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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의 상점

여섯 남자가 온몸으로 만든, 현대 생활을 위한 일상 사물들.

UpdatedOn March 22, 2017

 

커피잔과 둥근 접시 장재녕

도예가 장재녕은 한때 고고학 발굴 작업을 했다. 전국의 가마터를 돌며 유물을 찾았다. 그것은 곧 흙의 이력을 살피는 일이었다. 흙을 걷어내 옛 시대의 물건을 들어낼 때, 장재녕은 그로부터 압축된 시간을 연상했다. 그때부터 그는 땅과 흙을 다르게 봤다. 흙에서 초월적 아름다움을 느꼈다. 흙을 치고 두드릴 때, 그는 흙에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를 포착해 작품이나 제품을 완성한다.

대량생산을 전제로 일을 배우지 않은 장재녕에게 정도껏 하고 넘어가도 되는 단계는 없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과정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장재녕의 도자기는 제작하는 데 18일이 소요된다. 꼬박 쉬지 않고 작업할 때의 이야기다. 거친 흙을 일부 섞어 매끄럽지 않은 표면을 만들고, 형태를 정제하여 손으로 작업한 느낌을 단단하게 실어낸다. 단순하고 쓸모 있도록. 그의 작업에서 특별한 문양이나 독특한 형태는 논외다. 대신 그 모든 관심을 색감에 쓴다.

장재녕의 도자기는 지층처럼 다양한 색상으로 이루어진다. 흙이 지닌 고유의 색을 11가지로 표현한다. 그중 흑유를 바른 검고 부드러운 커피잔과 둥근 접시를 골랐다. 은은하게 바른 유약은 여기에 담는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손때도 묻고 긁혀 흠이 나기도 할 테지만, 그 모든 얼룩은 사적인 흔적으로 아로새겨질 것이다. 이런 잔에, 그릇에 무얼 담은들 어울리지 않겠는가.

장재녕의 커피잔과 둥근 접시는 소생공단에서 판매.
 

안경 김종필

‘핸드메이드’는 너무 쉽게 쓰는 단어가 됐다. 한 단계 작업만 손으로 하고도 억지스럽게 표식을 붙이며 유난을 떨거나, 핸드메이드라는 간판 뒤에 숨어 조악하기 그지없는 디자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김종필의 안경 ‘수작전(手作展)’은 그런 가짜와는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손으로 만든다. 안경 모양을 그리는 일부터 아세테이트 판을 세밀하게 깎아내는 일, 알맞은 균형감을 찾아내 매끄럽게 다듬는 일을 모두 손으로 해낸다.

아세테이트 판을 한 개씩 톱질하여 만든 안경에는 톱이 지나간, 거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크기가 작은 검은색 프레임과 호피 무늬 다리, 둥글린 코받침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종필은 안경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미약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안경을 디자인하고 만들어온 1세대 안경 작가다. 그가 완성하는 수작전의 안경들은 작가의 대단한 능력이나 넘볼 수 없는 기법으로만 점철되어 있지 않다. 누구라도 조금만 배우면 쉽게 다룰 수 있는 아세테이트를 사용해 일상에 스며들 수 있는 공예품으로서 안경을 만든다. 완성품에서는 제각기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모든 안경이 세상에 하나뿐이다. 고유하나 부담스럽지 않다. 디자인과 실용성을 동시에 고민하고 그 둘의 접점을 찾으려 꾸준하게 고민한 결과다. 그렇게 수작전은 클래식한 멋과 위트를 품었다. 프레임의 깊이는 깊은 편이다. 시력이 매우 나빠 두꺼운 렌즈를 제작해야 하는 경우에도 들어맞는다. 클립을 끼우면 선글라스로도 쓸 수 있다.

김종필의 안경 ‘수작전 C-1’은 소생공단에서 판매.
 

볼펜 심현석

‘내가 쓰기 위해 만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갈 수 있다’는 공예가의 원칙은 사려 깊다. 존중받아 마땅한 정신이다. 만들어야 할 물건은 분명히 존재한다. 억지로 만든 사물들을, 사람들은 알아본다. 10여 년 전, 금속 공예가 심현석은 손으로, 금속으로, 자신이 쓰기 위한 카메라를 만들었다. 뷰파인더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원시적인 형태의 카메라였다. 자신이 쓸 것을 먼저 만들고, 수량이 많아지자 다른 이들에게 보냈다.

사용할 카메라를 충분히 만든 심현석이 다음으로 제작한 것이 이 볼펜이다. 선물받은 값비싼 펜도 결국 잃어버리고야 만 그는 5년째, 자신이 만든 이 볼펜 하나만 쓰고 있다. 공예가 심현석은 언제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만든다. 판매하기 위한 물건도 자신이 쓸 것을 먼저 생각하며 만들고 실제로 사용해보며 완성한다. 근본적인 기능과는 완벽히 손잡고, 그 외의 것들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심현석이 적동, 은(정은), 황동으로 완성한 이 볼펜들은 아름답고 실용적이며 튼튼하다. 쥐고 있으면 부드럽고 은근하게 체온이 공유된다. 펜에는 제조 날짜와 생산자인 심현석의 사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가늘게 새겨져 있다. 볼펜심을 제외한 부품은 모두 본체와 동일한 재료로 만든다. 원시적인 걸쇠 장치로 볼펜심을 넣고 빼는데, 단순하기에 고장 날 염려가 없다. 이 펜만 있다면 남은 평생 다른 필기구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심현석의 적동·은·황동 볼펜은 소생공단에서 판매.
 

유리잔 박성훈

박성훈은 온몸으로 유리를 불어 이 잔을 완성했다. 램프워킹, 핫 캐스팅, 블로잉 등 다양한 유리공예 기법 중 불어 만드는 방법을 블로잉이라 한다. 작가 박성훈이 가장 즐겨 쓰는 방식이다. 유리는 액체의 특성을 간직한 고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유동체이기도 하다. 블로잉은 유리의 이러한 물성을 완전히 이용한다. 작가가 숨을 불어넣으면 유리는 액체에서 고체로, 고체에서 액체 형태로 넘나들며 변화한다. 작가는 움직임과 정지, 열의 강약 조절을 수없이 반복하며 유리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때에 유리는 작은 날숨 하나에도, 미미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성훈은 블로잉을 두고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손동작과 행동 하나하나에 유리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재료의 특성을 조금이라도 잘못 이해할 경우 원활한 표현이 불가능할 만큼 까다롭다.” 블로잉은 작가에게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기술적 탐구와 숙련이 요구되는 기법인 것이다. 숨을 불어넣어 만든 이 작은 유리잔에는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 사유와 정신이 담겼을까.

잔의 모티브는 애벌레다. 박성훈은 자신의 작품을 여전히 ‘유충기’라 설명한다. 투명함과 불투명함, 거친 표면과 부드러운 내면이 대비되며 공존하는 잔에는 빛의 굴곡이 반복적으로 생긴다. 반짝이는 유리와 불투명하고 섬세한 무늬가 극적으로 어우러진다. 유리가 이룰 수 있는 극명한 아름다움이 서렸다.

박성훈의 유리잔 ‘토야마 06’은 KDCF 갤러리숍에서 판매.
 

구리 드리퍼 김현성

동글동글한 나무 손잡이를 잡는 순간, 마치 오래전부터 곁에 두고 사용해온 듯 편안한 온기가 전해진다. 구리로 만든 커피 드리퍼에는 손의 흔적이 역력하다. 기계는 따라 하려야 할 수도 없는 거친 자국이 가득하다. 금속공예가 김현성은 스승에게서 금속공예의 정석을 배웠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망치질만으로 금속판을 구부리는 방법, 금속을 다루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망치로 금속을 내려치면 표면에 망치 자국이 남는다. 그러면 표면이 매끈해질 때까지, 망치 자국이 지워질 때까지 망치질을 해야 한다. 수없는 줄질과 12단계에 걸친 사포질도 해야 한다. 누적된 시간을 온전히 관통해야만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물방울 모양의 이 커피 드리퍼는 구리를 두드려 만들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김현성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구리로 된 커피 드리퍼는 커피를 내리는 동안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

구리 드리퍼는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만든, 오래도록 곁에 두고 쓸 물건이었다. 드리퍼 옆면에는 리브(물이 빠지는 좁은 골)를 냈다. 부식 방지를 위해 그는 드리퍼 안쪽에 주석 도금과 주석 땜을 했다. 이 역시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의 드리퍼엔 몽글몽글한 땜질 자국이 거칠게 남아 있다. 둥근 몸체에는 다양한 손잡이를 결합한다. 드리퍼는 각각 나름의 표정을 갖게 된다.

김현성의 칼리타 드리퍼는 소생공단에서 판매.
 

유기 커틀러리 이종오 + 송승용

주석과 구리를 각각 22%, 78% 비율로 합금한다. 유기란 그렇게 만든 놋쇠 그릇이다. 놋쇠로 된 이 양식 커틀러리는 서울번드와 이종오 유기 명장, 송승용 디자이너의 합작품이다. 티스푼은 둥근달, 나이프는 반달 형상이다. 그래서 이름이 라 륀(La Lune). 달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포크는 현대인의 식생활에 맞게 기름진 음식을 먹기에도 편한 길이로 완성했다. 서울번드는 한국이 품은 전통과 현대의 융화를 제품으로 표현하는 회사다.

정통성을 유지하되 가장 현재적이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일상 사물들을 소개한다. 여기에 전통을 중시하며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기 명장 이종오, 한국의 전통 디자인을 모티브로 제품을 생산한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 송승용이 뭉쳐 이 작은 커틀러리 세트를 완성했다. 국내에 없는 유기 나이프를 제작하는 일은 어려웠다. 전통을 중시하는 명장은 많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안성맞춤 전통 유기 명장 이종오는 40여 년 동안 전통 주물 방식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유기 그릇을 만들어왔다. 게다가 그 누구도 하지 않은 도전에 나선 용사다.

유기는 모든 제작에 일정한 시간과 정성이 든다. 단 하나의 공정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라 륀은 다음과 같은 인내를 거쳐 완성된다. 디자이너 송승용이 형태를 디자인하면, 이종오는 그 샘플을 가지고 틀과 모래를 이용한 사형을 만든다. 사형을 제작한 뒤에는 구리와 주석을 섞어 녹여서 사형에 붓는다. 사형에 부은 금속이 다 굳으면 틀을 부순다. 이걸 사포로 가공하고 다듬어 완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놋쇠 스푼과 포크와 나이프가 탄생한다.

이종오와 송승용의 커틀러리 세트 ‘라 륀’은 서울번드에서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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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이경진
PHOTOGRAPHY 기성율
ASSISTANT 김윤희
COOPERATION 소생공단, 서울번드

201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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