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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세운상가는 무엇입니까?

서울시와 종로구는 “2008년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대규모 녹지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심의 고질적인 열섬 현상과 대기오염을 줄일 것이라는 기대를 밝히면서. 세운상가 키드인 당신도 서울시와 똑같은 심정일까. 40년 동안 우뚝 서 있던 세운상가에 대해 건축가 이건섭, 화가 강영민, 시인 조병준이 추억했다. <br><br>[2007년 10월호]

UpdatedOn September 19, 2007

Photography 정재환 Editor 이민정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주었네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중에서)

서울 근대화의 성장통
90년대 초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던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1995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이 시에서 세운상가는 모든 불확실한 것들의 집합체, 그리고 성장통을 앓는 청춘의 열병을 상징한다. 관점을 조금 더 확장해보면 세운상가 자체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성장통을 상징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도시든 사람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앓고 또 그 통증으로 상처가 덧나기도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원숙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를 지나치게 생명체에 비유했는지는 모르지만 도시 생명체론이라 불리는 설들이 도시 전공자들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많기는 한가보다.
시인 유하뿐 아니라 필자도 중학생 시절 세운상가에 라디오 수신기를 만든다는 핑계로 트랜지스터나 다이오드 부속을 사러 가서 세운상가의 명물 보행 데크에 들르곤 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두리번거리면 누군가가 “학생 좋은 거 있어” 하며 손을 잡아끌던 그 여름의 끈적한 감촉을 생생히 기억한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서 떨리는 손으로 오래된 를 건네받고 후다닥 보행 데크를 뛰어내려온 중학생의 엄청난 모험은 며칠 뒤 은밀한 눈짓으로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마초 의식을 부풀려 홍보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서울에 사는 남자들에게 회자되는 통과의례가 아닐까?
세운상가는 굳이 초보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아니더라도 서울의 호기심 많은 이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는 기발함과 에너지의 중심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Apple 2에 필적하는 세운상가 조립 컴 Apple 2+가 등장한 곳도 이곳이고(80년대 초반 가격이 35만원이었다.) 웬만한 직장인 월급에 맞먹는 이 정체불명의 컴퓨터를 써보려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에게는 필수 순례지가 되어갔다. 80년대 초중반을 달구던 컴퓨터에 대한 관심과 세운상가 보행 데크에서 얻을 수 있는 성인 문화에 대한 야릇한 기대감이 맞물려서 이곳은 항상 진취적인(?) 고등학생들로 붐볐다.
굳이 기술 서적이나 전자 부품이 아니더라도 70~80년대를 구축한 통기타 문화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비틀스나 존 바에즈, 모세다데스의 백판 LP 레코드를 찾아서 여기에 왔을까? 그들에게 세운상가는 금지와 억압의 문화에서의 작은 해방구가 아니었을까?
나는 1967년에 완공된 세운상가를 지금의 관점에서 건물이 낡았다든가, 퇴락해가는 불건전 업종의 집적소라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지금의 관점에만 머무르지 말고 이 장대한 건축이 세워진 196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면 서울의 근대성과 발전에 대한 이상주의와 군사 문화적 돌격 정신이 특이한 형태로 결합된 1960년대의 새로운 정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40년을 버텨온 이 건축물의 한 꺼풀 속 깊은 의미를 읽어낼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서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나라면 서슴없이 정도전과 김현옥을 꼽겠다. 이 두 사람이 시대적으로 많은 격차를 두고 살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게다. 정도전은 1390년대에 한양으로 천도한 새 왕조의 지휘자로 새로운 도읍의 모습으로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대로를 건설하고 덕수궁까지 내려온 도로가 관악산의 화기를 피할 수 있도록 남대문에서 도로를 곡선으로 틀어서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까지 우회하도록 도심의 패턴을 정리한 주역이다.
김현옥 시장은 그로부터 6백 년 뒤 1960년대의 서울을 바꾸어나가는 주역으로 그의 손에서 말 많은 와우아파트부터 남산터널 그리고 서울의 사창가 종삼(종로삼가)을 밀어버린 추진력이 나왔다. 청계천의 더러운 똥물이 안 보이게 덮고 부족한 도로를 그 자리에 건설한 것도 그다. 정도전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모든 궁궐과 전각에 이름을 붙인 동아시아의 지성사를 꿰뚫는 학식이 있었다면 김현옥에게는 안 되면 되게 한다는 실로 놀라운 추진력이 있었다(그래서 지금도 회자되는 불도저 시장이 아닌가).
한국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서울은 국민소득이 불과 10달러밖에 안 되는 가난한 도시였다. 1960년대 초반에 5.16 혁명 지원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시장으로 근무하면서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이 40세의 시장은(지금의 오세훈 시장보다 젊었다.) 취임 일성으로 “서울의 근대화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시장 취임사)”라는 구호를 표방하면서 도시 개조에 나선다. 그의 참모진을 봐도 33~39세의 겁 없는 아이들이다. 이제 하루라도 무언가 저지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시장을 감당하느라 모두 녹초가 된다. 예컨대 66년 5월 16일 하루에만 (혁명기념일이라는 특수성이 있었지만) 두 건의 도로 확장 공사를 포함한 94건의 공사 관련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그는 기공, 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를 시장실 벽에 걸어놓았는데 가위로 시장실 벽을 거의 채웠을 무렵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언제나 ‘올백’으로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넘긴 이 젊은 시장 김현옥의 당면 과제는 서울을 ‘세계에 내놓을 만한’까지는 아니라도 ‘세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는데 그제나 지금이나 무엇을 하려면 부지가 필요한 법, 땅을 구하는 일이 사실 사업의 절반이었다.
김현옥이 강조한 창의적 발상의 전환이 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날 그의 눈에 일제 시대 미군 공습으로 화재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건물을 일부러 철거한 종묘 앞에서 남산 밑 필동에 이르는 폭 50여 미터의 소개공지(疏開空地)가 눈에 ‘화악’ 들어온다. “오호, 바로 저기야. 바로 저기에 꼴보기 싫은 청계천을 덮어버리고 근대화의 상징 역할을 할 수 있는 건축물들을 세워서 혁명 정부의 근대화 성과를 자랑하는 거야!” 그의 계산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건축가 김수근을 만나면서 불꽃이 튄다. 5.16이 난 해에 귀국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젊은 건축가에게는 5.16 혁명 공약인 ‘조국 근대화’의 메시지가 복음처럼 들렸을 터. 원래 관료는 창의성이 빈곤하고 건축가는 프로젝트가 필요한 법이다. 그 일을 맡기는 정부가 정통성이 있는 정부든 아니든 간에. 근대 건축의 대부 르 코르뷔지에도 프랑스가 독일의 괴뢰 정권 비시 정부하에 있을 때에도 일감을 따기 위해 그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았는가.
문제는 서울시에서 이 부지를 ‘도로’ 용도로 고시해놓은 것. “시장님, 도로로 고시해 놓고 건물을 지으면 이 공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시가 땅 장사 해 먹는다고 비난하지 않을까요?” 시장도 이 말에는 속수무책, 고민만 거듭하는데 이때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눈망울 부리부리한 건축가 김수근이 나타난다. “아래서는 도로 기능을 유지하고 위에는 건물을 지으면 되잖아요.” 그런 디자인을 해오겠노라, 호언장담. 포마드 시장의 눈에는 뿔테 안경 건축가가 믿음직해 보였다. 김현옥의 대담성, 겁 없는 젊은 건축가의 야망이 맞물리면서 아시아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담한 건축물이 구상된다. 김수근이 날밤을 새워서 제시해온 계획안은 세운상가, 진양상가, 삼풍상가, 신성상가의 사총사다. 종묘 앞에서 시작되어 남산 밑에서 끝나는 박스형의 고층 건축물로 구성된 길이 1킬로미터에 달하는(거리에서 3개 층 정도가 올라간 공중 통로를 갖추고 종로, 청계로, 을지로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직선형의 건물군이다. 공중 통로인 보행 데크와 그 아래로 모두 상업 시설이 들어가고 그 위에는 주거까지 할 수 있으니 직장과 주거가 인접해야 한다는 서구 근대 건축의 추세를 수용하면서 당시의 자질구레한 도시의 허섭함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대단위 ‘Super Block 이론’에 걸맞은, 그야말로 근대화의 모범생으로 뽑히는 데 손색이 없는 건축 디자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부유층 또는 중산층이 신분 상승용으로 꿈꾸는 주상 복합의 개념이 이미 1967년에 ‘여기에서’ 실현되었다.
지도상에서 종묘와 남산을 잇는 지점인 세운상가는 조선 5백년 역사의 흔적에 대한 근대 건축의 잔인한 선형 난도질(반대 입장에서 보면)이던가, 서울을 기나긴 잠에서 깨워서 세계화의 참여자로 복귀하도록 한 근대적 의지의 발현이다. 두 입장 사이에서 기묘한 타협이 이루어진 끝에 공사에 착수하고 1967년에 입주한다.
김수근이 구상한 새로운 도시의 비전, 지저분한 도로는 그대로 두고 공중 데크를 통해 종묘에서 남산까지 ‘죽’ 잇는 안전하고 편리한 가로는 결국 네 상가 사이의 통로가 각 건물 사이에서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면서 반 토막이 난다. 게다가 이 공중 데크의 기능이 인간의 음침한 본성에 의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화하기에 이른다. 약 1백50미터 간격마다 끊어진 데크는 지상에서 유리되어 1백50미터 안에서의 고립을 즐기는 한국판 NERD들이 몰려들어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 가운데 괴짜가 많게 마련이든가. 그들의 기술 탐닉은 헬리콥터와 잠수함도 만든다는 세운상가의 명성을 쌓아 올렸고 관음증은 포르노그래피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 현상은 세운상가를 위해 종삼을 밀어버린 역사의 복수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도시의 익명성을 즐기면서 무언가 막히고 끊어진 곳까지도 선호하게 마련인 것일까?
서울을 아시아의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키려는 김수근과 김현옥의 꿈은 장대했으나 그 공중보행로의 꿈은 법규와 제도의 저항에 밀려 낙마한다. 어쩌면 그것은 후진국에 이식된 선진 이상주의의 상투적인 결론일 수도 있다. 1960, 70년대 식의 입체 도시? 자동차와 인간을 분리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하도, 공중 보행로, 지상의 3가지 통행 방식이 혼재되는(?) 실험은 더는 각광받지 못한다. 당시의 핑계는 인간의 안전과 쾌적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나, 결과는 대부분 도시에서 자동차 속도의 제고에만 초점을 맞춘 사고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그 근대성 (Modernity)의 꿈 자체는 소중한 유산이다. 서울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꾸었던 그 꿈마저 실패한 것은 아닌 것이다.
보스턴에서 아테네까지 자동차를 후퇴시키고 인간을 먼저 위하는 실험들은, 이제 그 자체로 사람들을 도시로 돌아오게 만드는 결과로 입증되고 있다. 도시를 지배한 ‘더 빨리! 더 많이!’라는 속도의 문화는 새로운 친환경적인 느림의 문화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운상가의 가장 큰 도전은 존치냐 철거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각 지점을 연결하고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번에도 종묘 앞에서 필동, 더 나아가서 남산까지 맺고 연결하는 일이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보행자 친화, 환경 친화라는 말이 구호로만 되풀이된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Words 이건섭(건축가)

세상의 운을 부르려던 어떤 상가에 대한 추억
*1966년 세운상가의 기공식에서 김현옥 서울시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란 뜻으로 세운상가란 휘호를 썼다고 한다.
어느 날 나는 세운상가를 어언 20년 만에 헤매고 있었다. 목적은 중고 오디오 구입. MP3 디깅에 지쳐 아날로그로 한갓지게 음악을 듣고 싶었다. 카라얀과 마일스 데이비스가 애용했다던 AR스피커에 테크닉스 턴테이블을 연결해 언더그라운드 힙합을 듣는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현재 세운상가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빈티지 오디오의 메카다. 늙수구레한 아저씨들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신문을 보며, 호객 행위엔 전혀 관심 없는 그런 매니악한 분위기. 골목골목을 따라 늘어서 있는 잡다한 전자 기기점들 중에서 나는 어렵게 원하던 곳을 찾아냈다. 갑자기 아득한 10대 시절, 성인이 되기 위한 각종 참고 자료들과 ‘백판’들, 마이클 셍커가 들고 나온 플라잉브이 깁슨 기타를 산 곳도 이곳 어딘가였다는 생각이 났다. 내 무의식 어딘가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10대의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골목 입구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오늘날 대도시는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유기체다. 지금은 건축계의 메가 트렌드가 된 램 쿨하스도 스타 건축가가 되기 전, 저서 <정신착란증의 뉴욕(Delirious New York)>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산만한 정신 구조의 계보를 특유의 필치로 그린 적이 있다. 대도시 서울에도 역시, 그 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처럼,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식적인 모습과 감추고 싶은 무의식이 공존하고 있다. 잠들기 전, 전의식 상태처럼 의식과 무의식이 오묘하게 공존하는 지역도 있다. 한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이 엉켜, 갈등하고 화해하며 성장하듯 이 도시엔 아옹다옹 성장통을 겪으며 살아온 나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란, 감추고 싶은 무의식 속에 진짜 자신의 모습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외국에 나가 그 도시의 서브 컬처신에서 오히려 속살을 드러낸 도심의 진솔한 매력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100% 몸과 마음이 완전무결한 인간이 없듯이 건강한 곳이 있으면 어딘가 아픈 데도 있는 것이 대도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도시엔 글쎄… 성형 수술보다는 먼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과 극적인 ‘딜’을 하여 이뤄낸 베트남 참전, 형제 부모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남의 나라 전쟁에 동맹국 미군의 피복을 대며 동대문과 청계천, 또 서울은 성장해왔다. 평화시장이란 이름이 한국전쟁 후 실향민들이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뜻으로 붙여졌다는 애틋한 유래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어느 패션 디자이너는 동대문시장을 보며 이곳에 오면 한국만의 독특한 패션 인프라가 느껴져 자랑스럽다고까지 하더라. 게다가 세운상가는 당시 35세의 청년 건축가 김수근의 야심작이고, 지금의 타워팰리스처럼 고위층들이 앞 다투어 입주했던 한국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이다. 실패한 근대화의 상징물일 뿐이라고? 자신의 과거를 아프게 보듬어 안아보지 않은 인간이 현재 모습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곳이 녹지대의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하더라도 어쩐지 ‘무늬만’ 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평화, 낙원, 세운, 이름도 정겨운… 좀 후줄근하면 어떤가? 독특하고 자생적인데 말이다. 하긴 이런 이름이면 소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명품이 될 순 없겠다.
내가 태어나기 전 60년대, 청계천 판자촌 철거, 그 후 놓인 청계, 삼일고가도로는 저개발의 추억, 낮게 깔린 무의식, 역사의 아이러니를 가리는 상징이었다. 당시 서울 도시 계획에 참여했던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손정목은 그의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 사절들과 워커힐로 곧장 가기 위해 이 고가를 놓았다는 비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워커는 알다시피 한국전쟁 시 활약한 미군 장군이고, 워커힐호텔은 중앙정보부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로 개발한 곳이다. 지금 그 옆에는 여지없이 수입 명품 W호텔이 세워졌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서울의 역사는 ‘일제 잔재-한국전쟁-전후 저개발-근대화-수입 명품’이라는 노선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저개발이 근대화 개발 논리로 대체됐다면 근대화는 수입 명품으로 대체되는 식이다. 이제 고가도로마저 철거된 후 그곳엔 맑은(?) 인공 하천이 흐르고 그 정점에는 수입 명품인 올덴버그의 다슬기가 버티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근대화 세대의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사상 최고의 교육열을 경험했던 70년대 생, 내 청춘의 한 부분을 장식했던 세운상가마저 철거된다.
철거와 개발은 마약 중독같이 계속된다. 작가 최정화가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낙원상가를 여기저기 기워 새롭게 레노베이션을 하고 싶다고 한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아티스트와 건축가가, 서울시의 수주를 받아, 익숙하면서도 낯선, 씩씩한 모습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세운상가나 낙원상가를 볼 수는 없을까? 그게 더 비용도 싸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서울의 개발 중독이 시작된 지는 이미 오래다. 그 대가는? 마약 중독이 무릇 그렇듯 계속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고, 가격은 점점 더 비싸질 것이다. 거대 담론에 대한 집착이라면 어느 세대 못지않은 386세대. 그 세대가 배출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대 정신에도 걸맞은 수입 명품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와 박정희 시대의 원조 불도저 김현옥, 청계천 복원의 주인공 이명박에 이은 역대 불도저 서울시장 톱 3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 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명칭은 ‘서울 도심 재창조’. 젊고 잘생긴 시장답게 마스터플랜도 잘빠졌다. 이세이 미야케를 즐겨 입는다는 그 이름도 신비한 여류 건축가(자하 하디드)가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설계할, 새로운 서울시의 랜드마크가 될 건축물의 이름은 ‘월드 디자인 플라자’란다. 그래서 서울을 5대 컬렉션의 도시로 육성한다니, 명품 시민의 위상에 걸맞은 육성회비를 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 수입 마약은 위정자들의 구질구질한 무의식을 한 방에 ‘브레인 워싱’해줄 수 있을까? 그래야 비싼 값을 할 텐데? 시민들의 호응은? 남김없이 깨끗하게, 미래적으로 판타스틱하게? 그러나 그들이 낙태시킨 가여운, 우리를 아프게 성장시킨 도심의 무의식은 영국산 명품 건축이 내려다보는 푸른 공원 어딘가에서 너덜너덜해진 채 우리를 원망할 것이다. 이제 그건 다시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빈티지 명품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인프라를 이어받은 독특한 하위 문화가 건조한 도시에 활력을 주는 무의식적 매력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원망은 글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졸부들의 1차 욕망은 명품 구매를 통한 구질구질했던 과거 망각과 자기 과시다. 내면 응시와 자기 반성할 겨를이 없는 이들에게는 무한 경쟁을 통한 차별성만이 열등감 극복의 최선책이다. 괴롭지 않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또 새로운 차별성 치적과 웰빙을 위해서 서울은 서울의 역사를 계속 망각해나갈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명품의 시대. 이제 우리는 명품 시민, 어쨌든 서울은 명품 도시다!
Words 강영민(화가)

기억의 철거, 또는 철거의 기억
그 시절,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그게 어떤 가난했던 사법고시 합격생의 발언이었던가? 기억은 얼마나 허술한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일단 그 기억이 맞다 치고. 문득 그 고시 합격생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 고시생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검사와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을까? 지금쯤은 강남의 주상 복합 아파트에서 ‘불편하지 않은’ 노후를 살고 있을까? 가만 있어라, 그런데 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던 그 얘기가 나온 시점이 언제였던가? 찢어지게(이 얼마나 노골적인 부사인가!) 가난한 집 안의 아들이 서울대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시절은 언제까지였더라?
버스 전용 차선이 생긴 뒤로 지하철을 타는 횟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종로를 버스로 횡단하는 횟수가 극적으로 늘어났다. 언제부턴가 종로4가 세운상가 건물 전면을 덮은 현수막들이 어지러워졌다. 생존권, 영세 상인, 빨간 머리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철거 대상 건물이나 지역에 내걸리는 현수막은 그것이 반대하는 결과에 대한 예고 간판이었다는 것을. 용산 전자상가, 또는 강변 테크노마트 앞에서 세운상가는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낡은 것은 죄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라고.
나는 ‘세운상가 키드’가 아니었다. 학교에 나돌던 그 ‘빨간책’들에 대한 관심이야 나라고 없진 않았지만, 내 발로 세운상가를 찾아가기에 나는 과도한 모범생이었고, 주머니는 과도하게 공허했다. 세운상가에 들락거리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이 땅에 국산 오디오(‘전축’이 아니라) 붐이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친구들 집에 있는 3단, 4단 콤포넌트 시스템이 부러워 머리가 돌 지경이었던 팝송 키드는 어느 날 공고에 다니던 사촌과 의기투합했다. 세운상가에 가서 부품들을 사서 조립하자. 앰프 키트를 사고, 볼륨 스위치들을 사고, 집에 돌아와 망가진 전축을 분해했다. 스피커는 아직 살아 있었고, 턴테이블도 돌아가고 있었다. 사과 상자를 뜯어 샌드페이퍼로 곱게 갈고 스위치를 넣을 구멍을 뚫고…. 드디어 전원 스위치가 켜지고, 바방~~~ 그때 처음 걸었던 판이 산울림이었던가? 혜은이였던가? 세운상가에서 사들인 부품들과 집에 있던 고물 전축이 만나, 내 생애 최초의 ‘오디오 시스템’이 되었다. 세운상가의 기적이었다. 두 고삐리는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던 그 시절, 대한민국의 윤리 교육이 키워낸 자랑스러운 꿈나무였다. 1976년, 또는 1977년의 일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사촌이 전자 부품만을 위해 세운상가에 들락거린다고 믿었다. 어느 날, 사촌이 공범자의 웃음을 지으며 내 손에 몇 권의 미국 잡지를 건네기 전까지.
대학 시절. 여전히 팝 키드였으므로 세운상가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새로 나온 ‘백판’을 찾아서. 라이선스 음반 재킷 뒷면에 그어져 있는 그 숱한 칼질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시절 왜 그리도 금지곡은 많았는가. 정의 사회는 금지 사회와 동의어였다. 백판을 사러 가고 있는데, 꼭 누군가가 팔목을 잡았다. ‘좋은 거’ 있다고. 어느 날이었던가, 학교에서 놀다가 누군가 제안했다. 세운상가에 가자고. 백판을 사러? 아니, 그 좋은 것이 정말 좋은지 확인하러 가자고.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우르르 몰려간 세운상가에서 경험 많은 한 친구가 누군가와 접선했다. 몇 개의 문을 지났는지, 몇 개의 계단을 올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 문이 열렸다. 너구리 천 마리는 죽이고도 남을 담배 연기가 우리를 강타했다. 한 편의 초저화질 포르노 상영이 끝나고 우리 중에 가장 먼저 나가자고 했던 친구는 누구였던가. 친구야, 고마웠어. 그 알량한 텔레비전 화면으로 봤던 포르노는 정말 재미없었어. 우리가 들어갔을 때 이미 그곳에 있었고, 한 편의 포르노가 끝나고 다시 돈을 내라고 했을 때 또 지갑을 열던 그 남자들의 눈이 무서웠어. 말로만 듣던 마약쟁이들의 눈이 저렇겠구나, 상상의 날개가 저절로 펼쳐졌거든. 1980년대 초·중반의 어디쯤이었다.
이미 그러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미 세운상가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운’이 아니었다. 언더그라운드였다. 서울의 부자들이 살았다는 그 아파트의 문을 열면 그렇게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포르노가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법으로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일제 워크맨들이 널려 있던, 범법 지대였다. 카피로 이루어낸 경제 기적은 그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림자도 깊고 풍요로웠다. 그 그림자의 끝자락에선 이미 용산이 태동하고 있었다. 세운상가 구름다리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고 대림상가 구름다리를 건너 을지로를 건너고… 이상했다. 왜 언제나 그곳에선 걸음이 그렇게 빨라져야 했을까. 그럭저럭 평균치는 되는 월급을 받으며 수입 오디오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상가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언제나 걸음이 빨라졌다. 지상을 걸을 때조차 그곳은 언더그라운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지금 해석한다. 실제로 전혀 어떤 위험이 가해질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몸이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다. 그림자 또는 ‘쇠락’ 앞에서 생물들은 원래 민감한 법이다.
그 오래된 그림자 또는 오래된 쇠락이 사라진단다. 아프냐고? 글쎄… 그 그늘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영세 상인’들의 문제와 관련해서라면 아프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거대한(지금도 나는 세운상가에 가면 왜소해진다.) 콘크리트 덩어리를, 그렇게 길고 깊고 풍요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들며 지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도 아프다. 그런데 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하면 된다’의 시대 정신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1백억 달러 수출과 1천 달러 국민소득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정말로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그 구호 앞에서 스러져 갔는가!) 그 참혹한 시절의 가난이 모든 것에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글쎄, 갸우뚱.
세운상가와 비슷한 시절에 지어졌던, 그리고 먼저 철거의 운명을 맞았던 낙산 자락의 서민 아파트를 기억한다.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편으로 집들이 나뉘어 있었다. 겨울이면 빙판이 되는 가파른 고갯길로 오르내리던 연탄 리어카를 기억한다. 다닥다닥 서향으로 지어진, 그래서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던 그 아파트의 동쪽 편 반쪽에 살던 내 친구들을 기억한다. 집 안에선 햇빛 한 줌 못 쬐며 살아야 했던 그 친구들은 모두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친구들 중에 세운상가로 진출한 녀석들은 없었을까. 역시 하루 종일 햇빛 들지 않는 그 지상에 세워진 건물에서 장사하며 그들은 그저 불편했을 뿐일까.
그 똑똑했던 사법고시 합격생은 틀렸다. 가난은 죄였다.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모두 죄다.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건물은 죄악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왜소가 단순히 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길 굳이 덧붙여야 할까. 세운상가가 그토록 급속하게 언더그라운드로 가라앉은 이유는, 건축가의 비전이 없어서도 아니었고, 건축 철학이 없어서도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타인의 불편에 대해 둔감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찬란한 빛 아래서 얼마나 많은 보행자들이 멀쩡한 지상을 걸으면서 지하로 내몰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는지, 거기서 얼마나 해괴한, 설명하기 어려운, 생물학적 공포를 느껴야 했는지, 그들은 몰랐다. 둔감했다. 배려 없음. 죄악이다.
인간에 대한 배려 없음, 어디 그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뿐일까. 지금도 서울 구석구석에 지어지고 있다. 조금 더 세련된 커튼월과 조금 더 비싼 마감재를 사용했을 뿐, 환경 또는 생태는 고사하고 같은 인간에 대한 배려도 없는 건물들, 어디 하나 둘일까. 그 거대한 괴물들이 다시 언더그라운드로 전락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낙산의 서민 아파트가 철거되기 시작할 무렵, 이런 헛소리를 했다. “한 동은 그대로 남겨서 기념비로 보존하자. 인간에 대한 배려 없음이 얼마나 무서운 형상으로 물질화될 수 있는지, 그 증거물을 남겨야 한다. 그래서 도시 계획자들, 건축가들의 교재로 써야 한다”. 세운상가에 대해서도 똑같은 헛소리를 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세운상가는 기념비로 남기기엔 너무 거대하다. 그 자리에 녹지 공간과 함께 삼십 몇 층 주상 복합 건물들이 계획되어 있다지. 거기서 나온 수익이 있어야 철거 보상비와 녹지 공간 조성이 가능하다지. 다 좋다.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개발 독재의 그림자를 지우겠노라며 ‘재개발 독재’의 불도저를 또 시민들에게 들이밀지 말아주기를. 그리고 제발 조금만 천천히 가주기를. 성당 하나 짓는 데 백 년, 이백 년을 쓰는 남들을 따라 하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천천히 가주기를.
왜 모든 기념비적 건축이 한 대통령, 한 시장의 재임 기간에 완공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만 시간 들여 생각해보고 시작해주기를.
Words 조병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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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조병준(시인)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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