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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끝나지 않는 이야기

포르쉐는 어떻게 역사를 존중하는가. 역사는 어떻게 포르쉐를 지탱하는가. 독일의 한갓진 도로에서 클래식 911을 타며 온 몸으로 배우고 느낀 것들.

UpdatedOn October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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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출장

‘이런 출장을 가게 되는구나.’ 강변북로에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로 가는 방화대교 위에서 기어를 4단에서 5단으로 바꾸며 생각했다. 수동변속기가 달린 클래식 911을 원없이 타는 출장이라니. ‘꿈의 출장’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경험일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내려 고속도로를 지나 창밖의 숲이 점점 짙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커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2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의 이름은 라인란트팔츠. 중세 유럽이 이랬겠구나 싶은, 이층집과 숲만 있던 곳이었다. 1천5백 년 된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을 숙소 삼아 일정이 시작되었다. 돌로 포장해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굴릴 수 없는 호텔 입구에 초록색 스포츠카가 가 한 대 서 있었다. 911 1백만 대 판매 기념 모델. 차 번호도 911. 숙소, 동네, 앞에 전시된 차까지 이 행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건 명확했다. 포르쉐의 전통.

대단한 차

포르쉐의 전통을 체험하기 위해 이슬이 가시지 않은 아침부터 출발했다. 포르쉐의 전통을 느끼는 법은 역시 포르쉐를 몰아보는 것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포르쉐 박물관이 관리하는 박물관급 차들이 출동했다. 이날 탄 역대 911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1968년식 911 L
1984년식 911 WTL 카브리오
1998년식 911(코드네임 993) 터보 S
2001년식 911(코드네임 996) 카브리올레
2007년식 911(코드네임 997) 타르가 4S
2013년식 911(코드네임 991) 50주년 에디션
2023년식 911(코드네임 992) 카레라 T

911 애호가라면 나를 3년 정도는 질투할 만한 대단한 라인업이었다. 911은 뭐든 911이었다.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주행 질감과 ‘레일을 깔아둔 듯’ 코너를 달리는 느낌은 세대를 초월했다. 동시에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운전하기 편안해지고, 질감이 고급스러워지고, 점점 날카로워지는 진보 역시 확실히 느껴졌다.
자동차의 면면보다 더 대단했던 건 각 자동차의 상태였다. 나 역시 1990년대 차를 고쳐가며 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 자동차의 상태는 감탄을 넘어 감동적인 면이 있었다. 보통 매물로 거래되는 오래된 차들은 시트, 휠 구석, 스티어링휠이나 손이 자주 닿는 부분, 라디오 스위치, 기어 부츠 같은 부분이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구동 부위로는 변속의 질감이나 브레이크의 민감성 같은 것도 계속 봐야 한다. 그런 걸 세세하게 고치는 건 비용을 넘는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포르쉐 박물관에서 관리하는 역대 911의 상태는 박물관의 실력을 보여주듯 완벽했다. 이런 걸 타고 고속주행을 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포르쉐 담당자는 1998년식 993 터보 S를 타고 있는 나에게 와서 말했다. 조금 더 빨리 달릴 수 있냐고.

대단한 프로그램

이번 행사는 세부 프로그램도 흥미로웠다. 보통 자동차 시승 행사는 코스 자체가 중요하다. 각 코스를 지나며 주행 질감을 전해야 하니까. A 지점에서 출발해 B 지점까지 갈 때 각 지점의 역할은 잠깐 쉬고 기지개 켜는 것 정도다. 이번에는 각 목적지 역시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다. 5백 년째 이어온 식초 양조장, 복원 가치를 지키는 산장, 꾸준히 보수를 지속하는 대성당, 독일 국기의 원본이 보관된 산속의 성, 이런 곳들을 찾아가 해당 지역의 대표나 전문 가이드가 제공하는 설명을 들었다.

출장 지역 자체가 이 행사의 성격을 설명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출장지인 라인란트팔츠 지역은 예전 독일의 전통과 근대 독일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독일판 역사 유적이 많고 그 지역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외지인을 모으는 산업은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빈티지 911을 타고 달리는 내내 고속도에도 차가 많지 않았다. “이곳에 와보지 않은 독일 사람도 많아요”라는 말을 포르쉐 관계자에게 들었는데, 정말 그랬다.

 

“우리 부서가 가장 중요한 부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뭔가가 사라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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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브랜딩

황홀한 컨디션의 빈티지 카. 1천5백 년 된 수도원을 고쳐 지은 호텔, ‘이런 관광상품을 팔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실한 근대 독일사 여행 코스, 이 모든 게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결국 브랜딩이었다. 포르쉐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방향성의 근거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방향성의 근거 역시 명확했다. 독일. 역사. 그리고 스포츠카.

이번 행사 기간 동안 포르쉐에서 직접 진행하는 워크숍을 들으며 이런 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날에는 포르쉐의 역사적 아카이브를 총괄하는 프랭크 융의 소규모 강연이 열렸다. 그는 포르쉐의 티셔츠를 입고 있을 뿐인 역사학자였다. 역사를 전공해 포르쉐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가 강연 자료에 적어둔 자신의 일에 대한 설명이 명료했다. ‘미래 세대의 이해를 위한 회사의 역사를 만드는 것.’ 더 인상적인 건 그들이 정의한 브랜드였다. ‘브랜드는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지금 한국은 브랜딩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한다. 길고 긴 기사는 물론 브랜딩에 대한 책도 많다. 그러나 핵심 개념은 간소한 것이다. 포르쉐의 말처럼.

대단한 브랜드를 지키는 방법

맞는 말은 하기는 쉽지만 지키기 어렵다. 포르쉐가 내게 들려준 멋진 말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멋진 말로 이루어진 약속을 실행하는 것이다. 포르쉐는 자신들이 약속을 지키는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도 보여주었다. 자동차 복원의 방법론이 한 예였다. 박물관 수준의 단체라면 복원 기술을 넘어 복원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 포르쉐는 이미 원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한 959다. 포르쉐는 이 차의 복원을 3단계로 여겼다. 우승한 차는 하나도 안 건드린다. 그 차에 묻어 있는 모든 게 역사 자료니까. 랠리에 참가했던 세컨드 카 역시 보관한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차를 보여줘야 한다면 공장 출고 상태로 복원한다.

아울러 글로벌 브랜드는 모두 각자의 복원부서를 운영한다고 했다. “우리가 복원하는 차들은 이미 팔린 차니까 경쟁이 없어요. 모두 친구예요.” 첫날 저녁 식사에서 복원 책임자 알렉산더 클라인이 해준 말이다. 그 말을 할 때 그의 표졍도 즐거워 보였다.

‘전통은 과거의 혁신이다.’ 헤리티지 워크숍의 슬라이드에 쓰여 있던 말이다. 포르쉐는 이 말대로 스포츠카의 첨단에 대한 혁신을 계속했다. 전기차를 만든 적도 있다. SUV 카이엔도 분명 개념적 혁신이다. 오늘날의 혁신 과제는 지구온난화 문제다. 내연기관의 종말 시대에 자동차 회사의 과제는 단순한 전동화 전환이 아니다. 포르쉐의 ‘헤리티지’인 오래된 차들이 아직도 거리를 달린다. 이 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포르쉐는 탄소배출량을 줄인 대체 원료 e-퓨얼을 개발했다. 이날의 마지막 워크숍은 e-퓨얼에 대한 것이었다. 이날 발표를 맡은 e-퓨얼 코디네이터 카를 둠스 역시 “오늘날 포르쉐는 ‘이중 e전략’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나는 자동차에서, 다른 하나는 연료에서.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사치 역시 연료였다. 이번에 탔던 모든 자동차의 연료가 e-퓨얼이었다.

역사의 효용

“우리 부서가 가장 중요한 부서는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뭔가가 사라지죠.” 프랭크 융이 포르쉐 역사 아카이브에 대한 강연을 끝낸 뒤, 내가 그에게 실례임을 알면서도 짓궂은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내 질문은 이랬다. 이른바 ‘돈이 안 되는’ 부서일 텐데 괜찮은지. 회사에서 압박 같은 건 없는지. 그는 덧붙였다. 엔지니어나 디자인팀도 자신들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를 참고한다고. 나 역시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다. ‘돈 되는 것’들만 따라다니는 지금의 풍조에 조금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르쉐의 여러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포르쉐의 기술, 포르쉐의 고급스러움, 포르쉐의 멋, 그 외 내가 다 짚지 못한 여러 가지. 동시에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고 정리하고, 그렇게 정리된 자료를 다른 부서가 참고하는 것 역시 그들의 경쟁력이었다. 프랭크 융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포르쉐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망설임 없이 “사람”이라고 답했으니까. “이건 마케팅용 대답이 아니에요”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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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무형의 이야기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쓴 이야기 중 하나인 역사가 계속 영향을 미친다. 역사적 물건이 훗날의 자료로 남아 진보의 토대가 된다. 훌륭한 브랜딩은 같은 이야기와 실천의 반복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행사 내내 포르쉐가 그러고 있었다. 포르쉐의 클래식 카를 타고 오래된 골목길을 달리며 몸으로 느낀 점, 성실한 독일 사람들의 복원과 보존 이야기로 말해준 점은 모두 같았다. 전통은 과거의 혁신이다. 브랜딩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하나 더. 포르쉐의 약속은 늘 스포츠카다. 포르쉐 스포츠카는 늘 재미있다. 그 약속을 내내 구경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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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박찬용
Photography 김진표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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