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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eptember 03, 2013 0

누군가는 SNS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부조리의 온실이며, 혼란을 야기하는 장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SNS를 적으로 간주하는 이 상황이 과연 옳은가?

지난 18대 대선. 야권은 출구조사 발표 직전까지 승리를 확신했다. 투표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전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은 야권의 승리를 의미했다. 하지만 결과는 야권의 패배였다. 그렇게 18대 대선이 끝났다. 이유가 필요했고, 사후약방문이 줄을 이었다. 그중 하나가 세대 전쟁이다.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는 “야권의 세대 전략은 ‘2040 전략’이었다”고 이야기한다(<시사인> 276호, ‘세대 전쟁이라는 이름의 비극’). 그만의 독자적인 시각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초딩’들도 아는 상식이다.

SNS, 특히 트위터는 야권의 기대주였다. 그들은 트위터를 간접민주주의의 맹점을 보완할 도구로 간주했다. 특히 리트윗 기능은 트위터를 압도적인 파급력을 지닌 매체로 만들었다. 실제로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 앞서, 여러 나라들이 트위터 때문에 정치 지형도를 바꿔야 했다. SNS는 특히 젊은 계층이 많이 사용하는 매체다. ‘민주주의’와 ‘(그나마) 젊은 세대 친화적 마인드’를 무기로 여겨온 야권이 SNS를 손오공의 ‘원기옥’ 같은 비기(秘技)로 여긴 건 인지상정. 그런데 중요한 건 원기옥이 베지터도, 프리더도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원기옥 같은 비기에 모든 걸 쏟아부은 야권 또한 먼저 마신 김칫국이 무색하게 처절하게 고꾸라졌다.

지난 <에스콰이어> 4월호에 실린 ‘SNS의 종언’이란 기사는 SNS에 대한 의심의 집약물이다. 요지는 이렇다. SNS는 전체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 일부의 의견이 전부인 양 과대 대표된다는 것, 나아가 과대 대표된 의견으로 인해 분열이 유발된다는 것. 이 기사를 쓴 신기주 기자는 이런 이유를 토대로 기사 말미에 조금은 과격하게 선언한다. “한국은 10년 만에 두 국민 사회가 됐다. SNS 탓이 크다. SNS는 전시엔 정쟁하고 평시엔 연예인 사생활로 뒤덮이는 난지도 광장이다. SNS의 종언이다.”
이 기사는 SNS가 품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정치적 가능성을 부인한다.

다른 맥락에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얼마 전, 축구선수 기성용은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발이 아닌 손(과 입)으로 화를 자초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최강희 감독을 비밀 페이스북에서 조롱한 일이 공개되며 여론의 질타를 맞은 것이다. 미니홈피와 트위터로 이미 설화를 겪었던 터라 더욱 공분을 샀다. 어디 기성용뿐이랴. 수많은 유명인들이 SNS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포털 검색창 아래 화제의 검색어에 자주 등장하는 ‘OOO 해명’이란 주제어를 클릭하면, 대개 SNS에 별 생각 없이 올렸던 글들이 문제된 경우다. 문화 평론가 하재근은 한 칼럼에서 “연이어 구설에 오르는 유명인들은, 지금이 손가락을 조심해야 하는 시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시사저널> 1240호, ‘너의 손가락이 뭘 했는지 난 알아’). 사적인 잡담에 공적으로 십자포화를 쏘아대는 대중을 비꼬았다. 이렇듯 새 시대를 열어갈 매체로 평가받은 지 불과 수년 사이, SNS에 대한 평가는 자이로드롭보다 허무하게 급전직하했다.
그런데 의문이다. 그토록 열광했던 SNS는 빨리 끓고 빨리 식는, 그저 그런 냄비에 불과했던 걸까? SNS에 대한 열광은 오두방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걸까? ‘흑역사’만 남긴 채 뒤안길로 퇴장하고 마는 걸까?

그런데 혹시,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찬이 부당한 것이었다면, 그 상찬에 대한 비판 또한 핵심을 비켜갔다고.
사례 하나. 2011년 9월, 트위터의 공동 창업자인 에반 윌리엄스는 방한 기자회견에서 “트위터는 친구 맺기를 목적으로 하는 SNS가 아니라 실시간 정보를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미디어’라고 강조”했다(, ‘트위터는 SNS가 아니라 한입 뉴스 미디어’). 이 말만 놓고 보면 우리가 트위터에 기대한 것들, 즉 ‘메시지의 공유’ ‘사이버 광장’으로 설계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기에 SNS에 몰두했던 야권이, SNS보다는 올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여권에게 패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에서 SNS에 대해 제기된 비판, 즉 ‘SNS의 종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바랐던 것과 달리, SNS를 통한 메시지 공유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고, 우리가 SNS를 오해했던 거라고. 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드러난 어떤 정치적 요구를 모두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사실 모두가 이 오해의 수렁에 빠져 있던 건 아니었다. 가령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대표적인 ‘SNS 정치’ 비판론자다. SNS에 관한 그의 의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 같은 SNS 발전은, 그렇지 않아도 약한 한국 정당의 하부 구조를 더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당의 구조적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짧은 사이클로 움직이는 여론의 무드와 동원에 의해 후보와 지도자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변화에 대한 요구를 정당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정당 제도를 통한 정치 변화가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한국일보>, 최장집 교수 ‘현장 탐방을 하다 보니 안철수 현상 이해돼…’). 그는 선거 이전부터 SNS를 도구 삼은 직접민주주의 실천의 부실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새로운 수단을 찾는 것보다는 공론을 수용할 전통적 공론장과 정당을 강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충고에 귀 기울인 이는 거의 없었다. 이런 충고는 모르쇠로 일관한 채 SNS에 대한 희망만을 설파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정말 SNS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SNS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아닐까?

뜬금없어 보이는 사례 하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은 극단적인 내분에 시달린 끝에 제일 먼저 귀향길에 올라야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까지 나서며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앞서 언급한 기성용 사태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최종 예선 당시, 축구대표팀은 내분설에 시달렸다. 많은 이들이 국내파와 해외파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물증 없는 심증뿐이었고, 누구도 나서서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가 드러난 건 기성용의 SNS 비밀 계정이 한 칼럼니스트에 의해 폭로된 후였다. 축구협회는 그제야 부랴부랴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나섰다(그래 봐야 감독에게 미룬 꼴이지만). 만약 그 내분이 본선까지 이어졌다면? 안 봐도 디브이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선 전 대회 준우승국 프랑스마저 내분과 함께 ‘1등’으로 짐을 싸야만 했다.

또 다른 사례 하나. 지난해 이맘때쯤, SNS를 시끄럽게 한 일이 있었다. 작가와 운동가 사이에 저작권을 두고 논쟁이 오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언제나 그렇듯, 모세가 가로지른 홍해처럼 편이 갈렸고, 나중에는 서로 유식한 말로 욕하기 시작했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평가를 배제하고 이야기하자면 많은 이들이 논쟁을 통해 실망했다. 서로의 바닥을 본 것이다.

이 사태들에 대해 ‘종언’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갈등의 극대화’ 또는 ‘반복되는 편 가르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논쟁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우러러보던 누군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성용이 자신의 자질을 스스로 폭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장신 공격수를 향해 롱패스만 날리는 모래알 국가대표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저작권 사태’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더라도, 이 사단을 통해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실망했다. 우리가 실망한 원인은 한 개인 또는 유명 작가가 꽁꽁 감춰두었을 ‘본색’이었다. 이는 신문, 방송, 라디오 같은 올드 미디어가 미디어의 전부였던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이다. 동시에 유명인들이 기를 쓰고 감추려 했던 ‘팩트’다.

SNS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들이 지닌 오라만을 접할 수 있었다. 때때로 그 오라 덕분에 유명인은 권력 또는 숭배받는 존재가 됐다. 이제는 반대다. 두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SNS 이용자는 결국 불완전한 개인이다. 유명세조차 그들이 불완전한 개인이란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불완전한 개인 덕분에, 대표팀은 브라질에 도착한 뒤에 망하는 대신, 내분이란 리스크를 미리 통제할 수 있었다.
명문(名文)이나 아름다운 작품을 낳은 통찰을, 이름난 작가 또한 항상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어떤 가능성’이란 이런 것이다. SNS는 ‘인간은 결국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매체라는 것. 유명인들 또한 군중 속 개인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모두 알게 되었다는 것. 우리 생각이 의외로 후지지 않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 이로 인해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올드 미디어에 의지해야 했던 시절과 달리, 그것에 기대지 않고도 평등한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SNS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그동안 꽁꽁 감출 수밖에 없었던 주체성을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SNS의 종언을 선언하는 건 성급하다. 이제는 SNS를 통해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한 시대에 ‘SNS의 종언’은 특정한 개인 또는 권력이 선언하거나 결정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해진 시대가 조금은 시끄러울 수도 있다. 그 시끌벅적함 때문에 사회가 ‘난지도’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상암동의 난지도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쾌적한 명소 중 하나가 됐다. 옛 시절의 아수라장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의 깨끗한 난지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다만, 우리에게 이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할 뿐이다. 이 아수라장을 극복할 지혜를 기를 때, 우리는 쾌적한 난지도를 가졌듯,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확성기(SNS)를 빼앗는다고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EDITOR: 이우성
WORDS: 권승재(책 만드는사람)
ILLUSTRATION: 김상인

누군가는 SNS가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부조리의 온실이며, 혼란을 야기하는 장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SNS를 적으로 간주하는 이 상황이 과연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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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우성
Words
권승재(책 만드는사람)
Illustration
김상인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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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우성
Words
권승재(책 만드는사람)
Illustration
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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