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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의 왕국이야?

지금까지 성폭행 사건을 보며 우리는 이런 의심을 품었던 것도 같다. 여자가 왜 모텔에 따라갔을까, 밤늦게 왜 술을 마시고 다니는 걸까. 치마 길이는 왜 이렇게 짧은 걸까 등. 이따위 생각에 송강호식 드롭킥을 날리자.

UpdatedOn September 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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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그랬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그 말은 틀렸다. 대한민국은 군주제가 아니고, 대통령제니 왕국은 아닐 것이다. 굳이 정답을 찾자면 강간의 공화국, 강간의 민주국가 정도 될까.

2005년 1만5천여 건이었던 성범죄 발생 건수는 2014년 2만9천여 건으로 늘어, 거의 2배 가까이 수직 상승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3년 성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은 1.1%, 강제추행은 5.3%, 강간 미수는 6.6%만이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절대치의 성범죄가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다. 해마다 성범죄가 약 3만 건 발생하고 있으니 하루에 85건이 넘는 성범죄가 일어나는 꼴이다. 물론 신고한 것만 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언론에서는 사건이 마치 정부의 스캔들이나 정책 과오를 덮기 위한 음모인 양 적극적이고 자극적으로 떠들었다. 최고 아이돌이자 촉망받는 배우가 룸살롱에서 접대부를 끼고 술을 마셨고,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했으며, 알고 보니 상습적이더라는 이야기.

법적인 결말과는 상관없이 이슈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세상은 사건의 본질을 외면했다. 피해자들이 최초 신고를 망설인 이유는 술집 접대부인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믿어줄 것인가 하는 회의였다고 한다. 사건이 기사화된 이후 사람들의 반응 또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피해자 신상이 온라인에 떠돌아다녔으며, 사람들은 꽃뱀인지 아닌지 추측하느라 바빴다.

성범죄 신고율이 낮은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신고한 당사자는 본인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충분히 저항했음을, 꽃뱀이 아님을,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음을, 당일 야한 옷차림을 하지 않았음을, 즐기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 다른 포르노의 주인공이 된다. 고소를 하면 고소녀가 되고, 화장실에서 당하면 화장실녀가 된다.

지난 총선에서 굳건한 3당으로 자리매김한 국민의당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을 78.4%나 참고 넘어간다는 수치에, 이것이 미덕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신고하면 유난을 떠는 사람으로 찍힐 뿐, 달라지는 게 없다.

도리어 2차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성추행을 자행한 상대는 한 가정의 가장이어서, 잃을 게 많아 용서를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성추행 피해자는 한 사람의 신세를 망치려고 작정한 ‘프로불편러’가 되기 십상이다.

한때 법무부 차관은 한적한 별장에서 성 접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동영상이 나왔다는 이야기, 마약을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객관적 자료가 없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묵살되었다.

그는 올해 변호사 등록을 허가받았다. 어떤 지방 고검장은 대로변에서 여고생을 앞에 두고 음란 행위를 하다 적발되어 옷을 벗었다. 그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현 정부 초대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미국 순방길에 인턴 여성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가 현지에서 붙잡혔다.

국제적 망신을 치른 그는 공소시효가 종료되자마자 본인에 대한 마녀사냥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국회의장을 지낸 원로 정치인은 골프 모임에서 여성 캐디를 성추행해 불구속 기소됐다. 그는 캐디가 손녀처럼 보여 가슴을 한 번 찔렀을 뿐이라고 말했다.

개돼지가 아닌 1%도 성범죄를 끊임없이 일으킨다. 99%는 어떠한가. 지나가는 20대 여성을 보며 차문을 열어놓고 보란 듯이 자위 행위를 한 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뉴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댓글은 이랬다.

‘그러게 왜 문을 열어서…’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 심지어 ‘별일도 아닌데 신고를 해서 선수 인생 망쳤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솔직히 남자라면 대낮에도 서지 않습니까. 성욕을 어찌하란 말입니까.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성범죄를 당한 여성에 대해서는 온갖 잣대와 현미경을 들이대며 엄중하게 판단하던 손가락들이 가해자인 남성에 대해서는 포용과 온정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평소 행실과 그날의 행동을 따지고 들면서, 가해자의 욕망은 긍정한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 걸까.

남자의 성욕은 너무나 과장되어 있고, 당연시되었고, 포용되고 인정받았다. 동시에 관계를 맺기 위해(그것이 섹스가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정성을 들이고 대화하고 매력을 보여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하고 싶어 한다.

여차하면 섹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술에 취한 여자,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 같은 과 새내기, 이제 데이트를 시작한 여성… 그러나 이들 모두에게는 성적 결정권이라는 게 있고, 싫다고 말하면 싫은 것이다. 싫다고 하는데도 당신이 섹스를 했다면, 그것은 성폭행이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 대해 판단하고, 추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2차 폭력이다.

2000년대 초반 <태극기 휘날리며>에 앞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실미도>에서는 도서 지역에 근무하는 간호사가 실미도 훈련병에게 윤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15세 관람가인 이 영화에서 강간당하는 여성의 고통은 ‘블러’ 처리되지만, 섹스하지 못해 고통받는 남성의 일그러짐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된다.

여기가 실미도인가? 남자의 성욕은 그렇게나 참을 수 없이 해결해야만 하는 지고지순한 본능인가? 모든 게,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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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서효인(시인)
Contributing Editor 이우성

2016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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