장님 구분 없이 마시다 보면 다찌에서 결성된 무리 모두 다른 술집에서 한잔을 더하자 얘기가 오간다.
슬슬 ‘으싸으싸’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나는 자리에서 빠진다. 낯모르는 사람들과 끝까지 가기엔 이 밤이 너무 짧다. 거리에서 술집들의 불빛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난다. 술꾼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저 불빛들은 얼마나 맛있는 술과 안주,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담고 있을까. 5년이 넘게 산 동네인데도 이 시간에 걷는 길의 감각은 남다르다. 뭔가 흥미로운 것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낯선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볼까. 출출한데 전 집으로 이동해서 김치장떡에 소주를 마실까, 수제 맥줏집에서 맥주 한잔으로 마무리를 할까. 자주 가는 곳도 좋지만 항상 새로운 술집을 개척하려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이 밤의 별자리를 완성시킬 마지막 불빛을 찾아 헤맨다.

EDITOR : 박세회
WORDS : 배민정
PHOTO : 김영훈

발행 : 2014년 28호

고매한 바에서 와인이나 홀짝거리는 게 아니다.이모님이 고등어 구워주는 술집에서 소주를 까고, 하룻밤에 4차까지술집 투어를 하는 30살 하드코어 애주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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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2호

2014년 04월 02호(총권 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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