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

LIFE MORE+

패션왕

패션왕

UpdatedOn August 02, 2011


패션왕이란 웹툰.
두어 달 전 술자리에서 패션 업계의 루키인 한 남자가 말했다. 탐스를 신고 엔지니어드 가먼츠로 보이는 재킷을 걸친, 얼굴의 아우트라인을 거뭇하게 감싼 수염까지 액세서리로 느껴지는 그가 빗소리 따라 소주를 마시다가 불현듯 그랬다. “<패션왕> 보셨어요? 죽여요. 고등학교가 배경인데, 패션 스타일로 한 칼 휘두르는 내용이라고요. 무협지처럼요. 이건 무림 고수를 향한 한 판 승부! 뭐 그런 거라니까요. 발상이 완전 쓰러져요.” 클래식 무드의 30대 남자가 열에 달뜬 소년처럼, 그 빗속에 클럽으로 달려갈 것만 같은 얼굴로 그랬다.

호기심 100% 충전. 
스마트폰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달음에 웹툰을 훑었다. 지인의 말처럼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킬킬거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누구지? 기안84. 1984년생 스물여덟이로군. 이 청년의 발상에 일단 박수. 사실 패션지를 만들고 있는 나에게 이 작품은 꽤 의미있었다. 이제 누구든  패션을 매개로 대중친화적인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거다. 패션을 주제로 한 책과 TV 프로그램은 많았다. 알게 모르게 패션 전문 채널에서 연예인들의 패션을 폄하하고, 서바이벌로 디자이너를 뽑고, 캣워크를 짜깁기해 보도하고, 유명 브랜드의 패션 매장을 탐방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접하고 또 접해온 나다. 하지만 늦은 밤 채널을 고정하고 패션 프로그램 안을 유영하다 보면 허탈감과 무기력감에 전원을 꺼버리곤 했던 나다. 그랬던 내가 이제야 패션을 매개로 삼은 응용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면 좀 오버일까.

이유가 뭘까.
얼큰히 올라오는 취기에 뇌세포가 흐느적거리며 물음표를 토해냈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건 사람 사는 얘기라서가 아닌가. 기안84의 표현을 응용하자 들면 이 정도 되겠지.
‘아니 이건 또 뭐냐?!!!!
너 치열한 청춘사에 패션을 접목한 거냐?
그러고 보니 너…,
교복의 핏도, 피에르 루부탱도, 노스페이스도, 데님의 워싱, 식스팩과 쇄골이 패션에 미치는 영향까지…,
십대의 이상과 좌절과 자존감에 버무려버린 거냐?
그렇게 인생을 워싱하겠다는 거냐!!!(느낌표 세 개)’
그랬다. 지금까지 패션 언저리 콘텐츠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제하고 나니 과장법만 남았다. 경우 없는 크리틱과 경박한 수다와 괴리감을 돋우는 치장이 넘쳤다. 아니 그렇게 자극적인 것들만 수면 위로 부상했다. 매주 정형돈이 패션 존재감을 논하고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패션 페스티벌을 벌인다. 하지만 거기엔 패션에 대한 존중이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패션은 그저 경우 없는 라이프스타일로 치부됐다. 그런데 이 대중적인 웹툰은 아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한 소년이 짝퉁 노스페이스에 좌절하고 핏의 가치를 알아가며 희열하지만 그건 자신이 속한 집단(학교)에서 자존감을 찾기 위한 수단이다. 패션은 사회적 톱클래스에 속하기 위해 연마해야만 하는 필살기로 묘사된다. 이건 패션지에서 누차 강조해온 자존감 있는 옷 입기, 시그니처 룩 찾기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인생은 서바이벌이다.
웹툰의 소년처럼 어쩌면 우리도 미친 듯 톱클래스 진입을 위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패션을 필살기로 연마해야만 한다면 죽기 살기로 들이대야 한다. 이달 <아레나>는 피티 워모에 집결한 패션인들을 취재했다. 피티 워모에는 먹고사는 수단을 패션에서 찾은 남자들만 모인다. 그들을 장장 20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구도하는 마음으로 패션을 대해온 전문가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10대의 꿈을 이룬 성공남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은 <패션왕>의 주인공처럼 핏과 소재의 차이를 깨닫고 희열하던 10대를 보내고 돌아와 이제는 거울 앞에 서서 인생을  논하는 멋진 30, 40대가 되었으리라. 철철이 변하는 트렌드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아는, 심지어 철철이 변하는 트렌드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리라.
그들을 보고 있자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옷차림, 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는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대손손 내려온 클래식 수트의 법칙이나 매너를 일러주는 것 이외에 어떤 뾰족한 왕도를 일러줄 수 있단 말인가. 교과서적인 공부는 학습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넘어선 ‘자신만의 자존감 있는 옷차림’은 인생의 가치관 문제인데 말이다.         

패션에 왕도가 있나?
결국 답은 빨간펜 선생님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세요.
그리고 자신만의 풀이법을 만드세요.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

CREDIT INFO

디지털 매거진

MOST POPULAR

  • 1
    Homeric Elegance
  • 2
    <아레나> 4월호 커버를 장식한 배우 이영애
  • 3
    트리니티 파티
  • 4
    끝의 시작
  • 5
    <아레나> 4월호 스페셜 에디션 커버를 장식한 세븐틴 조슈아

RELATED STORIES

  • LIFE

    HAND IN HAND

    새카만 밤, 그의 곁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물건 둘.

  • INTERVIEW

    스튜디오 픽트는 호기심을 만든다

    스튜디오 픽트에겐 호기심이 주된 재료다. 할머니댁에서 보던 자개장, 이미 현대 생활과 멀어진 바로 그 ‘자개’를 해체해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공예를 탐구하고 실험적인 과정을 거쳐 현대적인 오브제를 만들고자 하는 두 작가의 호기심이 그 시작이었다.

  • INTERVIEW

    윤라희는 경계를 넘는다

    색색의 아크릴로 만든, 용도를 알지 못할 물건들. 윤라희는 조각도 설치도 도자도 그 무엇도 아닌 것들을 공예의 범주 밖에 있는 산업적인 재료로 완성한다.

  • FASHION

    EARLY SPRING

    어쩌다 하루는 벌써 봄 같기도 해서, 조금 이르게 봄옷을 꺼냈다.

  • INTERVIEW

    윤상혁은 충돌을 빚는다

    투박한 듯하지만 섬세하고, 무심한 듯하지만 정교하다. 손이 가는 대로 흙을 빚는 것 같지만 어디서 멈춰야 할지 세심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다. 상반된 두 가지 심성이 충돌해 윤상혁의 작품이 된다.

MORE FROM ARENA

  • CAR

    아침을 맞은 네 대의 SUV

    차박 다음 날. 분홍빛으로 물든 아침 풍경과 SUV 넷.

  • FASHION

    ALL THE BLUES

    무심한 바다와 계절 없는 데님.

  • INTERVIEW

    KBS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화보와 인터뷰 미리보기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향한 KBS 동계올림픽 해설위원 5인의 기대.

  • LIFE

    홍천의 보석, 세이지우드

    강원도 홍천에 자리 잡은 프리미엄 호텔, ‘세이지우드’. 굳이 외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자체 매력이 넘쳐나는 곳이다. 올여름 피서지 1순위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 INTERVIEW

    HELLO AGAIN, 5SOS

    여전히 선명해서 더 들여다보고 싶은 5SOS(5Seconds Of Summer)의 음악을 다시 만났다.

FAMILY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