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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 놈의 가사

아무리 멜로디가 좋은 곡이라도 가사가 저급하면 생명력이 짧다. 과거의 노래는 생명력이 길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br><Br>[2008년 6월호]

UpdatedOn May 23, 2008

Editor 이기원 Photography 박원태

점점 가요를 듣지 않게 된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요즘 가요’를 듣지 않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디지털 싱글이니 뭐니 수많은 곡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음악은 가볍고, 가사는 참담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일라치면 여자에게 수작을 걸다가 차갑게 거절당한 것 같은 낭패감이 밀려든다.
얼마 전 한 카페에서 박현빈의 ‘샤방샤방’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얼굴도 샤방샤방 몸매도 샤방샤방 아주 그냥 죽여줘요’라는 구절을 듣는데, 정말 ‘콱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듣는 사람이 민망할 만큼 뻔뻔한 가사를 가진 이 노래는 한동안 성인 가요 차트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물론 그들은 트로트는 으레 이래야 한다고, 이런 식의 단순한 반복 구절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대중 친화적이라기보다는 대중을 무시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같은 노래도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지만 곡의 수준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얼마나 대중을 우습게 봤으면 이딴 걸 노래라고 하나 싶은 거다.

그러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나만 좋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맞다. 자신만 좋으면 된다. 하지만 이런 저급한 노래들이 음반 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어디에서도 귀에 들려올 정도면 그때는 거의 공해 수준이 된다. 지난해, 모바일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하하의 ‘키작은 꼬마 이야기’는 광장시장에서도, 압구정 스타벅스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후광을 입었다 해도, 아무리 친숙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선무당이 염불이라도 외우는 것 같은 이상한 발음 뒤에 ‘죽지 않는다’는 밑도 끝도 없는 가사가 난무하는 이 장난 같은 노래가 대한민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노래라는 사실은 참 슬프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이 땅의 노래에는 어떤 품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된 과거인 1953년, 백설희가 불렀던 ‘봄날은 간다’의 첫 구절은 이렇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이 한 구절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어떤 스산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1964년, 요즘의 원더걸스가 우스울 만한 반향을 일으키며 데뷔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어떤가.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같은 대목은 은유의 측면에서 가사라기보다는 잘 짜인 운문에 가깝다. 아니, 국민 노래였던 김민기의 ‘아침 이슬’에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라고 노래할 때 느꼈던 서늘한 기운은 또 어떤가. 이 가사들은 해야 할 말을 모조리 쏟아 붓는 대신에 생략하고 압축한다. 입가에서 맴도는 수없이 많은 말들을 자르고, 붙이고, 조합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면서 모진 세월을 이겨낼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이 가사들에는 분명 어떤 ‘절제’가 있었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고민과 실험의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가사들에는 이런 압축 과정은커녕, 일기장에도 쓰지 못할 과장과 비약만이 넘쳐난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밀도는 떨어지고 운율이 주는 리듬감도 없다. 천박한 감상만이 해일처럼 넘쳐난다.
음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9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같이 천박한 노래들이 득세할 거라고 생각한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서태지를 기점으로 댄스 뮤직이 시장을 장악할 때도, 시장의 성향은 바뀌었을망정 음악의 수준 자체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음반 시장의 몰락은 곧 어덜트 뮤직의 붕괴를 가져왔고, 수준 높은 뮤지션과 리스너가 동시에 사라진 가요는 이제 휴대폰 벨소리 정도로만 인식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제된 가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곡이 적어도 누군가의 입에서 최소한 백 번 이상은 흥얼거려질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이런 가사는 공격받아 마땅하다. 한 번 듣고 쓰레기통에 버려질 일회용을 원한 것이 아니라면 가수와 작사가들은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인기 차트의 상위권에 앉아 있는 노래들 중 10년 후까지 살아남아 불릴 노래가 과연 몇이나 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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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기원
Photography 박원태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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