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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서로 떠나는 국내여행

UpdatedOn August 02, 2011



화진 가는 길
안내가 있었다. 바람이 일어 오늘 어청도행의 배는 결항한다고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나는 아홉 시의 선유도행 배표를 끊었다. 남은 시간 동안 선창에 정박 중인 배들을 구경했다. 포구에서 기분 좋은 일 중의 하나는 이리저리 걷다 마주치는 배들의 이름을 읽는 것이다. 배들의 이름에는 선주들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주들은 자신의 배에 어린 시절 고향 동리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젊은 날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의 이름이나 술 이름을 적어놓은 로맨티시스트도 있다. 먼 이국의 항구 이름을 따오기도 하고…. 그 이름들의 의미를 다 모아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한 포구가 지닌 그리움의 실체가 되리라. p31

선유도, 신선이 노닌다는 그 섬의 백사장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넓은 원고지를 생각했다. 햇볕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모래들은 빛났고 파도 소리들은 푸르렀다. 애기 소라고둥 하나가 모래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가다 내가 가까이 가자 작은 구멍 속으로 얼른 숨었다. 나는 손톱 하나의 깊이도 되지 않는 그 구멍 속에서 소라고둥을 찾아냈다. 안녕, 난 친구야. 내 인사는 방금 밀려온 물살 하나가 소라고둥의 구멍 위를 스쳐가는 바람에 그만 지워지고 말았다. 그때, 새 한 마리가 섬과 섬 사이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심이 일었다. 모래사장 위에 손가락으로 한 편의 시를 썼다.
섬과/ 섬 사이로/ 새가 날아갔다/ 보라색의 햇살로 묶은/ 편지 한 통을 물고/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 p35

나는 장자교 위에서 서해의 일몰을 보았다. 붉은 불기둥이 바다 속으로 사라진 뒤 가까운 섬들의 인가에서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파도 소리 속에 불빛들은 춤을 추는 것처럼 흔들리고 물살을 따라 내 발 아래까지 밀려왔다. p38

순천만에서
저문 시간이면 순천만에 나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개펄이 좋고 개펄 냄새를 이리저리 싣고 다니는 바람의 흔적이 좋다.
키 넘게 훌쩍 자란 갈대숲. 갈대들의 목은 꺾여져 있다. 모두 같은 방향이다. 바람은 가끔씩 갈대숲 사이로 들어온다. 그럴 때 갈대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긴 낡고 오래된 악기의 소리를 낸다. 어디로 갈까… 고개 숙이고 끝없이 걸어가는 갈대들의 행렬은 순례자의 그것을 닮아 있다. p114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저 불빛은 화포의 불빛이고, 저 불빛은 거차의 불빛이며, 저 불빛은 와온마을의 불빛이다. 하늘의 별과 순천만 갯마을의 불빛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하는 싱거운 생각에도 잠겨본다.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불빛들은 갓 핀 달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 어떤 불빛들은 밤을 새우기도 한다. p120
사방은 고요하다. 나는 갈대숲 사이를 걸어 다시 내가 사는 도시 속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는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으로써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침묵함으로써 모든 욕망과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들.
나는 내 꺾인 날개를 소중하게 바라본다. 고요하게 살아 있는 순천만의 모든 생물들, 그들의 꿈, 삶의 지혜들…. 스무 살 적, 시에 젖어들던 그 침묵의 시간들 속으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p121

경남 고성군 상족포구
1010번 지방도로. 옛 삼천포시에서 고성으로 가는 작은 바닷가 마을의 길 위에서 동행을 만났다. 나는 그 동행이 퍽 반가웠다. 어쩌면 마음의 어느 길목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동행과 나는 면식이 있었다. 동행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주 여린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여행자로서 가장 어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p276

그 바닷가에서 나는 또 하나의 동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와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와는 당연히 초면이었다. 그녀는 노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노란빛이 수묵빛깔의 바다색과 잘 어울렸다. 나의 첫 동행은 그녀의 우산 위에 작은 새의 발자국 같은 여러 개의 흔적들을 남겼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공룡들의 무도회장이 어디지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나를 여러 개의 지층들이 서로 어긋나고 빗갈린, 동굴의 틈새를 지나 한쪽 해안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훨씬 많은 공룡들의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바위 위에 찍혀 있었다. 그녀는 공룡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공룡들의 종류와 공룡들이 살았던 시대, 그 시절의 양치식물에 대해서. p281

나의 첫 동행은 우산이 없는 내 어깨를 충분히 적셔놓았다.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포도를 가꾸며 살아가는 것,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사랑하고 헤어지고 병들고 아파하고… 그런 시간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빛과 희망, 꿈, 무지개…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어온 모든 의미들조차 대기의 한 질료에 불과한 것인가. 오랫동안 나는 그 바닷가를 서성거렸다. p282


전남 보성군 강골마을
강골마을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앞두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는, 득량 땅 바닷가 인접 마을이다.
4백 년 전 광주 이씨가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옛집들과 돌담길, 대숲과 정자 등이 정묘하게 어우러진, ‘때 타지 않은’ 몇 안 되는 전통마을로 평가된다. p195

안채 5칸, 사랑채 4칸으로 이뤄진, 1891년에 지은 이식래 가옥, 솟을대문에다 정갈하고 기품 있는 멋을 자랑하는 이용욱 가옥(1904년 건립), 아기자기한 정원에 섬세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이금재 가옥(1900년 전후 건립) 등 세 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고택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같이 할아버지 냄새, 꼬질꼬질하게 손때 묻은 생활 도구들 냄새, 서늘한 가부장 냄새, 섬세하고도 엄격한 시어머니 냄새, 두껍게 쌓인 세월의 냄새들이 가득하다. p198

“요것이 그랑게, 옛날에 마을을 먹여 살린 젖줄이요 근원이라요. 오래전엔 이 우물밖에 읍었으니께.”
공동 우물은 ‘큰우물’ ‘소리나는 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의 여론이 이곳에서 생성되고 전파됐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에겐 소통의 공간이자 해방 공간이기도 했던 우물이다.
마을 내력에는 밝고 귀는 약간 어두우신, 명봉댁의 바깥어른 이병철 씨가 말했다.
“한 40년 전까지도 마을에 한 2백 집이 살았는디, 인자 다 떠나고 다 비아갖고 시방 젊은이들은 몇 읍서라. 쩌그 열화정에선 어르신들이 놀고, 아낙들은 요짝 ‘큰샘물터’에서 놀았제라. 요 앞산에 옛날 만유정이 있었는디, 거그서 일제 항거 모임을 허다가 경찰 온다는 연락이 오면 열화정 쪽 뒷산으로 숨어들어갔제. 순경이 쫓아오면 돌을 굴러내려 쫓았는디 거긴 늘 돌을 준비해놨었지. 아 나도 열화정서 서당글깨나 배왔는디, 거가 연못도 옛날엔 음청 컸어라. 근디 다 말라갖고 인자 메와지고 쬐껨하지라. 그 뒤짝으로 이정례 씨 대밭이라고, 무자게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밭이 있었어라. 또 거긴 이런(팔을 한아름 벌리며) 소나무들이 한 1백 그루쯤 꽉 들어차 있었제. 근디 해방 뒤 다 산판해갖고 실어가부렀어.” p202

“죄송하게도 우리 마을엔 도시 사람들 위한 편의시설이 없소잉. 군불도 본인이 직접 때야 헌게로 불편허고 성가시고 깝깝할 것이요. 그게 시골 아니것소.” p205


대전 대동복지관길
집은 참 예쁘다. 골목을 이야기하며 ‘예쁘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예쁜 걸 어쩌랴.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신사동, 광화문, 종로, 신촌, 홍대 거리를 걸으며 ‘분위기 좋다’는 느낌을 받곤 했지만 ‘예쁘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동이나, 경주 사정동 앞사정길, 부산 문현동 안동네, 강경 황산시장길은 예쁘다.
참 예쁘다.
집 앞으로 걸어가 벽이며 창문이며 지붕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는 낯선 골목에 가면 반드시 벽이며, 창문, 지붕, 마당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건 골목을 가장 잘 감상하는 방법이자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잠자코 몇 분쯤 가만히 앉아 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골목에 고인 시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떨 때는 골목에서 평생을 산 사람이 들려주는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보다 마당에 놓인 채송화 화분이 누설하는 골목의 비밀이 더 진실될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내 눈앞에 나란한 네 채의 집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p219

복지관2길을 걷다 보면 골목 전체가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진 곳이 나온다. 그 색감이 너무 화사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벽에는 파스텔 톤의 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귀여운 얼굴을 내놓고 있는 아이 그림. 양쪽 벽에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사이좋게 그려져 있다. p221

그곳은 정말이지, 꽃의 내부 같았다. 환했다. 미풍이 골목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햇볕은 발바닥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양지에서는 볕 냄새가, 처마 아래에서는 그늘 냄새가 났다. 가끔 진회색 구름이 골목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나가기도 했다. 이런 골목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어서 나는 투명한 공기 속을 비행하는 한 마리 곤충처럼 붕붕거리며 골목을 흘러다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목적도 이유도 없이. p224

비가 새고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벽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득 사람들이 잘살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버는 것 말고도 많을 것 같다는, 약간 철없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기를, 지금까지 내가 골목에서 보고 배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기를 기원해본다. p225



단골이라는 도취
10여 년 전 세법상의 분류로 ‘자영업자’가 되고 나서 갑근세 내는 친구들에 비해 고향을 자주 찾게 되었고 명실상부하게 음과 식을 겸비한 단골집을 만들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단골 음식점은 이런 곳이다.


첫째, 주인장 관상이 좋아야 한다. 타고난 인상이 평범하다면 웃음이라도 자주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전통의 맛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맛이 없더라도 퓨전은 안 된다. 셋째, 나보다 먼저 출입하는 단골들이 적어도 연필통에 들어가는 필기구 개수 이상의 숫자여야 한다. 넷째, 텔레비전이 없어야 한다. 다섯째, 기타나 오디오에서 나오는 풍악은 있어도 되지만 일부 손님의 취향으로 다른 손님의 흥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여섯째, 시계는 없는 편이 좋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장진주>에 따르자면 ‘그대와 더불어 만 가지 시름을 살라버릴 제’ 시계고 달력이고 학교종이고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없는 편이 좋은 것에는 단골집 경영에 지장을 주는 외상도 있다. 그리고 좌석 귀퉁이의 호출기.


마지막으로 공기 속에 적당한 밀도로 품위와 예의의 입자가 떠다녀야 한다. 취객이 주정을 하거나 취객끼리 시비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잦아서는 곤란하다. 이건 참 어렵다. 단골일수록, 친한 사이일수록 허물이 없고 허물이 없다는 것이 자칫 상대를 무시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발견했다. 발견해내고야 말았다. 약 칠팔 년 전의 일이다. 배추로 전을 부치는 곳을 찾다가 우연치 않게 들어간 음식점이었다. 옛 관아에서 멀지 않은, 유서 깊은 번화가 골목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번화함이 번잡스러움을 데리고 다른 새로운 곳으로 옮아가고 미용실의 가위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잘깍거리는 정도의 가벼운 흥성거림만 남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외떨어진 곳이라고 귀찮아하지 않고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이다. 외지 사람이나 우연히 들르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이 지역 고유의 음식(배추전, 배추칼국수, 무밥, 겉절이비빔밥 등등)이 남아 있는 식단이나 주된 주류가 막걸리라는 걸 알면 고개를 젓기 일쑤다. 물론 한번 맛을 들이면 다른 곳을 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기본 반찬으로 충분히 안주가 되고 막걸리의 변주인 ‘맥막(맥주 한 병과 막걸리 두 병이 혼합된 주전자 술)’도 마실 수 있다. p227



정동
태조의 두 번째 왕후는 신덕왕후. 첫 번째 왕비였던 신의 왕후가 조선 건국 전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첫 번째 왕비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신의왕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과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끝내 화병으로 죽고 만다. 이에 태조는 부인에 대한 애정으로 법도를 어겨가면서까지 사대문 안 궁궐 근처에 무덤을 만들어 정릉이라 이름 지으니, 오늘날 정동이다. 하지만 죽었다고 모든게 끝나지 않는 것이 옛날이야기. p205

이 전기소는 어찌나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덜덜거렸던지 덕수궁 전깃불을 ‘덜덜불’이라 하고 골목은 ‘덜덜골목’이라 불렀을 정도. 원구단에서 임금에게 통달되는 신성한 천명이 덕수궁에 가 닿기도 전에 이 요란한 전깃불 소리 때문에 사그라져 나라 안의 변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결국 전기소는 철거당하고 만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 나라, 그것도 자기 궁 안에서 살해의 위협에 겁을 먹고 이사를 다녀야 하고, 밤이 무서워 불을 밝혀야만 했던 시대. 전깃불을 밝혀야 했던 이유도 사라져 버린 지금은 덜덜 골목에서 나는 요란한 전깃불 소리 때문이 아니라, 왕이 덜덜 떠는 모습을 비추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제 덕수궁의 밤은 환한 야간 조명으로 가득하고, 골목으로는 최신식 엔진을 달고 간간히 지나가는 조용한 자동차 소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p207

<옛사랑>이라는 노래가 절로 입가에 맴돈다. 내가 이 노래에서 단연 좋아하는 부분은 역시 사랑이란게 지겨울 때가 있지. 그래. 사람 사는데 숨 쉬는 공기 말고 지겹지 않은게 또 뭐가 있을 까. 아무리 편한 자세도 얼마를 가지 못하고, 아무리 쓰라린 기억도 결국은 잊히는 걸. 로터리를 돌다가도 언젠가는 한곳을 선택해 나가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갈림길을 만나는 것이 삶이겠지. 나는 그 로터리에 멈춘 채 어디로 갈지를 한참 생각했다. p214



서귀포 칠십리 아트 올레
따스한 남쪽의 나라는 예술가들에게 삶의 피난처였을까. 아니면 새로이 꽃을 피울 꿈의 진원이었을까. 서귀포 시내를 지나는 여섯 번째 올레는 유독 예술의 체취가 짙다. 이왈종과 현종화와 이중섭과 변시지…. 서로 다른 모양새로 다른 시간을 살아간 또는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하나로 제 삶의 일부를 서귀포에 위탁했다. 남인수의 ‘서귀포 칠십리’ 구슬픈 노랫가락처럼 ‘바닷물이 철석철석 소리치는 서귀포’에서 ‘진주 캐는 아가씨’를 찾아 헤맨다. 이내 맘도 어느 시인처럼. 어느 화가처럼 언젠가 서귀포 칠십리가 그리워지려나. p162

‘서귀포 칠십리는 시인 조명암이 1934년에 노랫말을 지었다. 그는 충남 아산 사람이다. 서귀포 여행에서 그 절경에 반해 가사를 썼다. 그는 1948년에 월북했다. 그 때문에 ‘서귀포 칠십리’는 1993년까지 금지곡이었다. 지난 1997년에야 외돌개 동쪽에 노래비가 섰으나 태풍으로 부서졌다. 제주를 닮은 기구한 노래의 사연이다. p164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이다. 빈방에는 이중섭의 사진과 그가 쓴 <소의 말>이 남았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로 시작한 시는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 노래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맑게 열린 그의 두 눈이 아련하다. 이제 섶섬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중섭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철은 마치 그림처럼 스쳐간다.
그 너머로 서귀포항과 천지연 기정길을 돌아 만나는 기당미술관이다. 변시지 화백을 기려 세운 미술관이다. 그는 이중섭과 달리 서귀포에서 태어나 서귀포로 돌아와 서귀포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진행형이다. 황금빛 폭풍의 화가는 ‘제주화’를 그린다. 햇볕을 머금은 세상은 고흐의 해바라기 못지않은 강렬한 노란색이다. 그 황금빛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아래로 목동처럼 거니는 한 사내의 위태한 시선이다. 제주의 바람과 바닷빛은 그의 시선을 빌려 새롭게 태어났다. 살아 숨 쉬는 제주의 기억이다.
저마다의 빛깔이 저마다의 예술혼을 빌려 수놓은 서귀포 칠십리다. 그러므로 만 가지 표정의 올레다. 서귀포 칠십리의 끝자락에서 예술의 길을 갈음하며 한참 동안 제주의 삶을 생각한다. p171  


김제의 머구 형과
거시기다방 송 양
간만에 고향 전주에 갔던 나는 ‘새벽강’에 들렀다. 전주에 가면 꼭 들르는 단골 술집이다. 그 가게의 이름은 술꾼들의 드높은 정신과도 같다. 그 술집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없고 오직 겨울만 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그렇다. 술에 잔뜩 곯아 있다 보면, 그 가게 창문 너머 차가운 얼음 새벽 강이 흐르는 걸 본다. 물론 가게 앞에는 강이 없다. 대신 오래된 도시, 전주의 허름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문득 김제에 사는 머구 형님 소식이 궁금해서 물었다. 주인 누님은 대답도 없이 키득거리느라 정신없다. 오줌이라도 쌌냐고 물으니 그런 셈이라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 재차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준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나 보다. 나는 머구 형에게 전화해서 왜 마흔 다 돼서 오줌 쌌냐 물었다. 머구 형은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나에게 존대를 한다. 나에게 왜 존대하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오줌 싸서 그렇지. p255

우리는 함께 심포로 향했다. 가는 빗발이 가끔씩 내렸지만 시야는 멀리까지 명징했다. 코스모스 꽃무덤 길이 그 끝까지 이어져 있다. 심포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더니 대기가 아주 차다. 겨울에 비 내리는 날 같다. 뻘에 기우뚱 누운 배들 몇이 보이고 하늘과 바다가 동색으로 잿빛이다. 포구 앞 몇몇 가판대에는 갓 캐내온 생합을 팔고 있다. 좀 먹고 가겠다고 하자 가판대에서 라면 끓여 먹던 여인네가 재빠른 손동작으로 생합을 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제 막 깐 생합을 소주와 함께 입에 쑤셔 넣는 풍미가 알싸하다. 나는 어느새 눈 내리는 겨울날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생합에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있지도 않은 눈보라가
휘날린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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