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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 브랜드가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

계급이 무너진다. 평범한 보통 남자들이 어깨를 편다.

UpdatedOn March 12, 2014

SPA 브랜드의 매장에선 남자도 조금은 어깨를 편다. 일단 공간이 운동장처럼 넓고 사람이 많아서 점원이 쫓아다닐 수 없다.
아무 옷이나 적당히 골라 집어 몸에 걸쳐도 대충은 어울린다.

친구가 말했다. “자라가 세일한다는데?” 자라가 세일하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말하려는데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연장 영업도 한대. 옷이나 사러 갈까?” 언제부터 너희가 옷 사러 가자는 말을 쉽게 했어?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답을 아니까.

일단 나는 남자고, 남자인 내 친구들은 코엑스가 강남에 있는 큰 수족관인지 안다. 알록달록 바다 생물이 모여 사는 그 수족관. 물론 비유다. 우리는 강북에 살았고 여전히 강북에 살고 있다.
패션 매거진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로 나는 예외가 됐지만, 친구들에게 쇼핑은 장소로 표현하면 낯선 곳이다. 우리는 서로가 어떤 옷을 갖고 있는지 안다. 다 안다. 옷이 많지 않으니까. 옷을 많이 가진 친구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입고 다니는 옷은 항상 같다.

그래서 친구 중 누군가 새 옷을 입고 오면 말한다. “뭐야, 언제 샀어? 말도 안 하고 사냐?” 말을 하고 사야 하나? 그렇다. 말을 안 하고 옷을 사는 건 배신이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됐다.

왜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답은, ‘나’도 옷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나뿐 아니라 친구들 각각인 나,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보통 남자인 많은 나. 그런데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사야 하는지 모른다. 패션 잡지를 보면 비싼 것뿐이다.

그래서 “말도 안 하고 사냐?” 뒤에는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어디서 샀어?” 내 친구들은 주로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산다.
아니, 샀다. 입어보지 않고 옷을 사는 게 불안하지만 대신 인터넷 쇼핑몰은 남자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눈치 안 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 다가와서 말 거는 점원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을 확인하기 위해 태그를 뒤적이는 폼 안 나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얼마인지 봤을 뿐인데 왜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거지….

옷가게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어깨는 움츠러들고 시야는 좁아진다. 생각해보자. 왜 여자친구와 옷을 사러 갈까? 여자의 넓은 등 뒤로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 대신 가격을 확인해주고 “비싸니까 사지 마”라고 당당하게 말해준다.
옷을 들고 이리저리 대보며 “안 어울린다”는 말도 해준다. 점원의 등쌀에 못 이겨 마음에 안 드는 옷을 사지 않아도 된다.
여자는 남자가 옷가게에만 들어가면 지구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설마 옷가게에서만 그럴까). 쇼핑은 대부분의 남자에게 약점이다. 하지만 패션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단언컨대 없다.

그런데 남자들이 ‘낯선 곳’에 가자는 말을 쉽게 하기 시작했다. SPA 브랜드라는 게 있다. 자라, H&M, 에잇세컨즈, 유니클로 등의 의류 브랜드를 일컫는다. 대체로 패션 저널리즘은 SPA 브랜드를 패션 산업과 패션의 본질을 망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SPA 브랜드는 옷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간단하게 적으면 디자인, 생산, 유통을 직접 한다. 운동장처럼 거대한 매장은 SPA 브랜드의 상징이다. 옷을 벽돌 찍듯 쭉쭉 뽑는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SPA 브랜드 매장에 가면 유행하는 모든 옷이 있다.
패션 저널리즘이 되풀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아레나> 패션 에디터에게 물었다. “SPA 브랜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패션 에디터가 대답했다. “카피를 너무 많이 해요. 심지어 동대문에서 파는 옷까지 카피한다던데.” SPA 브랜드가 디자인을 창조의 산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려고 존재하는 브랜드는 아니니까. SPA 브랜드는 지금 입을 옷을 싸고 빠르고 그럴듯하게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SPA 브랜드를 통해 기업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다. “자라랑 H&M이 돈을 긁어가는데 삼성에버랜드가 SPA 브랜드를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죠.” 패션 에디터가 대답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삼성에버랜드’가 론칭한 SPA 브랜드는 에잇세컨즈다.
이랜드가 SPAO(이름부터 스파다)를 만들었고, 탑텐은 신성통상이 만들었다. 돈 많은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SPA 브랜드를 만든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당대에는 양이 질을 이긴다.

패션 저널리즘을 구성하는 일원인 기자, 패션 칼럼니스트, 패션업계 종사자들에게 패션이란 아티스트인 패션 디자이너가 떠올린 영감의 구체적 표현일 것이다. 패션 매거진에 실린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기 위해(그들 표현으로는 ‘새 시즌’) 그들이 얼마나 애쓰는지 알 수 있다. 때로 그 노력은 숭고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패션은 수많은 보통 남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옷을 입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멋쟁이만을 위한 나라는 없다. 웃긴 비유지만 목적과 당의야 어쨌든 지금의 SPA 브랜드가 끼친 영향은 시민이 비로소 투표권을 획득한, 살아보지 않은 어떤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SPA 브랜드는 평범한 남성이 패션을 향유할 권한을 주었다. 이 말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주장한다. 고가의 패션 브랜드는 평범한 남성이 패션을 향유할 권한을 박탈한다. 물론 비약이다.
패션 브랜드를 SPA 브랜드와 고가 브랜드로 이분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순전히 그 이유 하나 때문에(라고 나는 생각한다).

패션 디자인이 숭고한 창작의 결과인 것은 맞다.(하지만 유명 패션 하우스도 간혹 스스로 복제하지 않나?) SPA 브랜드는 이런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존재한다. 오직 판매! SPA 브랜드의 기치다. 전통이 없으며 시간을 견디는 옷을 만들 필요도 없다. 그런 디자인을 고민할 필요 역시 당연히 없다. 하지만 익히 이름이 알려진 유명 패션 하우스는 계급이라는 사회적 틀의 비호 속에서 발전했다.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크리켓을 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승마와 폴로 경기도 마찬가지다. 마차를 타고 피크닉을 가는 건 귀족의 여가였다. 수발을 들 하인이 없었다면 패션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패션이 계급을 드러내지 않았던 때는 없다.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평범한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여전히 그렇다. 시대 문화의 첨단을 달리는 패션 브랜드의 옷은 예외 없이 고가다. 신분 제도는 철폐됐지만 옷은 여전히 계급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훌륭한 패션 디자이너들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산업 디자이너인 필립 스탁처럼 의자 하나로, 아니 디자인된 제품 하나로 민주주의를 논할 만한 패션 디자이너가… 있었나? 저렴하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은 이른바 ‘모던 디자인’의 기치였다(이러한 제품 디자인은 SPA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넓은 관점에서는 현대 패션이 지향해야 할 바를 환기한다). 몇몇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대중에게 좋은 제품을 고를 권한을 돌려주었다. 물론 이들은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역사를 막론하고 패션 디자이너는 기득권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카르텔을 구축했다. 하지만 SPA 브랜드는 무엇인가 이루어내고 있다.

안다. SPA 브랜드는 영혼이 없다. 한시적인 유행만이 있다. 그런데 SPA 브랜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며 평범한 사람이다(‘88만원 세대’라고 적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88만원 세대’는 오히려 그 세대를 비하하는 표현 같다). 다행히 이들이 겨냥한 평범한 사람 중에 남자가 포함돼 있다. 언제나 그렇듯 남자는 쉽게 ‘낚’인다.

SPA 브랜드의 매장에선 남자도 조금은 어깨를 편다. 일단 공간이 운동장처럼 넓고 사람이 많아서 점원이 쫓아다닐 수 없다.
아무 옷이나 적당히 골라 집어 몸에 걸쳐도 대충은 어울린다. 대부분의 옷이 어떤 평균을 지향하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변별력은 SPA 브랜드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변별력은 패션에 관한 한 수준이 보통이거나 그 이하인 남자들이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비슷한 옷, 심지어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갈 때 낯 뜨겁지 않을까?’라는 SPA 브랜드에 대한 비난은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가는 남자를 보면 안도한다. 아, 이렇게 입어도 괜찮은 거구나, 라고. 모든 사람들이 패셔니스타인 건 아닌데

Editor: 이우성
photography: 박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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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우성
Photography 박원태

2014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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