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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가라사대

On July 31, 2015 0

한국은 물론 전 세계는 지금 ‘힙합’으로 뜨겁다. 한국에서 힙합 음악이 뿌리를 내린 지도 20년이 돼간다. 힙합의 탄생과 성장, 전파에 대한 역사를 새삼 되짚고자 하는 건 한국 힙합의 현재를 바로 보기 위함이다.




뉴욕의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1970년대 초반, 디제이 쿨 허크(Kool Herc)가 사람들이 춤출 수 있도록 고안한 디제잉 방식은 이후 ‘힙합(Hip Hop)’이라는 흑인들만의 거리 문화로 발전했고, 힙합은 지난 40여 년간 세계 대중문화 곳곳에 침투하여 트렌드를 이끌어왔다. 그동안 음악적으로도 몇 번의 옷을 갈아입었고, 힙합을 이루는 많은 요소 또한 변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힙합 문화가 간헐적으로 흡수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따지자면, 한국 힙합의 역사도 결코 짧지 않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PC 통신과 클럽 마스터 플랜(Master Plan)을 매개체로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이 뭉치기 시작한 1997년을 시작점이라고 봤을 때 대략 18년 정도다. 그리고 근 몇 년 사이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다. 겉으로만 보자면, 연예 매체들이 말하는 대로 ‘대세’라 할 만한데, 그런 의미에서 인종적, 계급적으로 지독하게 차별받은 이들을 대변하는 대표적 매개체였던 힙합이 한국에서까지 큰바람을 일으키는 현실과 이에 따른 크고 작은 부작용을 살펴보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힙합의 사회적 탄생 배경을 간략하게나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주 옛날부터 흑인과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백인이 흑인의 사회적, 경제적 접근을 철저하게 탄압하면서 흑인은 예술적인 영역에서만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뿌리가 되는 표현 방식이자 생존을 위한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음악이었다. 흑인의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솔(Soul) 음악이 그러한 역할을 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힙합 음악이 역할을 대신했다. 그만큼 흑인에게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것을 넘어 삶과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거나 그것을 대변하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였다. 자연스레 흑인의 문화는 그 어떤 문화보다 음악을 중심으로 삶과 관련한 모든 것이 긴밀하고 촘촘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힙합을 ‘음악’이 아니라 ‘문화’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힙합이 뉴욕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에서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몰려든 유색 인종들의 집결지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로 건설과 함께 브롱크스에 불어닥친 근대화 열풍은 이 지역을 새로운 도시로 발전시켰지만, 남쪽 지역은 상대적으로 황폐화되었는데, 1970년대로 접어들고 흑인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사우스 브롱크스’의 고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브롱크스에서 살던 흑인들은 생존과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부터 흑인 사회에 대한 고립과 황폐화가 동부 전역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생겨난 여러 갱 집단의 활동이 맞물리면서 흑인 특유의 문화적 양식 역시 그들의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곳곳에서 형성되었다. 그 중심에서 바로 랩/힙합 음악과 문화가 태동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최초 솔과 펑크(Funk) 음악을 재료 삼아 흥겹게 시작한 힙합 음악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아이스 티(Ice T) 등등, 당대 현실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닌 래퍼들과 이를 엔터테인먼트적으로 결합시키려는 제작자들 간의 결합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소수자 집단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음악이 되었다. 한국에서 여전히 많은 이가 ‘힙합은 저항의 음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그러나 저항과 비판 정신이 힙합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간과해선 안 되겠다. 탄생이 그러했듯이 파티와 개인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 역시 힙합의 중요한 부분이니까.

어쨌든 이러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힙합은 사회적, 계급적으로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혀 다른 환경인 한국에서 온전히 문화로 뿌리 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국 힙합 신과 보폭을 비슷하게 맞춰왔으며, 슬럼가 출신의 래퍼가 종종 등장하는 프랑스나 독일의 힙합 신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힙합은 애초부터 본질적인 부분은 뒤로 밀려난 채 표면적인 부분만 이식되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한계점을 안고 출발한 한국 힙합은 PC 통신 동호회(하이텔 ‘검은소리’, 나우누리 ‘돕사운즈, SNP’) 출신 래퍼들과 교포 출신 래퍼들(드렁큰 타이거, 업타운)의 행보가 이어지며 어느 정도 장르적인 틀이 형성된 후, 2000년대 중반에 인디 레이블(소울 컴퍼니, 빅딜 레코드, 하이라이트 레코즈, 일리네어 레코즈 등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대의 래퍼들까지 가세하면서 비로소 ‘신(Scene)’을 형성하게 됐다. 이 사이 드렁큰 타이거가 ‘Good Life’를 통해 한국 가요 사상 최초로 순수 랩/힙합 곡이 차트 1위를 기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연출하기도 했다. 향후 몇 년간 힙합은 비록, 메이저에서 영향력은 미미했을지언정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전례 없이 왕성하고 탄탄한 장르 신으로 위세를 이어왔는데,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과 달리 세계 대중음악의 트렌드를 발 빠르게 접하고 흡수할 수 있게 된 환경과 일반 가요에선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주제를 다루는 장르적 특성이 절묘하게 맞물린 덕이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기 장르가 된 랩/힙합은 한국 음악 팬들에게도 (감성적으로 멀진 몰라도) 더 이상 생소한 음악이 아니었으며, 그중 10대를 비롯한 젊은 음악 팬들은 언어 유희와 또래의 생각이 담긴 가사, 그런 가운데 거침없는 배설의 쾌감마저 안기는 힙합 음악에 열광했다. 특히 다이나믹 듀오, 드렁큰 타이거, 에픽하이, 리쌍 등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는 가운데 키비와 더 콰이엇이 주축이었던 소울 컴퍼니와 데드피, 딥플로우, 마일드 비츠, 이그니토 등이 속한 빅딜 레코드가 묘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팔로알토, 라임어택, 오버클래스, 이센스, 도끼 같은 스타일 확실한 래퍼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간 약 2006년부터 2011년까지는 가히 ‘한국 힙합의 황금기’라 할 만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를 계기로 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가장 크게 대두한다. 일단 이때를 기점으로 힙합 뮤지션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방법론은 미국 힙합을 참고하되 한국 힙합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구축하고자 하는 측과 미국 힙합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측으로 고르게 나뉘던 것에서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비트와 가사 모든 면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리고 이 시기에 미국 메이저 힙합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게 다름 아닌 부와 명예를 과시하는 ‘스웨그(Swag)’였다.

곧 도끼, 더 콰이엇, 빈지노 등,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이미 최고의 스타가 된 셋이 뭉친 일리네어 레코즈를 중심으로 이러한 경향의 가사를 담은 랩이 힙합 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사실 흑인의 사회적 진출이 철저하게 가로막혔던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사회와 블랙 커뮤니티의 상황과 긴밀하게 엮여 나오고 쾌감이 된 이러한 미국 래퍼들의 물질 스웨그를 한국 래퍼들의 경우에까지 고스란히 대입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큰 기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건 힙합을 즐기는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시기적으로도 미국 힙합보다 한국 힙합에 대한 수요가 훨씬 증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 래퍼들의 음악만으로 힙합에 입문하게 된 이들 역시 많아졌으며, 현 한국 힙합 팬 중 래퍼 지망생이 많다는 현실도 한몫했다. 그들에게 래퍼들의 성공은 곧 한국 힙합의 성공이었으며, 메이저와 타협하지 않고 부를 이뤘다는 것 자체가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음악적 완성도와 가사의 질을 논하는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렇게 힙합이 이전과는 다른 방향에서 젊은 층의 지지를 얻는 가운데, 상업적으로 커지게 되는 불씨를 댕긴 게 바로 엠넷의 힙합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다. 힙합에 대한 제작진의 무지에서 비롯된 여러 논란에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인기를 더해갔고, 처음엔 비판하던 기성 래퍼들이 대거 동참하게 되면서 이젠 한국 힙합보다 큰 방송이 되어버렸다. <쇼미더머니>에 나간 래퍼들은 실력과 이전 경력이 어떻든, 방송에서 어떤 민망한 행보를 보이든 상관없이 어느 정도 주목받기만 한다면 메이저 기획사와 계약하거나 행사 몸값이 훌쩍 뛰는 상황이 됐고, 어린 힙합 팬들은 뮤지션들의 먹고살기를 걱정하며 동정심과 다름없는 왜곡된 지지를 보내는 게 현 한국 힙합의 상황이다.

분명 한국에서도 ‘힙합’이란 두 글자가 지닌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그러나 약 18년여의 치열한 과도기를 거치며 무시할 수 없는 문화로 토착화되는가 싶었던 한국 힙합은 장르와 문화 본연의 멋과 역사를 탐구하길 멈춘 많은 뮤지션들과 산업 관계자들에 의해 다시금 기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힙합이 한국의 대중문화 한편에 무사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주류 문화가 표현하지 못하는 주제를 다루는 차별성과 고유의 멋 때문이었다. 시대가 바뀌면 흐름은 바뀌기 마련이지만, 그 근간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국외의 힙합 신과 달리 장르에 대한 저급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방송 프로그램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현 한국 힙합 신은 아무래도 안타깝다.


WORDS: 강일권(<리드머> 편집장)
EDITOR: 조하나
ILLUSTRATION: Hey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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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리드머>편집장)
Editor
조하나
Illustration
HeyHoney

201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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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리드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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